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당선인의 정권인수위원회가 지난 16일 정부조직 개편안을 발표했다. 현행 18부4처18청10위원회를 13부2처17청5위원회로 축소하는 게 골자다. 폐지되는 통일부나 여성부, 덩치가 커진 기획재정부에 언론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는 듯하다.
현업 과학자로서 나는 과학기술부에 남다른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미 과기부 폐지가 예견되었을 때부터 몇몇 단체들이 반대성명을 내기는 했었지만 막상 인재과학부로 통합된다는 소식에 착잡한 마음을 숨길 수가 없다(인재과학부는 아마도 일본의 '문부과학성'에서 영감을 얻은 듯 싶다).
지난 시절의 과기부가 한국의 과학기술발전에 얼마나 큰 공헌을 했는가에 대해서는 나 또한 회의적인 생각이 전혀 없지는 않다. 중장기적인 발전계획보다는 땜빵식 혹은 보여주기식 사업이 태반이었기 때문이다.
이번 정부조직 개편이 전반적으로 기능 통합과 외형 축소라는 방향으로 진행된 것처럼 과기부가 인재과학부로 통합된 배경 또한 "고등교육 지원과 기초과학 진흥이 영역별로 분산돼 국력에 비해 기초과학과 원천기술이 낙후"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인수위의 이런 분석과 그 대안에 동의하기 어렵다.
조직개편, '작은정부'란 목표에 끼워 맞춘 결과
우선, 전반적인 조직개편이 한국사회의 현실과 가까운 미래에 대한 철저한 분석에서 출발했다기보다 '작은 정부'라는 정해진 목표에 끼워맞춘 결과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현행 정부조직의 큰 틀이 IT를 선두로 하는 지식기반 경제체제의 구축이라는 철학을 조직적으로 구현한 것인 반면, 지금의 개편안은 도대체 어떤 국정운영 철학을 담고 있는지 감 잡을 길이 없다.
지난 5년 내내 좌파정부의 반시장정책을 규탄해 온 한나라당과 이명박 당선인이 기획재정부를 만들어 국가경제를 70~80년대 식으로 '기획'하겠다는 발상부터가 모순이 아닐까. 일본 대장성 개혁을 본받자더니 오히려 대장성 같은 부서를 하나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아마 노무현이 그랬다면 "빨갱이 정부의 본색이 드러났다"면서 십자포화를 받았을 게 분명하다.
과학자이기에 앞서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이번 개편안을 들여다보면 정부주도의 강력한 재래식 경제드라이브를 뒷받침하기 위한 조직개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한반도 대운하가 그 정점에 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공무원 앞에서는 힘없는 '을'일 수밖에 없는 보통 국민 입장에서야 불필요한 공무원 숫자를 줄이는 것이 환영할 일이지만, 그러나 그보다 더 원천적이고 중요한 일이 있다면 현재 국가가 처한 상황이 어떠하고 앞으로 어디로 나아가야 하며 그를 위해 어떤 인력과 역량이 필요한지를 점검하는 일일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인수위가 과기부를 폐지하고 인재과학부로 통폐합한 것은 국정운영에 대한 그 철학적 빈곤을 여지없이 드러냈다고 할 수 있다. 왜 그런가.
인재과학부, 싸구려 인력 대량생산 위한 부처 될 것
첫째, 앞으로 전개될 시대는 지식-국부-국가안보가 삼위일체를 형성할 가능성이 높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초과학이 당장에는 돈벌이가 안 되는, 먼 미래에나 그 투자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사치품 정도로 여기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기초과학은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땅과 바다, 숨 쉬는 공기와 하늘에 대한 일차적인 지식의 총합체이다.
이상기후, 자연재해, 식량부족, 영토-영해분쟁, 자원 확보를 둘러싼 쟁탈전 등등이 향후 국가안보에 핵심적인 위협요소이며 여기서의 경쟁력이 선진국으로서의 국부를 생산하는 일차적인 원동력이다. 따라서 기초과학을 국가가 전면적으로 나서서 지원하고 장려하는 것은 바로 지금 나라의 생존을 위해서도 필수불가결하다. 과학기술 정책을 독자적으로 수립하고 집행하는 전담부서 없이는 이렇듯 변화된 주변상황에서의 국가 미래를 담보하기 어렵다.
둘째, 기초과학과 원천기술이 낙후한 근본적인 이유는 핵심 연구인력의 절대부족과 이로 인한 자생력 부재다. 외형적으로만 본다면 우리나라의 이공계 졸업생 숫자는 세계적으로도 많다. 그러나 이 모두는 중저급의 '싸구려' 인력에 불과하다.
지금까지 정부의 혹은 과기부의 과학정책은 삼성전자 같은 일부 대기업이 값싸게 부려먹을 수 있는 중저급 인력의 대량생산에 맞춰져 있었다. 이런 인력들은 노동집약적이거나 혹은 일부 기술집약적인 분야에서 쓰임새가 있겠지만, 정말로 원천적인 지식과 기술을 만들어 내지는 못한다.
지식을 맨땅에서 캐내는 일은 고급 연구인력의 몫이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대체로 직접적인 돈벌이와는 거리가 멀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대한민국 정부수립 60년이 되도록 제대로 된 인재양성계획이 없었다. 모두들 눈앞의 경제적 성과에만 급급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돈벌이는 기업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다. 정부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바로 이렇듯 국가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하나 시장에서 생존할 수 없는 분야를 든든하게 뒷받침해주는 것이다.
