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성읍내에 들어서자, 제일 먼저 우리를 반긴 건 섬강. 쌀쌀한 날씨 탓인지 강물조차 추워 보였다. 강을 따라 올라가자 금방 들이 나왔다. 강원도인데도 넓은 들판이 있다. 빈 들판엔 알곡을 다 털어낸 짚이 깔렸고, 추수가 끝난 농부는 짚을 추스르느라 여념이 없다.
6번 국도 들길을 가노라니 저만치 앞에 낯선 이정표가 나타난다. '디오니 캐슬 와인' 이라는. 아마도 와인 공장인듯 한데, 얼핏 바라보니 경치가 꽤 아름다워 보인다. 지체없이 그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차 한 대 겨우 다닐만한 길로 낙엽이 눈처럼 쏟아져 내린다. 우와! 우린 동시에 탄성을 질렀다. 만추라는 느낌이 가슴을 울린다.
예상대로 와인 공장인데 포도가 아닌 복분자로 만든 와인이다. 이름난 횡성 한우와 복분자 와인을 내놓는 고급식당도 있고, 한우와 와인은 참 잘 어울리는 조합이다. 아직 점심때가 안 된 이유도 있고, 우리가 가기엔 너무 고급스러운 분위기다. 회원제로 운영하는.
꼭 입으로 먹어 맛인가. 이렇게 서서 눈으로 먹고 마음으로 먹으면 되는 거지. 정말로 우리가 먹은 건 음식이 아니라 가을이었다. 바람에 날리는 낙엽 폭탄은 이 가을에 받은 최고의 선물이었다.
풍수원은 나지막한 산 아래에 고요히 숨어 있었다. 오랜 세월 박해를 피해 숨어들었던 마을 안쪽에는 숨은 듯 작고 가녀린 십자가가 삐죽이 솟아 나와 있었다. 아담하고 고색창연한 로마네스크 서양식 건물, 바로 동네 집들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풍수원 성당이다.
강원도와 경기도 경계지점인 성지봉 기슭에 자리한 풍수원 천주교회는 1846년부터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자였던 이승훈의 조카 이신규가 목신부(Anthony)와 선교를 했던 곳이다. 시골 마을 외진 곳의 풍수원 성당 역사는 1801년 신유박해, 1866년 병인양요, 1871년 신미양요를 겪으며 탄생한 성당이다.
박해받던 천주교 신자들이 하나 둘 강원도 횡성 유현리 풍수원 마을로 피난해 신앙촌을 이룬 것. 화전을 일구거나 옹기를 만들어 팔아 생계를 이어나간 그들은 1886년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자 비로소 프랑스인 르메르 신부가 만든 초가 사랑방 교회에 모여 마음 놓고 미사를 올렸다. 한국에서 네 번째 천주교회가 강원도 횡성에 세워진 것이다.
지금의 성당은 르메르 신부의 후임으로 부임한 정규하 신부가 직접 설계하고 1906년에 착공했으며 1907년에 완공해 올해로 꼭 100년이 되었다. 하지만 100년이라는 숫자만 중요한 게 아니다. 중국인 기술자가 참여하고, 모든 신자들이 벽돌을 나르고 미장을 해가며 완성한 다국적 건축물이요, 민초들의 정성이 빚은 문화유산이라는 점이 대단하다. 게다가 강원도가 지방문화재로 지정한 강원도 최초로 지어진 고딕 양식 건물이다.
성당 앞 주차장에는 관광버스가 한 대 세워져 있었고, 주위는 사람이 살지 않는 집처럼 고요했다. 성당 안을 들여다볼 참으로 문을 열었다. 대담한 색채가 돋보이는 스테인드글라스가 강렬한 햇빛을 반사하고 있는데, 뜻밖에도 미사 중이었다. 신부님은 앞에서 강론하고 계셨고, 신자들은 신부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알을 품은 어미 닭에 대한 이야기였다. 신부님은 병아리 부화를 위해서 물조차 거부하면서 알을 품는 어미 닭을 하느님 사랑에 비유하시는 듯했다. 가만히 앉아서 듣다가 셔터를 한 번 누르고 일어나 나왔다. 내가 일어나 나오는데도 신자들은 조금의 동요도 없이 신부님 말씀에 몰입해 있었다. 건물과 스테인드글라스는 서양식인데 성당 안은 신을 벗고 들어가게 되어 있었다. 바닥에 앉아 미사를 드리는 광경이 색다르게 느껴졌다.
밖으로 나오자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낙엽. 마당에 수북이 쌓여 있었다. 이곳의 오랜 역사를 증명이라도 하듯 든든하게 버티고 섰는 커다란 느티나무 두 그루가 비늘을 털듯 나뭇잎을 훌훌 털어버린 것이다. 성당은 오랜 세월을 든든하게 버티고 서 있고 느티나무는 해마다 싹을 틔워 가을이면 이렇게 다 털어냈을 것이다. 아름답게 서로를 의지하면서.
덧붙이는 글 | * 횡성에는 11월 1일 다녀왔습니다.
* 찾아가는 길 : 횡성나들목→서울방향 6번국도→풍수원성당(서울6번국도→양평→풍수원성당)
2007.11.16 09:37 | ⓒ 2007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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