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만강 숲이런 숲속에 숨어있다가 두만강을 건너곤 했다. 그렇게 하기를 수십 차례. 마침내 똘이는 중국 할마이 신고로 체포되었지만, 김대좌님같은 분을 만나서 풀려날 수 있었다.
차승만
“맨 처음 잡혀간 것은 어떤 할마이 때문이에요. 그 할마이 우리 불쌍하게 보인다고 밥을 줄테니 자기 가게로 따라오라는 겁니다. 우리는 진짜 다른 생각 안 하고 그 할마이 따라가서 정신없이 밥을 먹는데, 아 잠깐 후에 그 할마이가 신고를 해서 공안들이 나타나서 저하고 친구하고 바로 잡혀갔어요.”그렇게 중국 공안에게 잡힌 후 바로 저 다리 위로 끌려갔다고 한다.
“아, 그런데 제가 쌀 두 포대 어깨에 가득 진 채 잡혀갔어요. 며칠 동안 이 부대 저 부대 옮겨다니며 맨 아래 군인에서부터 점점 위로 불려갔는데 마지막에 한 대좌에게까지 갔는데, 아 엄청 좋은 사람인 겁니다. 그분 벌써 눈빛부터가 나를 불쌍한 투로 보는 겁니다. 뭐 욕 이런 것도 전혀 안 하고, 별다른 추궁이나 조사 같은 것도 안하더라고요. 그냥 한참 책상에 앉아서 혼자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더니만 우리 아버지 성함을 물어보더라고요. 대답을 해줬더니 편지 한 통을 써주는 거예요. 그리곤 편지 봉투에 담아서 저에게 주시면서 일이 더 커지기 전에 빨리 부대를 나가라고 하면서 우릴 보내주는 거예요.” (북한군 대좌는 한국군 대령급 직위입니다.)“아무리 중국과 북한 사이라 해도 국경 수비대라면 훨씬 군 기강도 셀 텐데. 정말 신기하네. 그래 쌀은? 쌀은 어쨌어? 쌀은 그 부대에 빼앗겼지?”
“아뇨! 쌀 두 포대를 그대로 다 주는 거예요. 아 그래서 우린 부대원들이 혹시나 마음을 바꿔 우리를 다시 좇아오지 않을까 해서 다섯 시간 넘게 계속 쌀 두 포대를 들고 산 쪽으로 난 길을 따라 정신없이 뛰었어요.”“그래? 아 너무 다행이다. 그런데 그 봉투는 도대체 뭐래?”
“있잖슴까? 저도 그 봉투가 너무 궁금해서 도저히 집에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지 못해서 결국 산을 다 넘기 전에 봉투를 뜯어서 뭐라고 적었는지 봤습니다. 아 진짜 나 그 중대장 아직도 잊지 못하겠습니다. 북조선에도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통일되면 그 사람 꼭 다시 만나러 가서 반드시 인사드릴 겁니다.”과연 그 봉투 안에 뭐라고 쓰여 있었던 것일까? 조국을 떠나 남의 나라에 가서 식량을 구걸하며 ‘조국의 명예에 흠을 낸’ 소년들이 특히나 북조선 군인들의 자존심을 건드렸을 것이 분명할 텐데…. 그 중대장이 썼다는 편지 내용을 듣는 순간 난 온 몸에 전율, 아니 소름이 돋았다.
(다음은 똘이가 기억하는 편지 내용을 쓴 것입니다. 진짜 편지는 북조선 말투로 썼겠으나, 똘이도 이젠 한국 사람이 다 되고 난 후라 고향의 말투를 다 기억하지 못해 우리가 쓰는 용어로 풀어서 썼습니다.)
안녕하십니까. 똘이 아버지.
