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관을 멘 밴톤의 아들과 뒤를 따르는 러드 총리.
윤여문
시드니 서부에 있는 파라마타시는 버니 밴톤의 고향이다. 앨버트 밴톤 목사 부부의 4남 1녀 중에서 차남으로 태어난 버니 밴톤은 1968년부터 1974년까지 6년 동안 세계굴지의 건축자재 제조회사인 '제임스 하디 그룹'의 석면제조공장에서 근무했다.
그가 생전에 남긴 증언에 의하면, 당시 제임스 하디 공장의 여건은 최악이었다고 한다. 석면가루가 가득한 생산라인에서 마스크도 쓰지 않은 채 하루 8시간씩 2교대로 근무했던 당시의 노동자 137명 중 10여 명만 지금까지 살아남았을 정도다.
밴톤 가문의 막내 브루스 밴톤도 생존자 중 한 명이다. 그는 형들과 거의 같은 기간에 똑같은 생산라인에서 일했지만 기적같이 질병에 걸리지 않았다. 아버지의 대를 잇기 위해 나중에 목사가 된 그는 5일 거행된 형의 장례식을 직접 인도했다.
장례식이 끝난 후 휠체어에 앉아서 눈물을 훔쳐내던 셋째 브라이언 밴톤은 "왜 마스크조차 쓰지 않고 일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석면가루가 그렇게 치명적인 줄 몰랐고, 회사에서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고 답변했다.
거대기업 제임스 하디의 도덕불감증제임스 하디 그룹은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세계랭킹 상위에 들어갈 정도로 규모가 큰 석면제조업체였다. 호주 국내공급은 물론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국가에 엄청난 양을 수출해 세계 굴지의 건축자재제조회사로 성장했다. 그러나 석면이 인체에 해롭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1987년에 생산을 중단했다.
하지만 생산라인에서 일했던 노동자들이 시름시름 앓으면서 세상을 떠나기 시작했다. 급기야 사태의 심각성을 알게 된 호주노동조합(ACTU)이 피해보상을 위한 투쟁에 나섰다. 1990년대 말쯤이었다.
그러나 사태의 추이를 예의주시하면서 사전준비를 꼼꼼하게 해온 제임스 하디 그룹과 마주앉은 노동조합의 협상 노력은 아무런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엄청난 재산을 보유하고 있는 회사는 약속을 파기하기 일쑤였고 거짓으로 일관했다.
그 당시 호주노조 사무총장이었던 그레그 콤베트(2007년에 하원의원으로 당선)는 "마치 절벽 앞에 서있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한 줄기 빛이 나타났다, 버니 밴톤이 나타난 것이다"라고 회상했다.
콤베트는 추도사를 통해서 "버니는 사회정의를 구현하겠다는 열정에 넘쳤고 적재적소에서 꼭 필요한 역할을 맡아주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었다"면서 "그가 없었다면 아직도 수많은 석면 피해자들이 보상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한평생 노동자로 살았던 버니 밴톤이 사회정의가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려주었다"고 회고하면서 목이 메었다.
석면 피해보상금 3조 2천억원협상의 고비는 2003과 2004년이었다. 협상이 불리하게 진행되고 여론마저 나빠지자 제임스 하디 그룹은 본사를 유럽으로 옮겨버렸다. 노동자들은 거리로 뛰쳐나갔고 그 선봉에는 항상 버니 밴톤이 있었다.
버니 밴톤은 2000년에 80만 호주달러의 피해보상을 받은 상태였다. 더구나 의사들로부터 건강상태가 나쁘니 활동을 중단하라는 강력한 권고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겐 자신의 건강보다 동료들의 피해보상이 더 중요한 사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