▲지리산 벽소령 산장 마당의 우체통.
안병기
재작년 가을, 이틀에 걸쳐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 지리산을 탔다. 하룻밤을 벽소령 산장에서 잤다. 벽소령 산장에 도착하니, 시간이 오후 4시밖에 되지 않았다. 너무 일찍 도착해 버린 것이다. 산장이 문을 열 때까지 벤치에 앉아 기다리는 수밖에. 문득 빨간 우체통 하나가 내 시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한순간, 아주 작은 감동이 가슴 한 켠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곳에서 써 보낸 편지를 받은 사람은 오래도록 행복감에 젖어도 좋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편지를 쓰지 않은 지 오래 됐지만, 한때는 나도 누구 못지않게 편지를 썼던 사람이다. 군대 생활 3년 동안엔 하루에 많게는 60통에서 적게는 20통 이상의 편지를 썼다. 경기도 화성에 있는 남양초등학교 6학년 한 반 전체와 편지를 주고받은 적도 있다.
그 때문에 두 번째 휴가 때는 남양초등학교까지 찾아가서 학생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담임선생 대신 2시간 동안 수업을 진행한 적도 있다. 특히 부산의 은영이라는 초등학교 3학년 꼬마와는 무려 6년간이나 편지를 주고받았다. 가수 윤항기는 장밋빛 스카프만 보면 걸음이 멈춰진다고 하지만 난 빨간 우체통만 보면 저절로 걸음이 멈춰질 정도다.
군대 시절 펜팔의 기억을 떠올리다군대 생활 중 가장 막막할 때가 첫 휴가를 끝내고 귀대했을 때이다. 아직도 내게 부하된 세월은 2년이란 하중을 요구하고 있었다. 눈앞에 보이는 모든 사물들의 코드는 단지 막막함으로 읽힐 뿐이었다.
군대 생활이란 서서히 진행되는 치매 현상의 일종이다. 잎싹에 싹이 나서 잎싹이 감자 감자할 때까지 소통 부재의 세월이 부단히 흘러간다. 이미 골수 깊이 착착 진행되어 가는 치매 현상을 막기 위해서라도 외부를 향해 끝없는 S.O.S 신호를 보내야 했다. 아마도 그 시절 나에게 편지란 쓰고 또 써도 마음을 채울 수 없는 일종의 시장기였을 것이다.
친구들은 물론 친구의 동생, 친구의 어머니에게도 안부를 묻는 글발을 띄웠다. 줄잡아 하루 20여통 이상은 되었으리라. 그만큼의 편지가 답장이라는 형식으로 내 마음 속의 공복으로 답지하곤 했다. 하지만 우리네 생이 언제 한번 뿌린 만큼 거두고 투자한 만큼 수입이 보장되는 정직성을 보여 준 적이 있던가. 군대 갔다 온 사람이면 누구나 겪는 일이지만, 자기가 띄운 편지 양만큼 답장이 되돌아오는 법은 없다. 그에 따라 군발이의 비애도 눈덩이처럼 점점 커져간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우리나라 신발공장들은 말표고무신이나 다이아표 통고무신이거나 <와사등>의 시인 김광균이 근무했던 군산의 만월표 경성고무나 할 것 없이 애인을 군대 보내고 난 후 허전함을 이기지 못해 신발을 바꿔 신는 처녀들의 불건전한 소비 행태에 의해 번영을 누려왔다는 사실이다.
철저한 금욕주의의 스토아학파의 일원이었던 나는 남들처럼 애인이란 '애물단지'를 키우지 않았기 때문에 조국의 경제 발전에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한 것을 제대 20년이 흐른 지금에도 속죄하고 또 속죄할 따름이다.
