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 무심한 바다를 보니 가슴이 미어집니다

실의에 빠진 태안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등록 2007.12.22 11:48수정 2007.12.29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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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 사느라고 바빠서 몇 달째 소식 전하지 못했습니다. 연말쯤 시간을 내어 그곳에 놀러가 묵은 이야기도 하면서 그동안 쌓인 회포를 풀어볼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바다를 뒤집어 놓은 엄청난 사고를 접하고 무어라 위로의 말을 찾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뭔가 도움이 될 일이 없을까 생각하다가 사무실에서 자원봉사자 모집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루 훌쩍 다녀오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될까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우선 하루라도 다녀와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아 신청을 했습니다.


당일 목적지는 사목해수욕장이라는 곳이었습니다. 상당히 외진 곳이라서 그런지 오전 7시 반에 서둘러 출발했는데도 9시가 훌쩍 넘어서 도착하더군요. 버스에서 내려 노란 비닐 옷을 걸치고 작업장을 찾아 길을 나섰습니다.

 해수욕장 입구의 안내문. 놀러온 사람이 감히 쓰레기도 버리지 못하던 곳이었습니다
해수욕장 입구의 안내문. 놀러온 사람이 감히 쓰레기도 버리지 못하던 곳이었습니다유신준

마침 그곳에서 아침부터 기다리고 있던 주민 분들의 안내를 받았습니다. 안내가 없었더라면 어디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서 우왕좌왕 했을 텐데 일할 곳을 찾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경황 중에도 주민들이 이성을 잃지 않고 침착하게 대처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해수욕장은 마침 썰물 때라서 물이 빠지는 중이었습니다. 그동안의 복구활동으로 바닷가 모래 벌은 제 모습을 찾은 듯 보였습니다. 플라스틱 각삽으로 시커먼 기름을 퍼올리던 TV의 정나미 떨어지는 광경을 생각하면, 노란 모래 벌은 조금 안심이 되었습니다.

 흉물스런 검은오물 타르덩어리. 바닷가에 지천입니다
흉물스런 검은오물 타르덩어리. 바닷가에 지천입니다유신준

작업현장에 도착하고 보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비교적 사고지점과 먼 곳이라 전 면적이 기름을 뒤집어 쓴 곳은 아니었지만, 바닷가 갯바위는 군데군데 기름찌꺼기로 엉망이었습니다. 수려하던 바위들이 흡사 도로포장 후 남은 아스팔트 찌꺼기라도 뿌려놓은 듯 처참했고, 멀쩡해 보이는 돌멩이도 뒤집어보면 끈적끈적한 기름덩이가 묻어 있기 일쑤였습니다.

물 빠진 곳을 따라 조금 들어가 보니 그곳도 성치 않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자연 굴이 다닥다닥 붙어서 하얗게 보이던 바위는 시커먼 기름을 뒤집어쓰고 헐떡였습니다. 옹기종기 갯바위에 붙어살던 고동들도 굳게 잡고 있던 빨판에 힘이 빠져 바위에서 스르르 떨어져 내리고 있었습니다. 기름을 둘러 쓴 바닷가는 서서히 검은 죽음을 맞고 있었습니다.


 자연 굴로 하얗게 보이던 바위는 시커먼 기름을 뒤집어쓰고 헐떡였습니다.
자연 굴로 하얗게 보이던 바위는 시커먼 기름을 뒤집어쓰고 헐떡였습니다. 유신준

준비된 흡착포로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기분 나쁘게 끈적거리는 검은 오물들은 뻣뻣한 흡착포로 잘 닦여지지도 않았습니다. 매끄러운 돌은 그래도 형편이 나은 편이었습니다. 대개의 갯바위들은 거칠고 굴곡이 심했는데 사이에 낀 원유찌꺼기는 꼬챙이로 일일이 파내야 했습니다.

