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고 임길택 시인의 동시집 <탄광마을 아이들>

등록 2007.12.20 16:11수정 2007.12.20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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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탄광마을 아이들> 2000년 3월판 표지
<탄광마을 아이들> 2000년 3월판 표지실천문학사
90년대 초반에 나온 임길택 시인의 동시집 <탄광마을 아이들>이 갑자기 보고 싶어 책장을 뒤져 다시 찾아 읽는다. 우리나라 시인이자 초등학교 교사였던, 그러나 이제는 고인이 되신 임길택 선생님.

그는 1952년 전남 무안에서 태어나 목포교대를 졸업하고 남들은 일부러 가지 않으려는 강원도 산마을과 탄광마을에서 15년여 동안 교사생활을 했고, 1997년 12월 11일 지병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경남 거창에서 교사생활을 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시집 <탄광마을 아이들> <할아버지 요강><똥 누고 가는 새>, 동화집 <산골마을아이들><느릅골 아이들><탄광마을에 뜨는 달>, 수필집 <하늘숨을 쉬는 아이들>이 있다. 나는 임길택 선생님을 한 번도 뵌 적은 없지만 아마도 선생님은 화단 속의 화려한 꽃이 아니라 길옆이나 물가에 핀 우리 야생화 같지 않을까 싶다. 그가 쓴 시들을 보면 꼭 그런 느낌이다.

2004년도에 재개정판으로 나온 시집 <탄광마을 아이들>(실천문학사, 2004)에는 아이들의 눈으로 본 탄광마을 사람들의 세계가 꾸밈없이 진솔하게 펼쳐져 있다. 그 세계는 너무 가난하고, 고된 노동을 강요당하고 그 위에 아무 예고도 없이 끔찍한 재난까지 가끔 일어나는, 눈물과 이별과 기다림으로 이어져있는 세계이다.

그 속에서 삶의 희망을 찾으려는 아이들의 순박한 삶과 마음을 쓰다듬고 보듬고 하는 시인의 손길이 가늘게 떨린다. 시인의 시비에 새겨진 시 '아버지 걸으시는 길을'이 수록되어 있는 시집이다.

아버지 하시는 얼굴
외가 마을 아저씨가 물었을 때
나는 모른다고 했다


기차 안에서
앞 자리의 아저씨가
물어왔을 때도
나는 낯만 붉히었다
바보 같으니라고
바보 같으니라고



집에 돌아와
거울 앞에 서서야
나는 큰 소리로 말을 했다


우리 아버지는 탄을 캐십니다
일한 만큼 돈을 타고
남 속이지 못하는
우리 아버지 광부이십니다

- '거울 앞에 서서' 전문


 <탄광마을 아이들> 2004년 2월판 표지.
<탄광마을 아이들> 2004년 2월판 표지.실천문학사
시집 맨 첫 장에 나오는 시다. 시인은 아버지의 직업을 물어오는 사람들 앞에 광부라고 떳떳하게 말 못하고 집에 돌아와 거울 앞에 서서야 우리 아버지는 탄 캐는 광부라고 외치며 부끄러워하는 시적 화자(어린 아이)를 등장시킴으로써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광산촌의 문제를 은유적으로 독자에게 전하고 있다.

시집 <탄광마을아이들> 전편에 걸쳐 흐르고 있는 주된 사상(주제)은 '사랑'이다. 가깝게는 아버지의 노동, 억척같이 살아가는 어머니의 삶을 비롯하여 이웃집, 학교 선생님, 탄광마을 아이들 전체에 작가의 깊은 관심과 뜨거운 사랑이 시집 전편에 가득 차 있다.

아버지에 대한 사랑은 아버지의 어려운 노동일을 이해하고 나에게 어려운 일이 닥쳐와도 아버지를 생각하며 참고 견딜 수 있게 만든다.

"밤 열한 시 / 바람이 불고 / 비가 내리치는" 날 아프시다는 고향 할머니 소식에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라면 2개를 가방에 넣고 밤일 나가신 아버지를 생각하며 나는 "일하면서도 / 아버지는 / 아프시다는 할머니 생각만 하시겠지 / 불을 끄고 누웠는데도 / 잠이 오지 않았다" ('아버지일 가실 때' 부분)

또 축구를 하다 넘어져 다쳐도 엄지손가락만 빼고는 모두 잘라낸 손으로 나를 업어주셨고 팽이를 깎아주시며 하루도 빠짐없이 탄광일 나가시는 아버지의 손을 생각하며 쓰린 걸 꾹 참으며, 이제 나는 울지 않는다. ('이제 나는'부분)

그래서 나는 아버지가 하시는 일은 옳다고 생각되어 나도 따라하고('아빠랑 나랑' 부분), 아버지와 같은 훌륭한 광부가 되겠다고 속으로 다짐하기도 한다.

산 위에서
우리 집을 찾았어요
영이네 집도 보았어요


길 아래
마당 한 뼘 못 가진 채
용케도 붙어 있어요


온 마을 집들이
비탈에 버티고 서서
어깨동무를
하고 있어요


이마 서로 맞대고서
오는 겨울도 견디어 내자고
서로 다짐하는 것만 같아요

- '산 위에서' 전문

팔도 사람들이
이룬 마을


가난한 이들끼리
정 나누는 마을


하늘 바람 먼저 와
스치고 가는


태백산 골짜기
우리네 마을

- '우리 마을' 전문

위 두 편의 시는 맑고 깨끗한 동심의 눈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결코 쉽게 씌어지기 어려운 작품이다. 현실과 미래의 삶이 닫혀 막막한 민중들의 삶을 "어려움이 닥쳐오면 비탈에 어깨동무로 버티고 서서 이마를 맞대며 견디어내는 가난한 이들끼리 정 나누는 마을"로 표현한 작가의 민중에 대한 따스한 시각과 표현의 아름다움은 어느 시인의 그것보다 강하다. 삶의 시적 형상화의 완결성을 한껏 보여준 작품이다.

고 임길택 시인이 생전에 아이들을 가르치는 참 교사로서, 삶을 위한 문학을 함께하는 동지로서 많이 따랐던 이오덕 선생님은 그의 시를 두고 이렇게 평했다.

"이 시집은 오늘날 우리 아이들이 죄다 잃어가고 있는 순박한 삶과 마음을 용하게 잘도 찾아내어 보여주고 있다. 이는 시인이기 이전에 탄광마을과 산골 학교에서 아이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훌륭한 교육자로서의 지은이만이 쓸 수 있는 시요, 몸으로 살아가는 창조의 세계라 하겠다. 온 산천이 새까맣고 마을도 길도 새까만 곳, 모두가 떠나고 얼굴 찌푸리며 지나가는 땅, 그곳에서 가난하지만 정직하고 힘겹지만 따뜻한 삶을 꾸려가는 아이들이야말로 세상의 꽃이요 빛이 아니겠는가."

이오덕 선생님도 임길택 선생님과 마찬가지로 이제는 고인이시다. 우리나라의 참교육과 삶을 위한 올바른 문학을 일구기 위해 힘껏 일하셨던 그분들의 해맑은 웃음을 남겨놓으신 책을 통해 다시 본다. 우리나라 아이들의 영원한 친구, 임길택 선생님! 선생님의 시를 읽으면 나도 모르게 맑은 어린 아이의 마음이 샘솟는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경북매일신문 '이종암의 책 이야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경북매일신문 '이종암의 책 이야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탄광마을 아이들

임길택 지음, 정문주 그림,
실천문학사, 2004


#임길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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