나는 군대의 보직이 특수했다. 그래서 일반병들과는 격리되어 홀로 지내야 했다. 또 보초나 불침번까지 면제되어 일주일에 그저 한두 시간만 일하면 땡이었다. 가히 '귀족 사병'이라 할만 했다. 내 사무실은 장교든 장군이든 허가된 사람만이 출입할 수 있는 '치외법권' 지대이기도 했다. 모든 검사나 검열로부터도 안전을 절대보장 받고 있었다.
그래서 고참들은 파주 감악산에서 따온 머루나 다래로 담은 술이며 주민 몰래 캐다 담은 인삼주며 뱀술, 보리수 술 따위를 담은 술병들을 들고 와 고이고이 보관해 주길 원했다. 나의 사무실은 거대한 '주류창고'였다. 나는 가끔 하릴없이 심심한 시간이면 이 술병들을 돌아가면서 마셔 버렸다. 술병이 비워지면, PX에서 맨 소주를 사다 부으면 그만이었다.
어떨 땐 서너 탕씩이나 우려내어 마셔버리는 바람에 숫제 다래나 머루 인삼 등의 냄새가 전혀 나지 않는 맨 소주에 지나지 않게 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용케 단 한 번도 들킨 적은 없다. 왜냐하면 고참들은 이미 거나하게 취한 후에 입가심을 위해서 맡겨둔 귀한 술들을 가지러 오는데, 그때는 이미 물인지 술인지조차 분간 못 하는 주맹(酒盲)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님하, 당최 그 맨 소주 마시지 마소. 그예 임이 마셔버리시네. 기어이 임이 마셔버리니 이 일을 어찌할꼬. 위 증즐가 태평연월.
나는 그 태평성대가 주는 지복위에서 일종의 '벤처 마케팅'을 창안하기에 이르렀다. 이른바 편지대필 사업이었다. 어떻게 해서 소문이 번졌던지, 고참들은 가끔 졸병을 닦달해서 얻은 주소 하나만 달랑 들고 찾아와서 편지를 써 줄 것을 부탁하곤 했다. 아무리 간절하게 부탁할지라도 일단은 거절한다. 3~4번 거푸 부탁하면 그때야 못 이기는 체 하고 대신 편지를 써줬다.
기왕에 써줄 걸 왜 화끈하게 써줄 일이지 왜 그랬느냐고? 각골난망이란 말이 괜히 생겼겠는가? 뼈에 새겨도 인간의 배은망덕은 안심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닌가. 대개는 3-4통 정도 써주면 약발이 나타났다. 아가씨가 면회를 오는 것이다. 그 다음날은 나의 주류창고에 술과 사제담배 한 보루가 수납되는 날이다. 술과 담배가 면회 당일에 수납되는 기적은 절대로 없다. 왜냐하면 고참은 외박 펜팔을 주고받은 처녀와 외박 중이었기 때문이다.
재주는 노동자가 부리고 과실은 사용자가 먹는 현실이 군대에서도 똑같이 연출되는 셈이다. 그런 날은 거북선이나 은하수 등 사제담배 맛이 화랑 담배보다 오히려 썼다. 참으로 개 같은 경우였다. 어쨌거나 나의 신종 벤처는 나날이 번창을 거듭했다. 거기에 비례해서 내가 하루에 쓰는 편지량도 그만큼 늘어만 갔고. 그러나 주류와 담배가 쌓여가도 내 마음 속 공허는 다리 밟힌 강아지처럼 낑낑대고 있었다.
어느 날 이슥한 밤에 인사과 고참인 강생훈 상병이 편지 몇 묶음과 소주를 들고 나를 찾아왔다. 심심하면 이 많은 위문 편지 중에 네가 골라서 한 번 답장을 써보라는 것이다. 이 전남 여수 출신의 강생훈 상병은 정말 콩 한쪽만 생겨도 날 불러 나눠 먹고 술 반 잔만 생겨도 나를 불러내어 나눠 마셨다. 그 점에선 대구 출신의 우리 중대장도 마찬가지였지만. "이 농사지어서 누구랑 누구랑 먹을까?" 이를테면 나는 군대생활 내내 두 사람의 우렁각시 덕을 톡톡히 본 셈이다.
