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직인수위원장에 임명된 이경숙 숙명여대 총장의 80년대 행적이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이 위원장이 1980~81년 국가보위입법회의 의원(이하 국보위 입법의원), 81~85년 민주정의당 국회의원으로서 전두환 정권의 법적·제도적 근거를 마련해주는 작업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특히 국보위 입법회의는 1980년 5월 권력을 장악한 신군부가 권력장악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제반 법과 제도적 장치를 정비하기 위해 발족시킨 과도입법기구로서 81명 전원이 전두환 대통령에 의해 임명됐다. '3권 분립'의 원칙에 어긋난 초헌법적인 기구에 37세의 소장 정치학자였던 이 위원장이 참여한 것부터가 말이 안 된다는 비판이 나올 만 하다.
"사양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진짜로?
이 위원장은 작년 3월 9일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선택에 대해 변명했다.
"구색을 갖추기 위해 숙대와 이대에서 한 명씩 정치학박사를 데려간 거죠. 이대에선 김행자 교수였어요. 두 학교 동문회에 추천해달라고 요청이 왔는데 여자 정치학박사가 뻔하니까 추천된 거죠. 처음에는 거절했어요. 잠깐 이야기나 하자고 해서 갔더니 임명장 주는 날이더라고요…(중략)…그 때는 국가비상 시기였고 끝까지 사양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죠."
"마지못해 참여했다"는 게 이 위원장의 설명이지만 당시 상황을 반대로 기억하는 사람도 있다. 80년 청와대 정무비서관으로서 입법위원 내정자들에게 연락 업무를 맡았던 이장춘 전 대사가 그렇다.
이 전 대사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1980년 나를 포함해 청와대 정무비서관 5명이 입법의원 명단을 나눠서 통보하는 일을 맡았는데, 내가 받은 명단에 이경숙씨가 포함되어 있었다"며 "그 해 가을 서울 신촌의 어느 다방에서 이씨를 만났는데, 내가 사정을 얘기하자 이씨는 순순히 '하겠다'고 답한 것으로 기억한다."
이 전 대사는 "누가 협박해서 억지로 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유신체제가 들어선 후 누구나 전국구 의원 한 번 하고 싶어하고 개발독재 하에서 (권력이) 부르면 안 가는 사람이 없을 때였다"고 덧붙였다.
국보위에서 성실한 의정활동... 공천순위 53위
국보위 입법회의(1980~81년) 및 11대 국회(81~85년) 의사록을 살펴보니, 이 위원장은 거의 모든 회의에 빠짐없이 참석하며 의정 활동을 충실히 이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위원장의 대학시절 전공이 정치외교학이었기 때문에 그는 국보위(외교·국방위)와 국회(외무위)에서 모두 외교관련 상임위원회를 맡게 된다.
당시 입법회의 외교·국방위 회의록에 나오는 이 위원장의 일부 발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통일원) 장관님의 인사말씀에서 통일원의 기본사업으로 정부가 국가관의 통일을 우선 도모하고 국민들 간의 통일기반을 조성한다는 정책에 대해서 저는 전폭적으로 지지합니다. 그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은 무엇인가 하고 질문을 해왔는데 현황보고에서 지적을 해주셔서 갈증을 해소했습니다…(중략)…결국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우리 국민들간에 퍼져있는 불신·불만 이러한 요소를 해소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러면 신뢰감을 회복하기 위해 특히 젊은이들에게 어떠한 홍보와 교육을 시켜야 되겠냐 하는 면에서 제 나름대로 지난 5월 학생소요사태를 통해 느낀 점이 있었습니다." (1980년 11월 4일)
"김대중 사건이 일본의 대한정책에서 왜 이렇게 중요합니까? 결국 남의 나라의 내정은 고사하고 자기들의 어떤 정책수립과 집행과정에 있어서 국가이익에 직접 관련되는 것마저 감안하면서까지 감히 덤벼드는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중략)…일본에서 얘기되고 있는 '한국내정문제에 관해 서명운동을 벌였다' 또 '그 결과를 UN에 전달했다'는 것이 사실인지 여부를 알려 달라…(중략)…일본이 과거에도 우리 한국의 내정문제뿐 아니라 다른 나라의 내정문제에 대한 어떤 내용을 가지고 UN에 호소한 전례가 있었는지?" (1980년 11월26일)
국보위에서 성실성을 인정받은 이 위원장은 이재형 전 국회의장의 추천으로 이듬해 1월8일 민주정의당 비례대표 공천순위 53번을 받았다. 같은 해 총선에서 최다득표 정당에게 전국구 의석의 절반을 우선 배정하도록 한 정당법 규정에 따라 이 위원장은 무난히 11대 국회에 입성했다.
