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일곱 개의 시선에서 건진 몇 개의 생각

[서평] 김만권의 <세상을 보는 열일곱 개의 시선-정치와 사회에 관한 철학 에세이>

등록 2007.12.24 09:47수정 2007.12.24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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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형.

오랜만에 철학책을 읽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철학책을 읽지 않았다는 것은 철학책이 필요 없을 정도의 철학적 삶을 살았거나, 아니면 철학과는 동떨어진 삶을 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너무 단순한 이분법인가요?


그렇습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충분히 철학적이지 않아도 혹은 어느 정도 반(反)철학적이어도 살아가는 데 지장 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어쩌면 무(無)철학적 사고를 넘어 반철학적 사고가 신자유주의라 일컬어지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데는 훨씬 유용할 것입니다. 게걸스레 먹을 때 철학 따위는 필요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방해가 될 터이니까요.

철학은 생각을 하는 것이고, 생각하기 위해선 행동을 멈추어야 합니다. 멈출 줄 모르는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멈출 수 있는 자유는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그것은 자유는 자유로되 오로지 속도의 자유만 주어지는 사회입니다. 속도에 처지는 자, 경쟁을 거부하는 자는 시장의 이름으로 가혹한 처벌이 내려집니다.

‘권력은 시장에 넘어갔다’는 권력자의 한탄이 남의 일일 수만은 없는 우리 사회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왜 그리 시장의 질서에 목매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시장은 승리자에게만 월계관을 씌우고 나머지는 노예로 만듭니다.

어쩌면 우리 사회는 이천오백년 전 고대 아테네로 돌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좋은 의미에서의 아테네가 아닌, 다수 노예들의 피와 땀 위에 아테네의 민주정이 꽃 피었듯이 지금 이 시대에도 경쟁에서 탈락한 다수를 발판으로 시장에서 승리한 소수, 그들만이, 그들에 의한, 그들을 위한 민주정을 꽃피우고 있는 건 아닐까요. '시장의 자유'와 '자유의 시장'을 구별하지 못하는 우리 사회를 그저 몽매하다고만 해야 할까요.

대통령 선거가 끝난 다음날 나는 이런 의문을 가지고 철학책 하나를 꺼냈습니다. 발에 땀이 나도록 뛰어도 먹고 살기 힘든 세상에 두꺼운 철학책이야 어디 엄두가 나겠습니까. 전문성을 요하는 깊이 있는 철학서는 전공자에게 맡겨 두고 나 같은 선무당이야 어설피 사람잡지 않을 정도의 수준이면 족할 것입니다.


 세상을 보는 열일곱 개의 시선
세상을 보는 열일곱 개의 시선 황인규
그래서 개설서 정도의 수준으로 고른 책이 김만권의 <세상으로 보는 열일곱 개의 시선 - 정치와 사회에 관한 철학 에세이>입니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고른 것은 아닙니다. 언젠가 한겨레에 났던 서평을 보고 저의 '읽을 책' 목록에 올라 있던 책입니다.

부제에서 나타나듯이 이 책은 사회철학에 관한 내용입니다. 철학이 윤리와 구별되지 않던 소크라테스 시절의 철학에서 시작하여 사회의 체제, 그 자체를 대상으로 삼는 현대 사회철학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모여 살고 있는 사회(국가)의 원인과 분석 그리고 그 구성과 목적을 시대적 흐름에 맞춰 펼쳐놓은 책입니다.


소크라테스로부터 시작된 '이성'이라는 것이 어떻게 사회와 조화를 이루며, 나아가 어떻게 사회를 풍요롭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이 이 책의 전체를 관류하고 있는 핵심이라 할 것입니다.

저자는 이를 역사적 시각에서 고대, 중세, 근대, 현대의 철학적 흐름을 보여주지만 그것을 단순히 평면적으로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각 분야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철학자를 소개함과 동시에 현대 철학자와의 비교를 통해 그 사상적 기원과 전개를 손쉽게 알 수 있게 합니다.

가령 진리와 권력과의 관계를 그 원조인 플라톤의 이데아론에서만 추출하는 것이 아니라 푸코가 주장한 일상에 파고든 근대세계의 지배권력의 교묘함도 같이 소개하는 식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이 책은 무료한 지식의 나열이 아니라 비교와 차이를 통한 지식의 역동성을 느끼게 합니다.

특히 5장의 '왜 도덕과 정치가 분리되었을까'에서는 그동안 제가 편협하게 알고 있었던 마키아밸리의 사상적 가치를 발견하는 기쁨을 누렸고 젊은 시절 피상적 지식조각으로만 알고 있었던 그람시의 깊은 안목을 살짝이나마 새롭게 엿볼 수 있었던 것이 이 책의 가장 큰 성과입니다.