이튿날 낮에 위문편지들을 하나씩 읽어나가다 그중에서 가장 잘 쓴 편지 한 통을 골랐다. 부산시 부전1동(서면 로타리던가!)에 사는 전은영이란 초등학교 3학년 어린이였다. 난 지체없이 모르스 부호를 두드렸다. 뚜뚜 뚜 뚜뚜뚜. 안녕, 이 꼬마야. 이 아저씨는 지금 난파중이란다.
직유의 삶에서 해체되지 않은 은유로 남은 추억
일주일쯤 지나자 답장이 왔다. 그리하여 은영이와 나는 일주일에 3통 이상의 편지를 주고받았다. 은영이는 정말 초등학교 3학년 학생으로선 믿을 수 없을 만큼 깜찍한 문장력을 구사했다. 그리하여 내 마음의 허공은 은영이가 피우는 꽃으로 너울너울 화사해 갔다.
국방부 시계는 고장이 없다. 두 번째 휴가를 지나 은영이와 펜팔을 시작한 지 1년 반이나 됐을까. 4학년이 된 은영이는 제 사진에 언니 사진까지 덤으로 동봉하면서 내게 은밀하게 말했다. "아저씨, 저 예쁘죠? 우리 언니들(3명. 2명은 대학생) 참 미인이지요? 우리 집에 한 번 놀러 와요. 다들 기다리거든요."
그러면서 한편 은영이는 내 사진도 보내줄 것을 강력히 촉구하는 것이다. 마지못해 보낸 내 사진을 받아본 은영이는 즉각 답장을 보내왔다. "아저씨, 생각보다 참 못 생겼다. 그렇지만 그렇게 말하면 아저씨도 나보고 못 생겼다고 놀릴 테니 취소할게요." 은영이가 내 삭막한 군대 생활의 허공에다 피워준 꽃이 만발할 즈음 난 군대를 제대했다.
은영이는 제대하면 꼭 부산 서면의 자기 집을 방문해달라고 거듭 당부하였다. 제대 한 달쯤 지나 은영이를 만나러 부산으로 내려갔다. 부산역 앞에서 은영이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 저편에서 음성이 들려오고 난 순간적으로 전화기를 내려놨다. 그리고 태종대로 발길을 옮겼다. 태종대의 바람은 쉬 모든 걸 날려버린다. 그립다는 생각까지도, 오랫동안 쌓아온 갈망까지도 산산이 흩어가 버린다.
용두산에도 올라가서 비둘기들이 보여주는 오프라인 모임을 구경하기도 하고 광안리, 에덴공원, 을숙도 등지를 가뭇없이 헤매고 다녔다. 그렇게 2박 3일의 시간이 흐지부지 흘러갔다. 결코 은영이를 만나선 안 된다. 많은 날을 환멸에 떨어본 나는 은영이가 내게서 느낄 환멸이 두려웠다. 이 생각이 부산에 있는 내내 나를 지배했던 것이다. 끝내 나는 은영이에게 전화를 거는 대신 광주행 고속버스를 선택하고 말았다.
그러나 편지는 은영이가 중학교 3학년이 되기까지 이어졌으며 그 후 또 한 차례 은영이를 만나러 부산에 가지만, 먼저와 똑같은 순서로 되돌아 오게 된다. 은영이에게 부치는 편지에는 내가 저를 만나러 부산에 갔다가 되돌아왔다는 이야기는 쓰지 않았다.
늘 생의 변두리에서 삶의 허망함에 가슴 저리며 살던 내 쓸쓸한 젊은 날에 은영이는 예쁜 리본을 달아준 아이였다. 지금도 은영이와 편지를 주고받았던 6년 동안의 시간을 생각하면 난 어느덧 태종대 난간에 서서 대책 없이 펄럭이곤 한다.
가을 속엔 남성의 감성을 자극하는 뭔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