"전 대통령께서 보여주신 통일 의지 강렬하다"
여당 의원이 된 이 위원장은 제5공화국의 통치이데올로기, 그 중에서도 전두환 대통령의 통일정책을 지원하는 역할을 주로 맡았다.
1982년 1월22일 전 대통령은 "쿠데타로 집권했다"는 국내외의 비판을 무마하기 위해 이른바 '민족화합민주통일 방안'을 제시했는데, 이 위원장은 같은 해 3월 4일 국회 정치외교안보 분야 대정부질의에서 전 대통령의 통일방안을 다음과 같이 찬양했다.
"6000만 민족의 숙원인 통일에 대한 열망과 노력은 제5공화국이 성립된 이후 더 뜨거워져 가고 있습니다. 지난 1월22일에는 통일헌법 제정과 이를 위한 통일민족협의회 구성을 골자로 하는 민족화합민주통일 방안이 제시된 바 있습니다. 이는 국내외적으로 포괄적이고 체계적이며 현실적인 제의로 호의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이 위원장은 전 대통령의 국정연설 내용을 상술한 뒤 "제5공화국 출범 이후 전 대통령께서 보여주신 통일에의 의지와 집념은 강렬하다"고 호평했다.
1983년 4월 25일 국회 외무위에서는 미국·일본·중국·러시아 등 한반도 주변 4대 강국들이 남북한의 정권을 상호 인정하는 이른바 '남북한 교차승인'에 반대하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남북한 교차승인으로 북한의 영토와 정부를 공식화해줄 경우 한국을 대한제국의 법통을 이은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한 1948년 UN총회 결의가 무력화된다는 게 이 위원장의 생각이었다. 이 위원장은 "이럴 경우 정통성 없는 북한이 (정통성 있는) 대한민국에 흡수되는 형식의 통일정책을 유지해온 우리 정부 통일정책의 이론적 근거를 상실하게 되는 막대한 손실을 가져오게 된다"며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여객기 격추사건에 "마음 같아서는 러시아인 비행기를 폭파"
같은 해 9월 1일 러시아 사할린섬 근해에서 대한항공 007 여객기가 러시아 전투기의 미사일에 맞아 격추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외교통'이었던 이 위원장도 이 사건에 있어서는 강한 분노를 표출했다.
"앞으로 우리의 대처방안으로 크게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여러 위원님들께서 이구동성으로 말씀하시는 보복조치입니다. 또 하나는 수습 조치입니다. 우선 보복조치로서 국민 누구든 이 땅에 지금 살고 있으면서 이들에게 그 이상의 보복을 원하지 않는 사람 누가 있겠습니까? 마음 같아서는 당장 똑같은 269명의 러시아인들이 탄 비행기를 데려다가 폭파를 시켜도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마음 같아서는 그렇게 하고싶지만 현실적으로 그것이 해당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의지라도 그 이상으로 강하게 가져야 될 때가 아닌가?"
그는 러시아가 우리 여객기를 격추한 이유에 대해서는 같은 해 8월 13일 해군이 울릉도 해상에서 북한 무장간첩선을 격침시킨 사건과 연관지어 ▲한미결속의 테스트용 ▲북한과 러시아의 공동 보복작전이라는 가설을 제시하기도 했다.
