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내가 아름다운 이유, 찾았다!

아이들과 함께 한 가을수업 이야기

등록 2007.11.17 11:41수정 2007.11.17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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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가을수업 내가 아름다운 이유가 뭘까?

가을수업 내가 아름다운 이유가 뭘까? ⓒ 안준철


오늘(16일)은 가을수업을 하기 위해 평소보다 조금 일찍 집을 나섰다. 걸어서 10분 거리인 학교에 당도하기 까지 길가나 혹은 학교 오르막에 떨어진 낙엽을 주워 가방에 담았다. 교정에 외롭게 홀로 서 있는 은행나무가 떨어뜨린 노란 은행잎과 학교 뒷동산에 수북이 쌓인 형형색색의 낙엽들도 가방에 담았다.

그 사이 여러 아이들을 만났다. 마침 등굣길이라 삼삼오오 짝을 지어 걸어가다가 낙엽을 주워 가방에 담고 있는 내 모습을 보고 뭔가 알겠다는 듯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아이도 있었다. 가만 보니 작년에 나에게 수업을 받았던 아이들이다. 그 중 한 아이가 동산 위에 있는 나에게 큰소리로 아는 체를 했다.  

“선생님, 오늘 가을수업해요?”
“응.”
“우리도 가을수업하고 싶어요.”
“그럼 이따 1학년 교실로 오든가.”
“정말 그래도 돼요?”

정말 그러지도 않을 거면서 아이는 호들갑을 떤다. 지나고 나면 모든 것이 다 좋게 보이는가보다. 해마다 가을수업을 하는 것이 쉬운 일만은 아니다. 자연과 이미 멀어진 아이들을 자연으로 데려오는 것이 어찌 녹록한 일이겠는가. 요즘 아이들은 혼자 사색하는 일을 퍽이나 낯설어한다.

낙엽에게 편지를 쓰라든지, 나에게 보내는 편지를 써보라든지 하면 왜 그런 것을 해야 하느냐고 잔뜩 찡그린 얼굴로 무언의 항변을 하는 아이도 있고, 5분을 못 견디고 제 머리를 쥐어뜯는 아이들도 있다. 그런 아이들의 모습이 나로 하여금 가을수업을 하고 싶게 만드는 역설적인 이유가 되기도 한다.

a 가을수업 노란 은행잎에게 편지를 쓰다

가을수업 노란 은행잎에게 편지를 쓰다 ⓒ 안준철


책을 덮자
오늘은 영어시간이지만
모국어를 배우자
아, 모국의 하늘을 바라보자

가을
영어로는 ‘폴’
혹은, ‘어텀’
어느 것도 가을스럽지 않구나


오늘은 모국어를 배우자
가을―
입 안에 양칫물이 남아 있었니?
아니면, 꽈리를 깨물었니?

가을 
가실
갈… 갈바람


아이들아, 
오늘은 모국어를 배우자.

- 자작시 ‘가을수업’

가을수업이라고 해서 별 것은 아니다. 동산에서 주워온 낙엽을 한두 장씩 나누어 주고는 낙엽에게 편지를 써보라고 한다. 낙엽에게 편지를 쓰라니? 그것이 조금은 엉뚱한 일이기에 상상력을 발휘할 필요가 있다. 아이들에게 상상력을 키워주는 것은 곧 행복에 대한 감수성을 키워주는 일과 같다.

상상력이 고갈된 시대에 사는 아이들은 돈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돈만 있으면 행복할 수 있으리라는 단순무지한 확신에 가득 차 있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우리 어른들에게서 배운 남짓일 테지만 말이다.

말하자면 가을수업은 그런 잘못된 확신의 고리를 조금이나마 느슨하게 풀어놓자는 의도에서 해보는 수업이다. 이번 가을수업 시간에는 낙엽에게, 나 자신에게, 그리고 내가 아름다운 이유를 써보라고 했다.
  
a 가을수업 낙엽에게, 나에게 편지를 쓰다

가을수업 낙엽에게, 나에게 편지를 쓰다 ⓒ 안준철


낙엽에게
Hey, 낙엽!! 안녕!
난 학교에 등교하거나 하교할 때, 엄마 심부름을 가거나 친구들을 만날 때 널 보곤 해. 자동차가 지나가는 바람에 날리는 널 보면... 왜 그렇게 “쓸쓸”해 보이는지 모르겠어. 그렇게 넌 쓸쓸히 바람을 타고 세상구경을 하고 다니지. 길가에 옹기종기 모인 너희들 모습 보면 저번 TV 속 CF 속에 출연당한?? 그런 장면도 기억이 나. 어쩔 땐 너희들의 모습을 보면 나도 외로워질 때가 있어. 우리 한 번 외로움을 같이 나눠볼까?


To 지연
안녕, 내가 나한테 쓰는 편지라... 너무 어색하고 첫 인사를 어떻게 해야할 지 막막해. 앞이 깜깜. 요즘 많이 피곤하지? 그래서 많이 짜증도 내기 마련일거야. 그래서 선생님께도 버릇없이 굴고, 싸가지 없게 행동하고. 찍힐 건 다 찍히면서 그 당당함은 어디서 나오는 거야? 참 이기적이야. 그래서 학교 생활하기가 더욱 힘들 거고. 넌 성격도 특이하고 유난히 튀는 걸 좋아하는 애잖아. 내가 나한테 쓰는 편지를 쓰니까 좀 반성이 된다. 좋네. 지금보다 더 좋아질 거야. 항상 파이팅이야!


