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화민주노동당 고양시당 부위원장. 당시 동명여고 1학년으로 흥사단, 푸른나무, 바른고련 등에서 활동했다.
오마이뉴스 최윤석
정경화 "저희 때는 선배님들과 조금 달랐어요. 저는 합법 비합법 넘나들며 일했거든요. 도서관 반장, 교지 편집반, 바른고련, 푸른나무 활동도 했고. 고2 때 공장 활동, 농활도 다니고 일반 대학생들이 하던 일을 했었어요. 비합법적 활동하다가 퇴학직전까지 갔지만 일단 서고련 선배들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하지만 학교에서는 학생들과 같이 하는 흐름이 강했어요. 함께 활동했던 친구들이 동아리를 다 장악하고, 학생회 직선제 따내고, 학내 행사 기획하고 종이비행기 시위나 정치적인 사안을 학교로 끌어들이기도 했었어요. 예를 들어 이한열 사진을 밤중에 숨어있다가 학교에 몰래 붙이고 했었지요."
- 서울 쪽 분위기가 그랬다면 부산 쪽 이야기도 궁금해지는데, 한번 들어보지요. 당시 부산 쪽의 고운은 어땠나요? 황순주(37) "잘못 흐르면 무용담이 될 수 있고 치기어린 고등학생들의 사려 깊지 못한 행동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당시 고운을 한다고 하면 다들 웃긴다고 했지만, 자기 삶에 고민이 녹아있지 않으면 어려운 부분이라는 전제를 갖고 봐야할 부분 같아요. 부산은 자발적으로 스스로 조직화된 사람들이 많았어요. 사학비리에 대한 부분을 통해 모이면서 같이하자는 공감대를 형성했지요. 기본적으로 학교로 돌아가자, 만남은 밖에서 하지만 활동은 학교에서 하자, 합법이 가능하면 합법으로 가고 어려우면 비합법으로 가자 이런 식이였어요. 서고련 이야기 학습하면서 교훈을 얻었고, 준비 없이 드러내지 말자 뭐 그랬던 것 같아요."
말을 잇던 황순주씨가 갑자기 말을 얼버무리며 이렇게 말한다.
“이런 언어를 써 본지가 너무 오래돼서… 저도 전에는 모난 사람이었거든요” (일동 웃음)잠시 웃음이 돌며 참석자들은 “이해해 이해해”하며 격려했고, 황순주씨는 말을 이어갔다.
“하여튼 고운은 전교조 이전부터 고민이 있어 왔어요. 전교조는 교육민주화운동일 뿐이지 학생들을 주체로 한 운동이 아니었거든요. 고운을 했던 사람들은 전교조에 대한 반감같은 것이 있어요. 고운이 전교조에 묻혀가는 운동이 됐거든요. 전교조가 없었다면 고운이 더 발전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군사정권에 타격이 될 수 있었다고 보거든요. 고등학생들의 조직화가 정권에는 위험성으로 인식됐던 것 같고, 부고협이 3기까지 출범했는데, 92년에 많은 탄압을 받게 됐습니다. 그때 문화지형을 잘 다졌으면 달라지지 않았을까 생각 돼요."-그럼 지금 청소년 운동이 보는 고등학생운동에 대해서도 한번 들어보지요. 전누리(21) "이 자리 오면서 고민했지만 당사자들이 다 있는 자리에서 제가 어떻게 평가하겠어요(일동 웃음) 그때 당시 선배들이 이랬었다 하는 정도로만 알고 있어요. 87~89년 고등학생운동이 얼마나 우리에게 가까이 있는가 생각해 봤는데 전혀 그렇지 못한 것 같아요. 저도 고등학생운동에 대해 알기 위해 정리 작업을 했는데, 어떤 평가를 하기는 어려운 부분이라고 봐요. 다만, 지금도 그때처럼 입시적 문제가 있는데 왜 당시의 운동이 이어지지 못하고 지금 학생들은 저항하지 않나 하는 고민이 있어요."
전성원 "중요한 부분을 지적한 것 같다. 당시 어른이 됐을 때 이런 흐름을 가져갈 수 있을까 생각했다. 이후 이어진 고운의 침체는 우리나라 운동의 변화과정에도 연관이 있다. 대중운동이 고등학생 운동을 개량화시켰다. 역량이 빠져나갔고 고운이 조직화될 수 있는 형태가 못됐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이득이 안되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됐는데, 어떻게 하면 현재의 문제로 소화해 낼 수 있는가? 고민해 봐야 한다. 고등학생운동이 좌절되고 청소년 운동이 안 되느냐하면 선배들의 운동이 현재의 순간에서 대입 가능한 숙제가 못되기 때문이다. 현재의 학생들은 그때의 활동이 다가오지 않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