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에서 '여행자'로 산다는 것

[책으로 읽는 여행 13] 프리랜스 라이터 김정은의 <내가 사랑한 뉴욕 나를 사랑한 뉴욕>

등록 2007.11.20 14:05수정 2008.01.25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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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에 와서 가장 좋은 게 무어냐고 묻는다면 나는 아마 고통으로 얼굴을 찌푸릴 것이다. 왜냐하면 딱 하나만 고르라는 건 너무나 어려운 요구사항이기 때문이다. 서른 하나란 나이가 주는 부담에서 해방된 것, 마감이란 굴레에서 벗어난 것, 스물네 시간을 내 마음대로 계획할 수 있는 것, 혼자 노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 낯선 다른 문화를 매순간 체험하는 것, 공짜로 즐길 문화 체험이 많은 것, 맛있는 커피가 한국의 절반 값에 지천으로 널려 있다는 것 등등 나열하자면 끝도 없다.”
 책 <내가 사랑한 뉴욕 나를 사랑한 뉴욕>
책 <내가 사랑한 뉴욕 나를 사랑한 뉴욕>예담
잡지사 기자로 일하면서 정신없이 마감에 쫓기며 살다가 갑자기 뉴욕으로의 여행을 감행한 서른 한 살의 여자.

<내가 사랑한 뉴욕 나를 사랑한 뉴욕>은 이 여자가 일 년 남짓 뉴욕에 머무르며 느끼고 경험한 일들을 기록한 책이다. 완전한 뉴요커도 아니요, 그렇다고 간단한 뉴욕 여행도 아닌, 일 년의 장기간 동안 뉴욕에 거주하는 여행자의 삶.


보통 사람이라면 쉽게 체험할 수 없는 이런 독특한 경험은 한 권의 책이 되어 한국의 독자들의 마음에 와 닿는다. 일 년이나 뉴욕 여행을 했다고 하면 다들 ‘얼마나 돈이 많길래...’ 하는 의문을 가질 것이다. 하지만 실상 그녀의 여행 경비는 6년 간 모아온 쥐꼬리만한 쌈짓돈을 까먹는 것이며, 서울에 가면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불투명한 미래를 담보로 누리고 있는 것이다.

처음 출발은 잠시 휴식을 위해 떠나는 여행이었다. 하지만 그녀를 뉴욕에 그토록 오래 머물게 한 것들은 참 많다. 인터내셔널 센터 뉴욕은 세계 곳곳에서 온 이민자에게 영어와 이곳의 문화를 소개하며 정착을 돕는 비영리 단체다. 여기서 영어도 배우고 뉴욕의 여러 문화도 배우면서 저자는 뉴욕에 오래 눌러 앉게 된다.

단지 이 센터만 그녀의 발목을 붙든 건 아니다. 질 좋은 중고 상품을 내어 놓는 벼룩시장, 지나가는 이들의 눈길을 이끄는 온갖 길거리 공연들, 책 읽기 좋은 공원과 산책로 그리고 맛있는 커피를 공급하는 편안한 카페. 이방인으로서 뉴욕에서 살아가기는 그다지 불편함이 없다.

서울보다 훨씬 더 북적북적하고 다채로운 도시 뉴욕. 즐거움과 재미가 곳곳에 숨어 있어서 이들을 발견하는 자의 눈길만 기다리는 곳. 그렇다고 하여 이곳이 항상 긍정적인 요소만 갖고 있는 건 아니다. 분리수거가 제대로 실현되지 않아 쓰레기의 천국이며 빈부 격차가 심해 노숙자나 걸인이 넘쳐나는 곳 또한 뉴욕이기 때문이다.

“가난한 예술가와 술집 바텐더, 은행원과 불법체류자, NGO 직원과 거리 노숙자, 대학 교수와 유학생.... 뉴욕은 다양한 청춘들로 인해 늘 새로워지고, 그 수많은 청춘들은 뉴욕으로 인해 영감을 얻으며 세상에서 가장 멋진 조화를 만들어낸다. 도시는 그들의 꿈을 기반으로 움직인다. 이제 나는 안다. 진짜 뉴욕의 온기를 만드는 사람은 월스트리트의 백만장자도 아니고, 드라마 속 지미추 구두의 주인도 아닌 스스로의 삶을 개척해 가는 사람들이란 걸.”


