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살짝 흩뿌린 겨울 아침 골목

[배다리 골목길 이야기 8] 걸으면서 보고 느끼는 삶

등록 2007.11.27 17:42수정 2007.11.27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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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나기 꽃그릇 겨우나기를 앞두고 말끔히 비워 놓은 꽃그릇들. 그동안 애 많이 썼습니다.
겨우나기 꽃그릇겨우나기를 앞두고 말끔히 비워 놓은 꽃그릇들. 그동안 애 많이 썼습니다.최종규

일요일 저녁에 우리 집에 놀러 온 손님을 배웅하러 나선 월요일(26일) 아침입니다. 이슬비랄지, 는개랄지, 겨울이면서도 찬비 아닌 따순비가 내린 길을 걷습니다. 저는 걷고, 손님은 자전거를 끌고.


그냥 보내기 섭섭하고, 빈속에 자전거 타고 짧지 않은 길을 돌아가자면 힘들이라 보고, 창영초등학교 앞 분식집에 들릅니다. 무얼 먹으면 좋을까 생각하다가 냄비라면을 먹어 보기로 합니다. 그리고 튀김 한 접시.

이렇게 시켜 놓고 기다리는데, 집부터 분식집까지 걸어온 길 느낌이 자꾸만 머리에서 맴돕니다. 집으로 얼른 뛰어가서 사진기를 들고 나올지, 그냥 라면 한 그릇 먹고 배웅을 마치고 돌아갈는지. 앉은 자리에서 끙끙거리다가, 안 되겠구나 싶어, 잠깐 다녀오마 이야기한 뒤 집으로 부리나케 달립니다. 탁 탁 탁 탁. 비가 살짝 적신 아스팔트 길을 달립니다. 계단을 쿵쾅쿵쾅 뛰어오릅니다. 가방에서 사진기를 꺼내고 오던 길을 되짚습니다.

막걸릿집 앞에 선 자전거 한 대 찍습니다. 탁 탁 탁 탁. 두 갈래 길 모퉁이 집에서 자라는 넝쿨 풀을 하나 찍습니다. 분식집 앞에 세워 둔 자전거를 찍습니다. 숨을 고르며 안으로 들어갑니다.

라면은 진작 나와 있고, 손님은 저를 기다리며 안 먹고 있습니다. 미안하네요. 매운 것을 못 먹는 저는, 면발에 올려진 고춧가루를 살며시 덜어냅니다. 후루룩 짭짭. 고춧가루 덜어냈어도 많이 매워서 국물은 모두 들이마시지 못합니다.

해가리개 눈부신 햇볕을 막고, 비도 막아 주는 가리개.
해가리개눈부신 햇볕을 막고, 비도 막아 주는 가리개.최종규
밥값을 치르고 나옵니다. 슬금슬금 골목길을 걷습니다. 빈 빨랫줄을 담고, 비막이 달린 창문을 담습니다. 도원역 앞. 손님이 뒷간에 가야 한다고 하여 전철역 뒷간으로 들어가고 저는 자전거를 지킵니다. 제자리걷기를 하며 몸에 열을 내다가, 건널목 너머로 보이는 손수레 아주머니가 보여서 먼발치이지만, 언덕길 넘어가는 모습을 담습니다. '한국철도'가 아닌 'Korail'만 적혀 있는 간판도 하나 찍습니다.


손님이 볼일을 마치고 나옵니다. 잘 들어가시라고 손을 흔듭니다. 저는 뒤돌아선 뒤 숭의동 달동네 골목길로 들어섭니다. 볼일 마치고 온 사람을 떠나보내니 저도 아랫배에서 반응이 오네요. 이런.

조금만 참자고 생각하며 골목길 계단을 밟고 안쪽 길로 접어듭니다. 골목 하나만 들어갔는 데에도 큰 길가 차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참 조용합니다.


이달 첫머리에 감 따는 할배를 만난 길 앞에 섭니다. 감 알이 서넛 남았습니다. 그때 모두 따지는 못하셨을 테고 이튿날이나 그 다음 날 마저 따셨겠지요. 까치밥 남기기를 잊지 않으셨습니다.