파내어서라도 깔끔하게 지워질 흔적이라면 그나마 일하는 보람이라도 생겼을 것입니다. 제거하고 돌아서면 검게 번쩍거리는 오물들의 흔적은 우리들을 허탈하게 했습니다. 마치 바위가 기름이라도 머금은 듯 걸레로 닦아도 닦아도 돌아서면 다시 번쩍였습니다.


 바위가 기름이라도 머금은 듯 걸레로 닦아도 돌아서면 다시 번쩍입니다
바위가 기름이라도 머금은 듯 걸레로 닦아도 돌아서면 다시 번쩍입니다 유신준

어떤 바위는 바위 전체가 기름폭격이라도 맞은 것 같았습니다. 기름범벅이 된 바위는 함께 간 동료들 몇 사람이 함께 달라붙어서 닦아봤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거친 표면에 자리잡은 끈적끈적한 원유찌꺼기는 바위 속속들이 스며들어 제대로 닦여지지 않았습니다.

바닷가에 흡사 자동차 정비공장이라도 차려놓은 듯 사방에 기름걸레가 질펀하고 주변에 기름냄새가 진동을 했습니다. 우리가 지금 뭐하고 있는 것인가. 쓴 웃음만 나오더군요.

 옹기종기 갯바위에 붙어살던 고동들도 스르르 떨어져 내렸습니다.
옹기종기 갯바위에 붙어살던 고동들도 스르르 떨어져 내렸습니다. 유신준

바다를 바라봤습니다. 그곳에 놀러 갔을 때, 박형의 안내로 바닷가를 돌아보던 여름날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깎아지른 절벽과 수려한 바위들을 보며 이곳에 살면 그까짓 해금강 하나도 안 부럽다고 했었지요.

풍경만 죽여주는 게 아니라며, 아침 일찍 일어나 바닷가를 살피면 어지간한 반찬거리 정도는 걱정하지 않고 산다며, 박형 얼굴에 자랑스럽게 스치던 미소가 생각났습니다. 흐린 하늘아래 펼쳐진 바다는 엊그제 같은 그날의 추억들이 무참히 부서진 현장이었습니다.

 끈적끈적한 원유찌꺼기는 바위에 스며들어 제대로 닦여지지 않습니다.
끈적끈적한 원유찌꺼기는 바위에 스며들어 제대로 닦여지지 않습니다. 유신준

사실, 기름유출 사고 이후 태안은 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엄청난 사고를 일으키고도 처리 결과만 바라보며 꿀먹은 벙어리인 관련 기업의 행태를 보면 그쪽은 쳐다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무슨 일만 생기면 일 저지른 놈들은 멀쩡하게 따로 있는데 죄없는 국민들이 뒤치닥꺼리를 떠안는 이 나라의 이상한 관습을 생각하면 더욱 외면하고 싶은 곳이었습니다.

'꿀먹은 벙어리'는 스스로 이 땅의 일류라 칭하는 삼성이 취해야 할 태도가 아니었습니다. 사과의 말 한마디가 삼성의 품격을 높였으면 높였지, 명예를 깎아먹을 일은 아니었습니다. '죄송합니다'라는 CEO의 말 한마디가 평상시 어마어마한 돈을 들이는 기업이미지 광고보다 훨씬 효과가 클 터였습니다. 이 땅에 터 잡고 살아온 '일류기업'이라면 우선 대국민 사과부터 하고 수습의 협조를 구하는 것이 마땅한 순서가 아니었던가요?

혹자는 삼성이 얼마나 복구에 열심인지 이야기할지도 모릅니다. 그건 이 나라 국민이면 누구나 하는 일입니다. 사고 당사자로서 필요한 것은 공식적인 사과였습니다. 유감스럽게도 현실은 자신이 얼마나 '법률적으로' 잘못이 없는지를 계산하는 데만 골몰하고 있다는 겁니다.

