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수어장대남한산성 수비대의 지휘소였다.
우광환
당시 조선의 국왕 인조는 송파에 있는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항복했습니다. 그냥 항복조인을 하고 말았던 것이 아니라 항복의 예를 올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항복의 예란 것이, 승자의 요구에 따라 황제에게만 할 수 있는,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배구고두례(三拜九敲頭禮)를 한 것입니다. 이게 문제였습니다.
그들의 요구를 끝까지 버티면서 듣지 말던가, 조선 왕이 차라리 자결을 하고 말 것이지, 황은이 망극하게도 북경의 자금성에 아직 시퍼렇게 살아 계신 위대한 명나라 황제를 배신하고 엉뚱한 놈과 군신의 맹약을 맺었다는 것, 더구나 그 상대가 오랑캐의 두목이었다는 것, 그것이 조선 사대부들에겐 중세 서양의 교황이 힘에 눌려 이슬람의 사라센 왕에게 입을 맞춘 것 보다 더 치욕이었던 이유였습니다.
다시 말해 내 나라 강토가 피로 물들여졌으며, 엄청난 숫자의 백성들이 무참하게 포로로 끌려간 일들은, 명나라 황제에게 망극한 불충을 저지른 일에 비하면 당시 사대부들에겐 아무 것도 아닌 거였습니다.
그들에겐 그저 청나라에 끌려갔다가 천신만고 끝에 돌아온 여자들은 화냥년(還鄕女)이었을 뿐이고, 그 여자 뱃속에 들어있던 아이는 호로(胡虜)자식으로 보일 뿐이었습니다. 청나라에서 요구하는 포로에 대한 속전(贖錢)은 애시당초 사대부들의 정부에서는 신경도 쓰지 않았습니다. 결국 포로들은 가족들의 도움으로 돌아오거나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만리타국에서 끝내 노예로 일생을 마쳐야 했습니다.
당시 조선 사대부들은 아무리 다 쓰러져가는 왕조라도 명나라는 주군의 국가이며, 자신들은 그들의 모범적인 제후국이라고 믿었습니다. 절대 불변의 이념이었던 성리학의 가르침에 목욕재계한 조선 사대부들은, 신하(조선)가 군주(명나라 황제) 를 배반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상상조차 하지 않으려 들었습니다.
명나라가 청의 기세에 눌려 헤매고 있는 틈을 타서 조선의 주권을 회복시키고자 노력했던 광해군 같은 이단적인 왕을 단칼에 폐위시킬 정도로 그들은 조선이 자주 독립국이기를 포기한 지 오래입니다.
조선 사대부들의 눈에 만주족이 지속적으로 오랑캐였던 것도 중화사상의 시각을 그대로 답습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주족인 청나라는 당시 부국과 강병을 이룩한 점에서 명나라를 압도했습니다.
그 500년 전에도 그들은 금나라라는 대제국을 세워 우리나라의 고려도 조공했을 정도였고, 청나라도 초기엔 그들의 후예라는 의미에서 大金(後金)이라는 국호를 썼습니다. 알고 보면 그들은 털북숭이 야만인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싹수가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