우리 조선이 지금 상당히 어렵습니다. 배고픔이란 견디기 힘든 고통임이 분명합니다. 가족이 굶어 죽는 모습을 보다 못해 중국으로 쌀을 구하러 간 똘이의 행동을 크게 책하지는 않습니다. 더군다나 아버지께서 병에 들어 누워계시다 하니 똘이의 마음이 오죽 걱정이 크겠는지 알만 합니다. 그러나 똘이 아버지. 조금만 참고 견디어주십시오. 조선은 이제 곧 다시 일어설 것입니다. 배급도 다시 시작될 것이고, 중국에 가서 식량을 구걸하지 않아도 될 만큼 강한 나라 조선으로 우뚝 설 것이니, 지금의 이 고난의 시대가 지날 때까지 조금만 더 기다려주십시오.
똘이가 가져온 식량은 저희가 그대로 보내드립니다. 빨리 회복되시기 바라며, 다시는 똘이가 중국으로 가서 식량을 구걸하여, 우리 조선민족의 자존심을 훼손시키는 부끄러운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조선은 반드시 다시 일어서고 말 것입니다. 00부대 대좌 000똘이는 아직도 그에게 따뜻한 자비를 베풀어준 김00 대좌님을 기억하고 있다. 조선은 반드시 다시 일어설 것이라던 그 대좌의 신념은 어쩌면 더 이상 악화될 수조차 없을 정도로 무너져 내린 북녘의 식량사정에 대한 마지막 항변이었을지도 모른다.
나이 열여섯, 몸무게가 30kg을 겨우 넘어선 조그만 아이가 아버지가 아프다며 쌀 두 포대를 가득 들고 두만강을 건너다 체포되는 서글픈 조국의 재난 앞에 그는 아마 가슴을 쓸어내리며 비탄에 젖었을 것이다. 자신도 어쩔 수 없는 무서우리만치 기막힌 상황에 처한 조국의 현실에서, 아버지에게 편지를 쓰며 쌀 두 포대를 그대로 안기어 보내준 것은 그가 할 수 있었던 최고의 자비였으리라 확신한다.
조국을 생각하는 충성심과, 가엾은 인민을 동정 어린 눈빛으로 바라볼 줄 아는 그런 감성을 지닌 북조선의 인민군이 존재하다니. 아니, 존재하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애당초 근거 없는 편견에 불과했겠지만, 누구에게서도 그리고 어떤 신문이나 책에서도 이런 북조선 군인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었기에 나의 놀라움이 무척 클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 일은 1990년대 후반, 그러니까 ‘탈북자’를 둘러싼 온갖 끔찍한 소식이 본격적으로 들려왔던 2000년 이전에 있었던 일이다. 그리고 이것은 똘이가 기억하는 첫 번째 체포에서 겪은 일이다. 이후 똘이는 식량사정이 나아지지 못해서 다시 수십 차례 두만강을 넘어 식량을 구하다 두 번이나 더 체포되었다. 그리고 이 두 번의 체포과정에서는 위의 상황과는 전혀 다른 아주 혹독한 체포 및 조사, 투옥 과정을 겪게 되었다고 한다.
나는 한 시간이 넘게 두만강 가에서 똘이가 잡혀갔던 그 다리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다리 주변에는 다리와 두만강, 그리고 두만강 건너 북한 남양시를 화폭에 담아내기 위해 관광객들이 저마다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북적거리고 있다. 중국 남방계 관광객들까지 무척 많은 것을 보면 이곳도 어지간히 잘 알려진 관광지인 것 같다.
DMZ가 미국인들에게 아시아에서 가장 가보고 싶은 관광지 중에 하나인 것처럼, 이곳 두만강변에서도 우리 민족의 아픔과 상처가 타민족에게 한낱 관광거리로 전락하고 있는 현실을 보게 되어, 너무나 서글프고 원망스럽다.
사진촬영에 여념이 없는 일행을 잠시 뒤로하고 나는 두만강가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중국변방에서 낙후된 도시로 알려진 곳인 이곳 도문시만 해도 주말을 맞은 오늘 강변에는 가족들이 강가에 나와서 소풍을 즐기는 모습이 무척이나 평화스럽다. 재중동포에게 듣자니 북한이 곧 개방될 것을 예상해서 벌써부터 이 도시의 부동산 가격이 오르고 있다고 한다. 정말이지 인간에게 딱 맞는 수식어는 경제적 동물이란 생각이 들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