까치밥 남은 감나무 까치밥으로 남겨 놓은 감은, 까치도 먹고 박새도 먹고 참새도 먹겠지요.
까치밥 남은 감나무까치밥으로 남겨 놓은 감은, 까치도 먹고 박새도 먹고 참새도 먹겠지요.최종규
찻길로 나옵니다. 길을 건너고 좁은 틈 계단을 밟고 아래로 내려갑니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어린아이 둘을 스칩니다. 아이 옆에는 마중나온 어머니가 가방을 들고 함께 걷습니다. 스쳐지나 보낸 뒤, 세 사람이 계단을 밟고 올라갈 즈음 휙 돌아서며 사진 한 방.

담벼락에 낙서가 어지럽게까지는 아니지만 조금 짓궂게 되어 있는 골목길 네거리에 잠깐 섭니다. 이 낙서들은 누가 했으려나. 이 낙서 임자가 어른이 되어 이 골목길에 다시 찾아올 때까지 낙서들은 지워지지 않은 채로 있으려나. 아니, 그때까지 이 골목길이 재개발 바람에 살아남을 수 있을는지.

버려진 '생활정보지 플라스틱통'을 잘라서 만든 편지함 붙인 옛집 대문 앞을 지나갑니다. 스티로폼 농사며 텃밭 농사며, 도심지 골목길에서 봄 여름 가을 동안 신나게 푸성귀를 길러 준 꽃 그릇들이 흙만 남기고 텅 빈 모습들, 비닐을 씌워 놓고 있는 모습들을 봅니다.

수학능력시험을 치렀기 때문인지, 아침 열두 시 조금 지난 때인데 벌써 집으로 돌아가는 여고생들 무리 사이를 지나갑니다. 잠깐 뒤돌아서며, 아이들이 집으로 가는 언덕길을 바라다봅니다. 아이들 옆으로 쭉 이어진 골목집 꽃 그릇을 눈여겨보는 눈길이 있을까 싶어서.

집으로 돌아가는 학교공부 일찍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 수능이 끝난 이맘때, 학교와 집과 동네에서는, 이 아이들한테 무엇을 베풀어 주고 있을까요.
집으로 돌아가는학교공부 일찍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 수능이 끝난 이맘때, 학교와 집과 동네에서는, 이 아이들한테 무엇을 베풀어 주고 있을까요.최종규

인천시 정책으로 '너비 50미터짜리 산업도로'를 밀어붙이려고 하는 자리 옆에 섭니다. 동네 사람들 힘으로 가까스로 ‘공사 멈추기’는 이루어냈지만, 인천시에서는 아직까지도 ‘사업 무효 선언’이나 ‘동네 골목길 공원으로 바꾸겠다’ 따위로 달라지는 낌새가 없습니다.

지난주쯤 어느 지역신문에, ‘이제 더는 민원에 끌려다니지 않겠다’는 인천시 공무원 말이 실려 있었습니다. 이 지역신문은 ‘민원에 발목 잡혀 차질 빚는 공사’ 이야기를 1쪽에 대문짝만 하게 싣기도 했습니다. 기자들한테는, 시 공무원과 개발업체 직원을 만나러 다닐 시간은 있어도, 막개발 때문에 숨통이 끊어질락말락 하는 동네 사람들을 만나러 다닐 시간은 없는지.

‘조망권’을 짓밟듯이 개발업체 사람들이 함부로 세워 놓은 높은 울타리 앞에 잠깐 서서 기도를 합니다.

막걸릿집 앞에 서 있는 자전거 옆을 지나갑니다. 막걸릿집 옆 문방구 앞에도 짐 자전거 한 대가 비 가리개를 잔뜩 뒤집어쓴 채 해 가리개 안쪽에서 비를 긋고 있습니다. 시내버스 10번이 지나갑니다. 사진기는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겨울 아침 비 겨울 아침 비가 내리던 날. 자전거가 젖지 않도록 비닐이며 천막쪼가리며 덮어씌워 놓습니다.
겨울 아침 비겨울 아침 비가 내리던 날. 자전거가 젖지 않도록 비닐이며 천막쪼가리며 덮어씌워 놓습니다.최종규

학교 앞 분식집 학교 앞 분식집에 들러 냄비라면 한 그릇에 튀김 한 접시를.
학교 앞 분식집학교 앞 분식집에 들러 냄비라면 한 그릇에 튀김 한 접시를.최종규