기존의 교육부와 과기부를 합친 인재과학부는 저급 싸구려 인력 대량생산을 위한 부처가 될 가능성이 높다. 이는 아쉽게도 이명박 당선인의 '친기업적인' 신념과도 매우 맞아 떨어진다.
다른 선진국과의 단순비례 비교, 위험하다
여기서 한 가지 매우 중요한 점은 다른 선진국과의 단순비례 비교가 아주 위험하다는 점이다. 대개 미국이나 일본이나 유럽 나라들이 인구가 얼마이고 GDP가 얼마인데 공무원이 몇 명이고 연구원이 몇 명이며 R&D 투자가 얼마이고 하는 식으로 비교를 하는 경향이 있다.
그 자체가 하나의 좋은 참고자료는 될 수 있지만, 이런 단순비교의 결과가 절대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예컨대 우리나라 공무원 숫자가 많아서 줄여야 한다지만 119 소방대원의 숫자는 여전히 모자란다.
더더욱 중요한 것은 임계점에 대한 개념이다. 미국이나 일본, 중국 등 주변의 강대국들에 비하면 한국은 여러 모로 왜소하고 부족한 나라다. 혹자는 이런 나라에서 선진국을 흉내내 그렇게 많은 핵심인력을 보유할 필요가 있는가 하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정한 숫자가 확보되지 않으면 그 분야의 기본적인 자생력은 생기지 않는다.
물은 반드시 100℃가 되어야 끓는다. 1㎏의 물이나 10㎏의 물이나 그 양에 관계없이 100℃가 되지 않으면 물은 결코 수증기가 될 수 없다. 한국이 기초과학에서 자생력을 가지기 위해 어느 정도의 인력이 필요한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지금의 숫자로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기초과학의 자생력이 확실한 일본과 비교해서 문부과학성을 빗대 인재과학부를 옹호하는 것은 이런 이유로 옳지 않다. 지금 우리는 여전히 자생력이 부족하다).
더 나아가서, 한국이 비교적 작고 부족한 나라이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중요한 부분을 비대칭적으로 지원할 필요가 있다. 반도체 산업이 성공한 것도 그 때문이다. 조선업계가 세계를 주름잡는 이유도 회사별로 1300여 명에 달하는 고급 설계인력 덕분이다. 일본에는 그 나라 전체를 통틀어 2000여명의 설계인력밖에 없다. 무엇보다, 한국은 그 국력에 비해 엄청나게 많은 돈을 군사비로 쓰고 있다.
그 어느 누구도 이를 두고 미국이나 일본이나 유럽 국가들과의 인구대비 혹은 GDP 대비 적정 수준의 반도체 투자액과 선박설계자의 숫자와 군사비를 주장하지 않는다. 이러한 비대칭적인 집중사항에 기초과학이 빠져 있다는 것은 매우 잘못된 처사다. 인수위의 개편안에 있는 인재과학부가 기초과학에 대한 이런 비대칭적 집중투자를 염두에 두지 않았음은 분명해 보인다. 그래서 나는 이 개편안이 이명박 당선인의 국정운영의 빈곤한 철학을 반영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과학자 홀대하면, 한국의 미래는 암담할 것
셋째, 기초과학에 대한 정부정책은 고도로 전문화되고 숙련된 인력을 필요로 한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무작정 공무원 숫자만 줄이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전문성을 갖춘 공무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이 오히려 근본적인 문제다. 일선 연구원과 교수들의 가장 큰 불만사항 중의 하나도 정부부처에 믿고 대화가 통할만한 전문 인력이 없다는 점이다. 군 출신이 꼭 국방장관을 할 필요는 없듯이, 과학자 출신이 인재과학부 장관을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교육부와 과기부가 합쳐져 탄생한 인재과학부에서 나라의 중요한 과학정책이 비전문가들에 의해 주도될지도 모른다는 점은 극히 우려스럽다. 아주 최근에 와서야 부총리제를 통해 과학기술분야에 대한 정책적 중요성이 겨우 제도적으로 뒷받침되었는데 이제는 그마저도 사라져 과학기술분야가 정부부처 내에서조차 '시장경쟁'에 내몰리지 않을까 걱정된다.
조직은 이념의 반영이다. 안타깝게도, 이번 인수위의 정부조직 개편안에서는 이 개편을 통해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지가 분명하게 읽히지 않는다. 굳이 찾는다면 이명박 당선인의 '경제 살리기'를 속전속결로 해치울 수 있는 80년대식 구조를 만들었다는 정도가 아닐까. '삽질' 경제로 표현되는, 국가주도의 대규모 토목사업에 온 나라를 총동원할 수 있는 그런 구조 말이다.
이런 천박한 철학으로는 당선인이 내세운 선진국 진입이 어려울 것 같다. 선진국에는 돈으로는 살 수 없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 기초과학에 대한 획기적이고 전면적인 인식의 전환이 그 한 예다. 지식생산자로서의 과학자를 이런 식으로 홀대한다면 한국의 미래는 매우 암담할 것이다.
2008.01.18 09:19 | ⓒ 2008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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