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독자 늘리기 전투'를 성공리에 수행하고 나서 이틀간 휴가를 냈다. 몸과 마음이 지쳐 있었다. 쉬면서 모처럼 '맑은 정신'으로 방을 치웠는데, 방바닥은 읽지도 않을 거면서 흩어 놓았던 책이며 각종 잡지, 신문으로 엉망이었다. '돼지우리'가 형님 동생 하자고 해도 될법한….
그러다가 책장과 책상 사이에 있는 두툼한 붉은 색 표지의 책 두 권을 끄집어냈다. 집게손가락으로 쓱, 문질렀더니, 먼지가 새까맣게 묻었다. 책 테두리 위쪽에는 '2007.03.7'이라는 숫자가 찍혀 있다. '음, 마산 문화문고(지난 3월 31일 자로 문을 닫았음)에서 샀던 책이로군.'
'대장정'. 여러 자리에서 말을 들었고, 또 여러 책에서도 보았던 낱말이긴 하나, 그것이 어떻게 진행됐으며, 중국 현대사에 얼마나 의미가 있는지 나는 잘 모른다. 그냥 대장정 하면 '홍군이 국민당군과 유격전을 벌이면서 오랫동안 고생 좀 했겠지', 정도로만 생각했었다.
아마도 내가 이 책을 사게 된 건, '대장정'이라는 역사적 대사건을 '그림'(목판 기법)으로 그려냈다는 신선함, 그리고 '이런 건 처음 본다'라는 호기심이 발동했기 때문이리라. 출판사가 '보리'('딴 짓'하지 않고, 묵묵히 좋은 책을 만들어 내는 몇 안 되는 출판사다. 출판사 이름만 봐도 '옥석'을 가릴 수 있다)라는 사실도 크게 작용했을 테고.
이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구입한 책이건만, 근 아홉 달하고 보름만에 책이 책상 위로 올라오게 된 것은 오롯이 게으른 책 주인 탓이렷다!
아무튼, 노보에 써야 할 [요즘 읽은 책]의 '땔감'을 찾고 있었는데, '명랑 좌파' 우석훈 박사와 전 월간 <말>지 박권일(정말 서평을 잘 썼던 기자였는데) 기자가 함께 쓴 <88만원 세대>를 읽으려다가, <대장정>으로 급선회했다.
솔직히 말한다. 책 분량은 <대장정>이 <88만원 세대> 보다 3배(상·하권 도합 1100쪽이 넘음!) 이상 많지만, 내심 '그래도 그림책인데'라는 만만함과 얍실한 마음이 동시에 있었던 게다.
아, 그런데 이거 장난 아니다. 그림은 눈에 쏙쏙 들어왔는데, 처음 보는 지명과 인명이 등장할 때마다 애를 먹었다. 또 책이 어찌나 무겁던지 두 손으로 들고도 1분 이상 버티기가 어려웠다.
대장정이 묵직한, 역사적 대사건이 아니랄까봐 책값(각 권 3만 5000원!)과 책의 무게도 아주 빼닮았다. 에휴∼!
한국어판 여는 글(사회주의 중국의 과거와 현재를 이해하는 지름길, 대장정: 김희교(광운대 중국학과 교수))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1934년 10월 15일 밤, 중국 남부 장시(江西, 강서)에서 약 8만 명(8만6000명이었는데 나중에 7000명밖에 남지 않음)의 남자와 35명의 여자들이 길을 나섰다……이들이 바로 368일에 이르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믿기 힘든 여행을 해낸 중국 홍군이다. 총 9654킬로미터, 그것도 지구상에서 가장 험준한 지역을 걸었다. 산 여덟 개를 넘었고 강 스물네 개를 건넜으며 초지와 늪지대를 가로질렀다……국민당군(장제스는 90만명의 친위대와 300여 대의 폭격기를 가지고 있었음)의 계속되는 추격과 기습, 끊임없는 폭격 그리고 허기와 질병에 시달리면서 하루 평균 26킬로미터를 행군한 것이다."
이러하니, <중국의 붉은 별(Red Star over China)>를 썼던 저 유명한 에드거 스노가 "근대의 그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오디세이"라는 평가를 내리고, "대장정은 중국공산당이 인민을 만나고, 온몸으로 설득하고, 끝내는 인민의 지지를 끌어내는 과정이었다……중국공산당은 대장정을 통해 새로운 형태의 참여 민주주의를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다"라는 김희교 교수의 설명에 고개가 끄덕여질 수밖에 없다.
홍군은 이러한 어려운 상황에서도 대장정 기간 다음과 같은 행동 지침을 전달하고 실천했다고 한다.
1. 공손하게 말하라 2. 물건을 살 때는 제값을 치러라 3. 빌린 것은 꼭 갚아라 4. 피해를 끼친 것은 반드시 보상하라 5. 사람을 때리거나 말을 함부로 하지 말라 6. 농작물을 망치지 말라 7. 부녀자를 희롱하지 말라. 8. 포로를 학대하지 말라.
이 대목에서 나를 비롯한 우리 도민일보 식구들은 '경남도민일보가 독자들에게 드리는 21가지 약속'을 얼마나 잘 지키는지 궁금해진다.
또 <대장정>은 따라하고 싶은, 따라해서는 안 될 인물, 즉 온갖 인간과 인간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재미있게 녹아있다. 70여 년 전이라는 역사적 시간만 떼어내면 지금의 시점에서도 되새겨볼 만한 장면들이 많다.
'비범함은 평범함' 속에서 체현된다는 사실을 또렷이 보여주는 홍군 총사령관 주더(朱德, 주덕, 1886∼1976년), "엄숙하면서 날카롭고 지혜로우면서 성실한" 홍군 총정치위원 저우언라이(周恩來, 주은래, 1898∼1976년), "사소한 일에는 개의치 않는 소탈함과 초인간적인 지혜, 그리고 심오한 사상과 유머 넘치는 말투에는 큰 지혜를 가진 뛰어난 지도자의 기질과 호방한 시인의 풍모, 고집스럽고 소박한 농민의 기질이 융합되어" 있는 중화 소비에트 공화국 주석 마오쩌둥(毛澤東 모택동, 1893∼1976년)….
마지막으로 그림을 그린 이(선야오이)의 성실함을 칭찬해야겠다. 그이는 47만 자에 이르는 원작 소설 <지구의 붉은 띠>의 핵심을 정확히 파악하고 나서 926장면의 그림이야기책으로 압축했다. 6년 동안 원작을 거듭 읽으면서 그 내용을 깊이 이해했고, 대장정과 관련된 참고 자료 대부분을 장악했다. 단지 '책상머리'에서 이루어진 성과가 아니다. 두 번이나 대장정 길을 답사했다.
그래서 그린 이는 이처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림이야기책 <대장정―세상을 뒤흔든 368일>이 어떤 예술적 수준에 이르렀는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이것만은 아주 자신 있게 말하고 싶다. 대장정이라는 위대한 역사의 참모습을 보고 싶다면 이 그림이야기책 <대장정―세상을 뒤흔든 368일>을 보라!"
지당하신 말씀∼!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경남도민일보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2007.12.27 15:42 | ⓒ 2007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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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정下
왕쑤 지음, 송춘남 옮김, 선야오이 그림, 웨이웨 이 원작,
보리, 2006
대장정上
왕쑤 지음, 송춘남 옮김, 선야오이 그림, 웨이웨 이 원작,
보리,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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