과거와 현대의 철학자를 넘나드는 시간의 축과 이성, 주권, 계몽, 합리성, 자유, 정의, 해체 등의 주제를 축으로 삼아 종횡으로 교직해가는 저자의 탁월한 구성능력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자 미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근대 세계의 합리성과 그 대응방식에 대해 좀더 심도 있는 전개가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이 책이 대중교양서라는 한계를 생각한다면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나머지는 저의 몫이겠지요.

저자는 철학의 내용을 소개만 하는 것이 아니라-그런 책은 시중에 널려 있습니다-철학의 유용에 대해서도 고민한 흔적이 있습니다. 저자의 생각과 관점이 가장 드러나는 장이 '여는 글'인데 여기서 저자는 아렌트와 푸코에 경도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몇 년 전부터 우리 사회에서 아렌트가 자주 언급된다는 것은 곧 아렌트가 그만큼 필요했다는 것의 반증일 것입니다. 아렌트 철학의 핵심은 이성적 인간이 어떻게 비이성적 전체주의에 매몰되고 악이 어떻게 평범한 일상 속에서 태연히 구사되는가에 있습니다. 이를 아렌트는 '생각 없음(thoughtlessness)'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것은 철학의 상실이란 말에 다름이 아닙니다. 푸코의 경우에 있어서도 크게 차이가 있는 건 아닙니다. 근대의 기술체계 속에서 은폐된 권력의 억압을 우리는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 이 또한 깊은 사고가 필요한 것입니다. 결국 저자는 철학이라는 망치로 물질에 오염돼 텅 비어버린 우리의 무뇌(無腦)를 타종을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뇌 속 깊숙이 명징한 종소리가 울리길 바라며.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은 타인과의 관계에 의해 규정되어지고, 넓게 보면 그것은 곧 사회와 나와의 관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결국 모든 철학은 사회와 나의 관계정립을 어떻게 할 것이냐로 귀결됩니다. 인간이 홀로 살 수 없음은 자명합니다. 인간의 삶이란 남과의 관계에서 살아 갈 수밖에 없고, 그 관계는 협력일 수도 있고 경쟁일 수도 있습니다.

과거 농경사회에서는 노동력을 집중하는 것이 훨씬 생산력이 크기 때문에 개인 간의 협력이 중요했지만 산업시대에는 인간의 노동이 파편화되고 하나의 수단으로 전락하게 되면서 경쟁관계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마르크스의 분석은 옳았습니다. 앞으로 전개될 정보화 사회에서는 인간이 극도로 원자화될 것이냐 아니면 새로운 소통의 장이 열릴 것이냐 하는 문제가 대두되리라고 봅니다.

그 속에서 철학이 할 일은 고대의 철학처럼 윤리에 종속되지도 않고 현대의 철학처럼 방법론에 치우치지도 않는 존재의 새로운 규명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봅니다. 타자에 대한 상상력이 메말라 가는 경제동물로 전락한 우리 사회의 천박한 자본주의, 여기에는 근대의 합리성이라는 작동기제가 숨어 있다는 것을 저자는 비판이론을 소개하며 보여주고 있습니다.

'근대성의 기획'이 자리잡기도 전에 물신이 지배해버린 우리 사회는 과연 어떻게 진창에서 빠져나올 것인가. 이성을 통해서인가, 아니면 그 해체를 통해서인가. 저자는 하버마스에 그 답이 있다고 언뜻 비춥니다. 그것은 곧 근대의 계몽이 아직 미완이라는 뜻입니다.

이성에 의한 절제를 습득하기도 전에 욕망의 분출부터 배워버린 우리 사회의 근대. 이 비뚤어진 근대를 다시 기획할 것인가 아니면 근대를 버리고 그 이후를 새롭게 모색할 것인가. 이에 대한 답을 이 책에서 구할 순 없습니다. 어쩌면 다른 책에서도 마찬가지일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의문점을 내 안에서 솟아나게 했다는 것, 이 하나만으로도 이 책이 나에게 준 가치는 충분하다고 봅니다.

세상을 보는 열일곱 개의 시선 - 정치와 사회에 관한 철학에세이

김만권 지음,
개마고원, 2007


#PERDI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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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디고』, 『마지막 항해』, 『책사냥』, 『사라진 그림자』(장편소설), 르포 『신발산업의 젊은사자들』 등 출간. 2019년 해양문학상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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