 바닷가 물이 고인 곳이면 어디든 번쩍이는 유막이 생깁니다
바닷가 물이 고인 곳이면 어디든 번쩍이는 유막이 생깁니다유신준

명문대 나온 머리좋은 사원들이 득실거리는 시스템에서 나온 사건해결 시나리오라면 더욱 실망스런 일이었습니다. 관련자가 미궁인 사건도 아니었고 사고의 당사자인 것이 명백한 이상 일단 사과를 하고 복구에 최선을 다해야 했습니다. 조사결과가 나오면 결과에 따라 조치를 취한다면 적어도 전 국민의 욕을 바가지로 듣는 사태는 피할 수 있었을 겁니다.

언제부터인가 이 나라는 무슨 일이 생기면 전 국민을 '자발적인 해결사'로 동원하는 이상한 관습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습니다. 일 저지른 놈들은 멀쩡하게 따로 있는데 자원봉사다, 성금이다, 하며 전 국민이 해결사로 나서야 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집니다. 온 국민을 거리로 나앉게 한 IMF는 전 국민의 금 모으기 운동으로 슬쩍 넘어가 버렸고.

자원봉사나 성금모금이 잘못됐다는 것은 아닙니다. 불시에 어려움을 당한 이웃은 당연히 도와야지요. 그러나 터진 일의 수습을 돕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와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원인을 찾아내 단단히 버릇을 고쳐놓는 일입니다. 구렁이 담 넘어가듯 슬그머니 지나가 버리는 습관 때문에 잊을 만 하면 이런 불행이 반복 될 수밖에 없습니다.

조사결과가 나온다 해도 그걸로 그냥 끝나겠습니까. 조금이라도 더 책임을 모면해 보려고 유능한 변호사를 있는 대로 동원해, 항소다 상고다 하며 몇 년 세월은 족히 보낼 겁니다. 세월이 지나가는 동안 엄청난 사건은 까맣게 잊혀지고 불행은 다시 반복되겠지요.

 찰랑거리는 물결 속에 무심히 죽어가는 바다를 보면 더 없이 마음이 무겁습니다.
찰랑거리는 물결 속에 무심히 죽어가는 바다를 보면 더 없이 마음이 무겁습니다.유신준

심난한 마음에 사설이 길어졌습니다. 자원봉사랍시고, 잠깐 다녀가는 것이 얼마나 도움이 되겠습니까. 앞으로 긴 세월을 두고 다가 올 바다의 저주를 생각을 하면 끔찍해집니다.

그러나 정작 가슴이 답답한 것은 생태계 회복에 20년이 넘게 걸린다는 보도때문이 아닙니다. 시꺼먼 기름을 수천 톤 뒤집어쓰고도 아무 일 없는 듯 찰랑이는 무심한 바다를 바라보면 가슴이 미어집니다. 갯벌의 수많은 생물들을 품어 길러낸 너른 가슴이 찰랑거리는 물결 속에 하루하루 무심히 죽어가는 것을 보면 더 없이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박형이 인연이 되어 태안을 알게 되었고 태안을 생각하면 언제나 소박한 바닷가의 꿈을 떠올렸습니다. 대통령선거마저 톱기사에서 내려버린 사상초유의 해양오염 사태는 시간이 흐르면서 시나브로 잊혀지겠지요. 자연의 위대한 힘으로 죽음의 바다는 언젠가 회복되겠지만 푸른 바다위에 떠 있던 검은 오물들과 함께 태안 바다는 우리들 마음 속에 상처로 오래 남아 있을 겁니다. 태안 바다는 태안 사람들만의 바다가 아니고 우리 모두의 바다이기 때문입니다.

기억할 겁니다. 기름유출이란 엄청난 사고를 당하고도 속수무책이었던 우리의 둔감한 초기 대응을, 삼성의 뻔뻔한 부도덕과 몰염치를, 시커먼 바다를 바라보며 절망하는 죄 없는 태안 사람들의 울분을, 갯바위를 기름걸레로 닦아내며 가슴 속에 맺힌 온국민의 응어리들을 잊지 않을 겁니다. 검은 오물들에 휩쓸려 사라져 버린 박형의 소박한 꿈과 함께 오랫동안 잊지 않고 기억할 겁니다.
#태안 기름오염 #태안 자원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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