‘내가 아름다운 이유’는 올해 우리 학교 축제 주제이기도 하다. 축제가 하루만의 낭만적 일탈이나 마음껏 끼를 발산하는 마당으로서도 충분한 가치가 있지만, 거기에 더하여 좀 더 아이들 가슴에 오래 머물 수 있는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문득 내 마음에 떠오른 제목이었다.  유난히 외모에 관심이 많은 청소년기의 아이들이 축제를 통해서 숨겨진 자신의 내면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것을 가꾸어나가길 바라는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가을수업을 마치고 교무실로 향하면서 아이들이 과연 ‘내가 아름다운 이유’를 어떻게 썼을까 몹시 궁금하였다. 자리에 앉자마자 그 대목에 먼저 눈이 간 것도 그런 까닭이었다. 길게 진지하게 쓴 아이도 있고, 단 한 줄로 재치를 발휘한 아이도 있었다.

- 내가 아름다운 이유!! 특별히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맨날 이기적으로 나만 생각하고 뭐든 내 중심적으로 생각하는 내가 아름다운 이유를 찾으려고 하다니...그래도 내가 내 아름다운 이유를 생각해보자면, 웃어른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거? 버스 안에서의...나의 아름다움이라고 해야 하나? 항상 자리가 없어 내 옆에 서 있는 할머니를 보면 자리 양보하고, 같이 서로 위하는 나의 아름다움. 드디어 내가 나의 아름다운 이유, 찾았다!!


- 내가 아름다운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아마도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주신 부모님이 계시기에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나란 존재는 없을 테니까. 태어나서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가정에서 또는 학교에서 나와 같은 인격체를 지닌 사람들과 어울리며 하나하나 배워나가면서 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는 게 내가 아름다운 이유가 아닐까?

- 내가 아름다운 이유는 나에게 꿈이 있기 때문이다. 꿈이 있기에 내가 실현해 나갈 수 있고, 꿈이 없다면 아무것에도 희망을 갖지 못할 것이다. 나에게 꿈이 생긴 이후 많이 달라졌다. 결심도 해보고, 내 자신에게 칭찬도 해보고, 나를 돌이켜 보기도 하였다. 그래서 난 내가 아름다워 보인다. 꿈이 있어 아름답고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꿈을 이루는 그날엔 더욱 더 아름다워 있을 것이다. 행복이란 이런 거에서 오는 것 같다.

- 내가 아름다운 이유는 아름답다는 말은 외모를 보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보기에는 힘들 때도 힘들다 생각하지 않고 항상 웃으며 사는 게 아름다운 것인 거 같다. 그래서 내가 아름다운 이유는 그것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행복했었던 일들을 생각하는 거!

- 언젠가 한 번 생각해 봤지만 지금 생각해도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루고자 하는 일 이룰 수 있도록 항상 노력하고 내가 한 일에 후회하지 않는 그런 나의 모습이 아름다운 이유가 아닐까 생각한다. 비록 지금은 아름다운 이유가 작고 없지만 점점 커지고 많아질 수 있도록 해야겠다.

- 내가 아름다운 이유는 애들의 분위기 메이커가 되어주고 리더십이 강하고 자신감이 넘친다.  누구에게 지기 싫어하며 승부욕이 강하다. 내가 아름다운 이유 중 한 가지는 나의 부모님 때문이다. 지금은 부모님께서 날 위해 열심히 일하시고 계시지만 미래에는 내가 부모님을 위해 살아갈 것이다.

a 가을수업 나는 나이기에 아름답다

가을수업 나는 나이기에 아름답다 ⓒ 안준철


- 부모님 밑에서 늦동이로 태어난 내가 아름답다. 내가 열심히 해서 얻은 성적을 부모님께 안겨드리니 내가 아름답다. 언제나 지치고 힘들 때라도 어떡해서든 노력하려는 내가 아름답다.

- 일단은... 건강하다. 잘 먹는다. 고민이나 비밀 등을 말할 친구가 있다. 누군가 날 찾아준다. 내가 살아 있다는 게 아름다운 거...

- 사소한 이유지만 나는 나이기에 아름답다

- 지수보단 아름다우니 다행이다. 내가 아름다운 이유는 지수보다 낫다는 것이다. 지수야 사랑해!

- 내가 아름다운 이유? 잘생겼다!

- 누군가 나를 필요로 하기에 내가 아름다운 거 같고, 누군가 나를 사랑하기에 아름답고, 내가 이렇게 걸어 다니며 이야기 하고, 만지고 만지는 곳에 반응을 하는 게 있기에 아름답고, 무엇보다도 나를 아름답게 해주는 친구, 가족, 주위 모든 사람들이 있기에 빛이 나고 아름다운 것 같다.
 
아이들이 쓴 글을 읽다 보면 코끝이 찡해지면서 내가 너무 아이들을 성급하게 판단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문득 반성을 하게 된다. 아이들의 생각 하나 하나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렇게 다채로운 많은 생각과 발랄함과 왕성한 에너지를 가진 아이들을 어떤 획일적인 틀 속에 가두어 키우려 했으니 말이다.

결국 아이들과 함께 한 가을수업은 교사로서의 나의 연수가 된 셈이다. 좋은 일이 아닌가. 그러고 보니 가을수업을 생각하고 실천에 옮긴 나도 아름답다. 나도 내가 아름다운 이유를 하나 찾았다!!
#가을수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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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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