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2007.11.22 18:47수정 2007.11.22 18:50
“떨어지는 이파리를 따라 한해도 멀어지는구나.”
초록의 열정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이파리에는 갈색만이 난무하고 있었다. 영원히 푸를 것이란 생각을 여지없이 뭉겨버리고 있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위로만 자라고 있던 왕성한 힘은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가 없다. 나무 밑동에서부터 시작하여 나무 꼭대기의 끝까지 모두 다 무거운 색으로 변하였다.
낙우송은 우람하다. 곧은 마음의 상징이다. 옆을 보지 않는다. 오직 한 방향으로만 정진하는 것이다. 올곧은 정신으로 흔들림 없이 앞만 보고 달리는 것이다. 그 힘이 어찌나 센지 바라보기만 하여도 불끈불끈 솟게 만들었다. 초록의 왕성한 기운이 우주에 넘쳐나고 있었다. 파란 하늘을 향해 곧게 자란 나무의 모습은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나무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사시사철 늘 푸를 것이라고 믿었다.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겨울이 와도 흔들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왜 그래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의당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석연치 않게 생각하거나 의혹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것은 불경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니 당연 상록수로 언제까지나 남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소나무처럼 의연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산을 보고 왜 산이냐고 물으면 대답하기가 곤란하다. 낙우송은 상록수일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의외였다. 가을이 깊어지고 있으니, 그 넘치던 힘이 사그라지고 있는 것이다. 초록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갈색의 퇴색한 빛깔만 남아 있으니, 허전하다. 이럴 수는 없다고 생각해보지만, 소용없는 일이다. 갈색 이파리가 바람에 날리고 있는 시점에서 달리 할 말이 없다.
전라북도 순창읍에서 강천사로 가는 길이다. 좁은 2차선 도로 양 옆에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강천사를 방문할 때마다 장관이라고 감탄하였다. 강천사를 목적지로 하고 찾았지만 정작 강천사보다는 낙우송의 매력에 풀 빠져들곤 하였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뻗어 있는 나무의 위용에 감동을 받았다. 흔들림 없이 저렇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앞만 보고 달려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곤 했었다.
강천사의 가을 풍광을 보기 위하여 찾았다. 순창읍에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정읍 쪽으로 해서 찾았다. 그런데 강천사가 좋다는 것을 나만 아는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다 알고 있었다. 나보다 먼저 도착한 사람들로 꽉 차버렸다. 어찌나 자동차와 사람들이 밀리는지, 아예 들어갈 수조차 없었다. 입구에서 안내하는 사람들이 들어가는 것 자체를 막아버리는 것이다.
들어가지 못하게 막고 있는 사람들이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어쩌란 말인가?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냥 돌아서기에는 너무 아쉬워하고 있는데, 생각나는 것이 바로 낙우송이었다. 실망한 마음을 위로하기 위하여 힘이 넘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래서 달려왔는데, 낙우송의 또 다른 모습과 조우하게 되니, 좋았다.
여행의 맛이란 기대가 무너질 때 배가 된다. 낯선 고장의 모습에서 나를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예상한 대로 실제의 모습을 보게 되면 실망하지 않을 수 없다. 의외의 상황과 만나게 되면 자극을 받게 되고 다양한 생각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여행을 통해 그때까지 하지 못한 생각을 하게 되는 기쁨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경이로운 체험이 되는 것이다. 낙우송의 모습이 그랬다.
줄지어 있는 나무들의 모습이 이채롭다. 언뜻 보면 모두가 똑같은 것처럼 보인다. 곧게 자란 나무들이 멀리서 바라보면 하나의 나무처럼 보인다. 그 모습이 일률적이어서 단조롭게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아니었다. 수많은 변화를 찾아낼 수가 있다. 정적인 측면에서 바라보고 있노라면 나무는 모두가 같은 얼굴이다. 무엇 하나 다른 모습을 찾을 수 없는 것처럼 생각되어진다. 그러나 아니다. 가로수는 동적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우수수 떨어지고 있었다. 낙우송 이파리들이 바람을 타며 공중부양하고 있었다. 그냥 떨어지는 것이 아쉬워 하늘 위로 마지막 비상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그 속에 푹 파묻혀버리고 싶었다. 쉴 새 없이 공간을 가르고 있는 이파리들의 군무는 황홀하였다. 조명에 따라 신바람을 내면서 춤을 추는 예인을 닮았다.
예인. 예인이란 감동을 연출해내는 사람을 말한다. 감동을 창출하는 도구는 무엇이든 상관이 없다. 그 것이 그림이든, 성악이든, 아니면 몸짓이던 문제될 것이 없다. 표현 방법이 달라도 궁극적인 목적은 같기 때문이다. 보여 지는 활동이 바라보는 사람의 내면과 일치를 이룰 때 감동은 만들어진다. 생활에서 감동을 만들어지면 그 어떤 감동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진하다. 감동은 삶의 활력소가 되는 것이다.
낙우송이 연출해내고 있는 감동이 온 몸에 배어든다. 강천사의 가을을 보지 못한 아쉬움이 시나브로 사라지고 있었다. 어찌나 아름답고 고운지 감탄사를 연발할 수밖에 없다.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이파리들의 몸짓은 낙하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내면을 고스란히 표현하고 있었다. 세상에 대하여 강력하게 말하고 있었다. 유연한 동작으로 부드러움을 표현하기도 하고 날카로운 동작으로 세상을 지적하기도 한다.
낙우송 이파리들은 모두가 같은 것 같지만 모두 다 다르다. 모습이 일정하고 차이점을 찾을 수 없었다면 그렇게 감동을 연출해내지 못하였을 것이 분명하다. 세상의 모습이 모두가 다 한결 같다면 살 재미가 없다.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람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 모두가 다르기 때문이다. 60억 인구 중에서 나와 똑같은 사람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우뚝할 수 있고 돋보이는 것이다.
이파리의 색깔부터 그렇다. 언뜻 보기에는 모두 다 갈색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자세하게 들여다보니, 같은 색깔은 하나도 없었다. 모두가 독특한 색깔을 가지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모두가 저마다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상대방을 무시하지 않고 같아지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더 시선을 끌게 된다. 만약 모두 다 같아지려고 하였다면 아름다움은 반감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이파리들은 각각 고유의 성품을 가지고 있었다. 존중함으로서 존중받고 있었다. 인정하고 배려함으로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연출해내고 있었다. 이파리들의 몸짓을 통해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생각하게 된다. 바람을 이용할 줄 아는 지혜며 자신의 독특함을 살리는 슬기가 마음에 다가온다. 관심으로 다른 것은 인정하는 삶의 태도가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여 감동을 연출해내고 있었다.
감동의 전율이 온 몸에 그대로 전해진다. 짜릿해지는 감전의 느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낙우송이 만들어내고 있는 감동이 어찌나 큰지, 숨이 멈춰지는 것 같았다. 군더더기는 없었다. 여기에 더 할 것도 없고 뺄 것도 없었다. 있는 그대로 족한 것이었다. 완벽한 세상이란 바로 저런 모습이라는 생각을 한다. 완벽한 세상의 경이로움을 체험하게 됨으로써 여행의 맛을 충분히 즐길 수 있었다. 강천사는 들어가지 못하였지만 그 보다 훨씬 더 좋은 여행을 할 수 있었다. 아 ! 아름다운 낙우송이여. 영원 하라. 살아 있음에 감사하게 된다.<春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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