83년의 '보복' 발언이 지나쳤다고 생각해서인지 이 위원장은 이듬해 5월17일 외무위원회에서는 "우리가 칼 사건을 잊을 수도 없고 잊어서도 안되지만 한소 관계 개선은 궁극적으로 우리가 성립시켜야 할 하나의 외교과제"라고 역설했다.
북한의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참여가 예상되던 같은 해 3월13일에는 "현지 교포들이 올림픽 구경을 하는 중에 북한과 다른 나라와 경기가 있을 때 북한이 한 핏줄이라는 생각 때문에 우연하게나마 북한을 지원하게 될 경우가 있을 수 있다"며 "정부의 태도가 결정되지 않으면 교포사회에 혼란이 일어날 것 같다"며 걱정을 표시했다. 그러나 북한이 그 해 5월 러시아의 LA 올림픽 보이콧에 동참하면서 이 위원장의 걱정은 '기우'로 끝났다.
국회의원 시절 이 위원장의 외교·통일관이 보수 일변도로 흐른 것은 아니다. 1981년 5월 18일 외무위에서는 통일원 장관에게 "앞으로 통일이 정권 유지에 이용되는 경우가 있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며 초선의원 답지 않게 당찬 말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위원장이 11대 국회에서 소장 학자로서의 소신을 마음껏 폈다기보다는 전두환 대통령을 총재로 모신 여당의 거수기 역할을 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이재오 "첫 인사인데"... 이명박식 코드인사?
"인수위원장 인선은 당선자의 몫"이라며 한발 물러섰지만 이명박 대통령당선자의 최측근 이재오 의원이 24일 삼청동 안가까지 찾아가 "첫 인사인데 국민들에게 비판받을 소지가 있는 인물은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도 따가운 여론을 의식한 측면이 있다.
이 위원장이 25일 기자간담회에서 5공시절 전력에 대한 질문을 받자 "(국보위 문제는) 역사적으로 평가를 내렸다, 27년 전의 일"이라며 과거사에 대해 유야무야 넘어간 데에도 뒷말이 많다.
참여연대는 26일 "이 위원장이 헌정질서를 파괴했던 국보위에 참여한 전력과 관련하여 사과나 반성을 했다는 이야기는 알려진 바 없다"며 "단지 27년 전의 일로만 치부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위원장과 이명박 당선자의 역사에 대한 몰이해와 민주주의 가치에 대한 무감각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고 논평했다.
황선 민주노동당 부대변인도 "(이경숙 위원장의) 80년 국보위 참여는 '묻지 않을 수 없는 과거'다. 그 하나의 경력이 민주주의에 대한 의지를 예상할 수 있게 하고, 권력의 월권행위에 대한 무심함도 예측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 당선자의 인생처럼 인사원칙조차 '과거는 묻지 마세요'여서는 안 된다,인수위원장 인선을 보니 후보시절 광주항쟁을 광주사태라고 말하던 이 당선자의 철학이 새삼 걱정스럽다"고 덧붙였다.
한나라당 내에서도 이 당선자가 같은 교회(소망교회) 권사라는 친분 때문에 이 위원장을 무비판적으로 기용한 게 아니냐는 비판이 없지 않다. 소위 '이명박식 코드 인사'에 대한 불만이다.
이재오 의원의 한 측근 의원은 "이 위원장이 국보위 입법의원·민정당 의원으로 승승장구할 때, 이 의원은 남민전 사건으로 체포돼 4년 가까이 감옥살이를 했다"며 "국민들도 독재정권에서 잘 나가던 사람까지 '실용'이라는 명분으로 가져다쓰는 것을 곱게 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2007.12.26 15:50 | ⓒ 2007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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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숙 위원장, 왜 전두환을 찬양했나 "통일의 열망, 5공 이후 더 뜨거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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