학교 앞이니 school zone 초등학교 앞이라 자동차보고 천천히 달리라며 "school zone"도 만들어 놓네요.
학교 앞이니 school zone초등학교 앞이라 자동차보고 천천히 달리라며 "school zone"도 만들어 놓네요.최종규

손수레 일 종이상자며 폐품이며 모으며 벌이를 삼는 아주머니 손수레.
손수레 일종이상자며 폐품이며 모으며 벌이를 삼는 아주머니 손수레.최종규

아침 빨래 비가 살짝 흩뿌린 뒤 더는 내리지 않고 뿌옇기만 한 날씨. 이 빈틈을 놓치지 않고 바깥에 빨래를 내놓습니다.
아침 빨래비가 살짝 흩뿌린 뒤 더는 내리지 않고 뿌옇기만 한 날씨. 이 빈틈을 놓치지 않고 바깥에 빨래를 내놓습니다.최종규

헌 자전거 임자가 있는지 없는지 늘 그 자리에 매인 채 녹슬어 가는 골목길 자전거.
헌 자전거임자가 있는지 없는지 늘 그 자리에 매인 채 녹슬어 가는 골목길 자전거.최종규

집으로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초등학교 어린이. 아이를 마중 나온 어머니.
집으로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초등학교 어린이. 아이를 마중 나온 어머니.최종규

우체통 골목집 편지함은 집집마다 다르게 생겼습니다.
우체통골목집 편지함은 집집마다 다르게 생겼습니다.최종규

벽 낙서 스프레이로 이렇게 낙서한 사람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벽 낙서스프레이로 이렇게 낙서한 사람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최종규

지는 꽃과 날이 추워지면서 지는 꽃들. 이리하여 골목집 텃밭도 누런 빛으로 바뀝니다.
지는 꽃과날이 추워지면서 지는 꽃들. 이리하여 골목집 텃밭도 누런 빛으로 바뀝니다.최종규

흙을 닮아가는 겨울이 코앞으로 닥치면서, 골목집 꽃그릇 꽃이며, 텃밭 풀이며 모두 흙빛을 닮아갑니다.
흙을 닮아가는겨울이 코앞으로 닥치면서, 골목집 꽃그릇 꽃이며, 텃밭 풀이며 모두 흙빛을 닮아갑니다.최종규

집 앞에 꽃그릇에서 자란 푸성귀는 몇 가지였을까요. 이제는 마지막 푸성귀가 될는지.
집 앞에꽃그릇에서 자란 푸성귀는 몇 가지였을까요. 이제는 마지막 푸성귀가 될는지.최종규

말리기 손바닥 공원 울타리는 무청이며 시래기며 나물을 널어 놓고 말리기에 좋습니다.
말리기손바닥 공원 울타리는 무청이며 시래기며 나물을 널어 놓고 말리기에 좋습니다.최종규

스트로폼 농사 한 해 동아 스티로폼 농사를 잘 지었던 골목집 하나. 오늘은 담벽에 빨래를 내걸지 않았네요.
스트로폼 농사한 해 동아 스티로폼 농사를 잘 지었던 골목집 하나. 오늘은 담벽에 빨래를 내걸지 않았네요.최종규

문패 골목집이 하나둘 자취를 감추면서 문패도 하나둘 자취를 감춥니다.
문패골목집이 하나둘 자취를 감추면서 문패도 하나둘 자취를 감춥니다.최종규

발가스름 단풍나무 다른 꽃그릇은 텅 비었는데, 발가스름 단풍나무는 꽃잎이 아직도 많이 달렸습니다.
발가스름 단풍나무다른 꽃그릇은 텅 비었는데, 발가스름 단풍나무는 꽃잎이 아직도 많이 달렸습니다.최종규

단풍나무 2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조그마한 단풍나무입니다. 설악산 단풍도 좋고, 월악산 단풍도 좋고, 골목길 단풍도 좋습니다.
단풍나무 2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조그마한 단풍나무입니다. 설악산 단풍도 좋고, 월악산 단풍도 좋고, 골목길 단풍도 좋습니다.최종규