뉴욕의 장기 여행자로 살아가면서 느끼는 점도 많다. 잠깐 스쳐 지나가는 관광객이 아니라 뉴요커와 마찬가지로 이곳의 삶을 직접 경험하고 부딪히면서 이곳의 실상을 더욱 잘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집을 얻기 위해 동분서주하면서 살인적인 뉴욕의 집값에 놀라고 거리를 걷는 많은 인종들을 보면서 그야말로 이곳은 인종의 용광로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녀가 만난 사람들도 그만큼 다양할 수밖에 없다. 연극 연출가, 봉사자, 유학생, 식당 종업원, 바텐더, NGO 종사자, 거대 기업의 회사원 등 각계각층의 사람을 만나면서 저자는 뉴욕이라는 끓어오르는 도시를 다시금 느낀다. 이곳은 오로지 태생으로만 이루어진 서울과 같은 단순 도시가 아니라 온갖 일을 하는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뒤섞여 사는 ‘세계적인’ 도시라는 사실.


중국계 말레이시안인 크리스탈이라는 여인은 뉴욕의 삶에 대해 이렇게 평가한다. 영주권을 받고 처음으로 고향에 갔는데 고향 친구들은 느긋했고 별 탈 없이 잘 지내더라고. 자신은 뉴욕에서 쉬지도 않고 열심히 일했는데 남은 것이 별로 없어서 허무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마지막 말은, 자신은 앞으로 계속 걸어갈 것이며 이미 삶의 터전은 뉴욕이라는 씩씩한 답변이다.

이렇듯 뉴욕은 여러 사람들의 힘으로 움직인다. 저자는 ‘뉴욕은 미국이 아니다’라고 단언한다. 뉴욕을 떠올리며 전형적인 백인을 떠올린다면 그건 완전히 잘못된 사고라는 것. 지하철 한 칸에서 적어도 스무 개 국적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 바로 뉴욕이기 때문이다.

뉴요커들은 뉴욕에 첫눈에 반했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고 한다. 더럽고 시끄럽고 냄새나는 뉴욕을 알지 못한 채 화려하게 치장한 뉴욕만을 향한 구애는 금방 실망하기 쉽다. 진짜 뉴욕은 이곳에 숨어 있는 다양한 사람들과 그들이 만들어내는 역동적인 문화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잠깐 머무르기보다 저자처럼 오랜 기간 이곳에 거주해 봐야 뉴욕의 참 멋을 맛볼 수 있는 것이다.

책을 읽다 보니 몇 년 전 뉴욕에 가서 실망과 흥분이 공존했던 느낌이 새록새록 살아난다. 영화나 텔레비전이 전달했던 뉴요커들의 세련되고 화려한 이미지들은 별로 없고 그저 바쁜 서울 시민과 비슷했던 모습, 엄청나게 많은 박물관과 미술관 그리고 공원의 혜택을 누리는 사람들, 명동 거리와 유사한 느낌의 타임 스퀘어.

굳이 장기 여행을 하지 않더라도 뉴욕은 한 번쯤 가볼 만한 도시라는 생각이 든다. 뉴욕만의 독특한 문화는 런던에서도, 서울에서도, 동경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나름의 색채를 뿜어내기 때문이다. 최근 우리 서점가에 쏟아지듯 나오는 뉴욕 관련 서적들은 이곳의 무지개 빛깔에 대한 환상을 품기에 충분하다. 그 환상이 왜곡된 시선이 아니라면 책을 통해 뉴욕 체험을 해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내가 사랑한 뉴욕, 나를 사랑한 뉴욕 - 어느 장기여행자의 마이너리티 뉴욕론

김정은 지음,
예담, 2007


#여행서적 #뉴욕 #김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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