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해> 1957년 전남 함평 출생. 본명 박기평. 1976년 선린상고(야간부) 졸업. 섬유, 금속 농장 노동자 생활. 1984년 첫 시집 <노동의 새벽> 출간. 1985년 서울노동운동조합에서 활동. 1989년 사노맹 결성 주도. 1991년부터 1998년까지 사노맹 결성 사건으로 복역.
박노해에 대한 일상적인 기억이다. 노동자 시인, 얼굴 없는 시인으로 각인되었지만 그는 사노맹 사건으로 복역하면서 <사람만이 희망이다> 시집을 내놓는다. 사람만이 희망이다를 읽어가다 보면 그 동안 외부를 향한 외침과 사상적 투쟁을 넘어 자신 안에 자리 잡은 내부를 향한 투쟁과 싸움을 내밀하게 그리고 있음을 발견한다.
특히 그는 사람을 희망한다. 사람만이 희망이라 말한다. 외부의 적이 아무리 강할지라도 사람임을 포기하지 말고, 사람 그 자체에서 희망을 찾기를 원한다. 아직 절망하지만 이미 답을 얻었다.
'아직과 이미 사이'
'아직'에 절망 할 때
'이미'를 보아
문제 속에 들어 있는 답안처럼
겨울 속에 들어찬 햇봄처럼
현실 속에 이미 와 있는 미래를
아직 오직 않은 좋은 세상에 절망할 때에
우리 속에 이미 와 있는 좋은 삶들을 보아
아직 피지 않은 꽃을 보기 위해선
먼저 허리 굽혀 흙과 뿌리를 보살피듯
우리 곁의 이미를 품고 길러야 해
저 아득하고 머언 아직과 이미 사이를
하루하루 성실하게 몸으로 생활로
내가 먼저 좋은 세상을 살아내는
정말 닮고 싶은 좋은 사람
푸른 희망의 사람이어야 해 (21쪽)
아직과 이미를 언뜻 보면 박노해가 과거 외쳤던 노동자의 고통과 자본의 압제와는 전혀 상관없다는 느낌이다. 특히 '아직'과 '이미'는 종교성이 내포되어 있다. 이미 이루어졌지만 아직은 아니라는 기독교 사상이 행간에 흐르고 있다. 물론 종교성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직 그는 좋은 세상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고백이다.
아직과 이미 사이는 먼 공간이지만 하루 하루를 성실하게 몸으로 생활하여 내가 먼저 좋은 세상을 살아내는 푸른 희망의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 자본과 투쟁했던 과거 박노해에 비하면 비판적 읽기가 가능하지만 새로운 희망을 찾아나서는 박노해를 만날 수 있다. 자본과 투쟁에서 이기는 길도 포기하지 않고, 절망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 시대 자본이 노동을 압제하는 방법은 어쩌면 노동이 스스로 희망을 포기시켜버리는 것인 줄 모른다.
다시
희망찬 사람은
그 자신이 희망이다
길 찾는 사람은
그 자신이 새길이다
참 좋은 사람은
그 자신이 이미 좋은 세상이다
사람 속에 들어 있다
사람에서 시작한다
다시
사람만이 희망이다 (34쪽)
우리 시대가 희망이 아닌 이유는 무엇인가? 사람이 희망이 아니라, 돈과 권력이 희망이기 때문이다. 이미 사람은 돈의 노예다. 돈을 위하여 공부하고, 사람 만나고, 일한다. 사람을 위한 공부와 만남은 없다. 일하지 않는다. 참 좋은 사람은 그 자신이 이미 좋은 세상이지만 사람들은 그 좋은 세상을 포기하고 말았다. 이 시대가 비극인 이유다, 절망인 이유다. 절망하는 이유는 자신에게서 길을 찾지 않고 돈에서 찾기 때문이다.
꽃피는 말
우리 시대
가장 암울한 말이 있다면
"남 하는 대로"
"나 하나쯤이야"
"세상이 그런데"
우리 시대에
남은 희망의 말이 있다면
"나 하나만이라도"
"내가 있음으로"
"내가 먼저" (57쪽)
가장 비극적인 삶은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 시대 화두는 '개성' 곧 '주체적'인 삶이지만 사실은 '남 하는 대로'이다. 남이 하니까 학원에 간다. 남이 하니까 공부한다. 남이 하니까 이것 저것 사업을 한다. 그리고 나 하나쯤이 선거하지 않고, 뇌물받고, 뇌물준다. 남이 하니까 내도 뇌물주고 받는다. 비극인 이유다. 암울하다.
길 잃은 날의 지혜
큰 것을 잃어버렸을 때는
작은 진실부토 살려가십시오
큰 강물이 말라갈 때는
작은 물길부터 살펴주십시오.
꽃과 열매를 보려거든 먼저
흙과 뿌리를 보살펴주십시오
오늘 비록 앞이 안 보인다고
그저 손 놓고 흘러가지 마십시오
현실을 긍정하고 세상을 배우면서도
세상을 닮지 마십시오 세상을 따르지 마십시오
작은 일 작은 옳음 작은 차이
작은 진보를 소중히 여기십시오
작은 것 속에 이미 큰 기로 나가는 빛이 있고
큰 것은 작은 것들을 비추는 방편일 뿐입니다
현실 속에 생활 속에 이미 와 있는
좋은 세상을 앞서 사는 희망이 되십시오. (61-62쪽)
작은 진보를 아름답게 생각하자. 오늘 일이 답답할 수 있다. 희망이 보이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희망을 잃지 말자.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하여 일하고, 땀 흘리면 된다. 작은 옳음이 나를 드리면 된다. 나 혼자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다고 자학하지 말자. 강자가 하는 말은 너 혼자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너 혼자 변한다고 세상이 변하지 않는다고 포기하게 만든다. 내 혼자가 모여 둘이 되고, 셋이 된다. 열이 되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
세상을 따르지 말고 묵묵히 가면 된다. 사람을 희망으로 삼고, 그 희망에 내가 자리하면 된다. 좋은 세상은 이미 우리 현실에 와 있을 수 있지만 아직 우리가 발견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아직 오지 않는 좋은 세상이라면 사람을 희망으로 삼고 나아가면 된다. 이미 온 좋은 세상이라면 모든 사람이 그 좋은 세상을 경험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아직 자본이 좋은 세상을 방해하고 있다. 사람만이 희망임을 알고 오늘, 내일 묵묵히 저 희망을 보고 나가면 된다. 그렇다 사람만이 희망이다.
덧붙이는 글 | <사람만이 희망이다>박노해 지음 ㅣ 해냄
2007.11.25 19:50 | ⓒ 2007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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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만이 희망이다 - 박노해 옥중 사색, 개정판
박노해 지음,
느린걸음,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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