겨우나기 준비 겨우나기 준비를 하는 꽃그릇들. 이듬해 2008년에도 싱싱한 골목집 푸성귀가 무럭무럭 자라날 겝니다.
겨우나기 준비겨우나기 준비를 하는 꽃그릇들. 이듬해 2008년에도 싱싱한 골목집 푸성귀가 무럭무럭 자라날 겝니다.최종규

차곡차곡 묶인 헌 종이상자를 모으는 할아버지네 집 앞. 종이상자를 반듯하게 펴고 묶어 집 앞에 쟁여 놓았습니다.
차곡차곡 묶인헌 종이상자를 모으는 할아버지네 집 앞. 종이상자를 반듯하게 펴고 묶어 집 앞에 쟁여 놓았습니다.최종규

덧붙이는 글 | 지금 인천시는, 중ㆍ동구 둘레를 놓고, 또 남구를 비롯한 오래된 동네를 놓고 ‘도심정화사업’을 벌여 골목집과 재래시장을 몰아내고, 동구 배다리 둘레는 ‘너비 50미터짜리 산업도로(길이 2.41km)’를 골목집이 몰려 있는 동네 한복판에 놓으려는 정책을 밀어붙이고 있습니다. 산업도로를 뚫은 뒤에는 골목집을 모두 쓸어내고 아파트와 쇼핑센터를 올려세운다고 합니다.

대단한 이름이나 많은 돈벌이나 큰 힘 하나 없이 조용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동네가 이곳 인천 중ㆍ동구, 또 남구입니다. 경제개발과 경제성장하고는 조금도 안 어울릴 수 있겠지만, 온 삶을 바쳐 땀흘려 일하고 조그마한 몸뚱아리 드러누울 작은 집 한 칸이나 방 한 칸 마련하여 살아가는 사람들한테도 ‘내 집에서, 내 땅에서, 조용하면서도 자유롭고 평화롭게 살다가 숨을 거두어 흙으로 돌아갈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라님 정책을 한 번도 거스르지 않고 허리 구부정할 때까지 살아온 사람들 숨결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배다리 골목길 이야기]를 띄웁니다. 이 땅에는 사람이 살고 있음을 이야기하고 싶고, 골목길에는 낮은자리 사람들, 그러니까 서민들 숨결이 녹아난 보금자리가 있음을 들려주고 싶고, 돈으로는 헤일 수 없고 물질로는 채울 수 없는 눈물과 웃음이 서린 우리 손때 묻은 길과 집이 있음을 말하고 싶습니다.


덧붙이는 글 지금 인천시는, 중ㆍ동구 둘레를 놓고, 또 남구를 비롯한 오래된 동네를 놓고 ‘도심정화사업’을 벌여 골목집과 재래시장을 몰아내고, 동구 배다리 둘레는 ‘너비 50미터짜리 산업도로(길이 2.41km)’를 골목집이 몰려 있는 동네 한복판에 놓으려는 정책을 밀어붙이고 있습니다. 산업도로를 뚫은 뒤에는 골목집을 모두 쓸어내고 아파트와 쇼핑센터를 올려세운다고 합니다.

대단한 이름이나 많은 돈벌이나 큰 힘 하나 없이 조용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동네가 이곳 인천 중ㆍ동구, 또 남구입니다. 경제개발과 경제성장하고는 조금도 안 어울릴 수 있겠지만, 온 삶을 바쳐 땀흘려 일하고 조그마한 몸뚱아리 드러누울 작은 집 한 칸이나 방 한 칸 마련하여 살아가는 사람들한테도 ‘내 집에서, 내 땅에서, 조용하면서도 자유롭고 평화롭게 살다가 숨을 거두어 흙으로 돌아갈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라님 정책을 한 번도 거스르지 않고 허리 구부정할 때까지 살아온 사람들 숨결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배다리 골목길 이야기]를 띄웁니다. 이 땅에는 사람이 살고 있음을 이야기하고 싶고, 골목길에는 낮은자리 사람들, 그러니까 서민들 숨결이 녹아난 보금자리가 있음을 들려주고 싶고, 돈으로는 헤일 수 없고 물질로는 채울 수 없는 눈물과 웃음이 서린 우리 손때 묻은 길과 집이 있음을 말하고 싶습니다.
#골목길 #골목집 #인천 #배다리 #겨울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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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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