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가 없던 시절 보관하던 방법으로 만든 옥수수.수확한 옥수수를 삶아 햇볕에 말려 보관한 뒤 삶으면 그 맛이 깊고 그윽하다. 고향의 맛이라고 생각하면 딱 어울리는 맛을 내는 옥수수. 냉장고가 생긴 이후 시골에서도 귀한 옥수수가 되었다.
강기희
겨울을 위해 준비해 놓은 옥수수는 요긴한 간식거리이다. 강냉이라고 부르는 옥수수는 삶아도 먹고, 쩌서도 먹고, 볶아도 먹고, 멧돌에 갈아 밥을 지어 먹기도 한다. 가난의 상징인 옥수수가 요즘은 다이어트 음식이라 하여 도시인들에게 인기라고 하니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옛날 같으면 추운 겨울 밤 가족이 둘러 앉아 콩도 볶아 먹고 화롯불에 감자를 굽기도 하지만 요즘의 세상이라는 게 그런 재미도 없어진 지 오래라, 가스불에 옥수수 몇 통을 삶으며 긴 겨울을 보낸다. 어둠이 내리자마자 잠자리에 든 일흔여섯의 어머니는 가끔씩 일어나 화장실을 오가며 옥수수를 삶고 있는 아들에게 "배고프기 전에 얼른 자지, 여태 안 자고 뭐하냐"고 하신다.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옥수수, 먹으려니 미안해지네그 말에 시간을 보면 아직 자정도 되지 않았고, 어머니는 그렇게 두어 번 화장실을 더 다녀온 후 잠자리를 털고 하루를 시작한다. 아들은 늦게 잔다는 어머니의 그런 지청구가 귀찮아 어머니가 깨어나기 전 잠자리에 들고, 어머니는 아들이 청한 잠을 방해하지 않으려 큰 소리로 걷지 않는다.
옥수수가 삶아질 때 훈기와 냄새만으로 춥기만 한 겨울밤이 푸근해지고, 어릴적 삶은 옥수수를 서로 먹으려고 주먹질을 하던 형제들까지 생각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다. 초등학교 시절 시골에서는 드물게 과외공부를 했던 작은 형은 제 성질 결국 버리지 못하더니 지금은 고물장수를 하고 있고, 두 아들 힘겹게 키우는 여동생은 비정규직으로 애면글면 살고 있으니 나이들어 어쩌다 만나는 자리가 있어도 형제들은 어릴 때처럼 밝게 웃지도 못한다.
지나가는 소리라도 "요즘 어떠냐?" 하고 물으면 "늘 그렇지 뭐"하는 답만 돌아오는 세상이 더럽기도 하다가, "사는 게 다 그렇지" 하고는 체념해 버리는 삶이 평균적 일상이라 더 이상 할 말을 잃고 만다.
옥수수가 노랗게 익어가는 시간이 되면 하나를 꺼내 젓가락을 꿰어 먹는데 출출한 탓도 있지만 그 맛이 기가 막히다. 하룻밤 두어 통이면 허기를 면할 수 있으니 남는 것이 더 많다. 주인을 닮아 옥수수를 좋아하는 개를 위해 두어 통을 더 삶았으니 한밤 중 몰래 먹는 혼자만의 포식은 아닌 것이다. 먹다 남은 옥수수는 내일 아침 충성스런 개의 아침 식사로 쓰이고, 그래도 남으면 낮동안 주인의 간식으로 해결되니 남는다고 미련 둘 일은 아니다.
그런 옥수수였지만 오늘 밤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맛있게 먹기는 하지만 옥수수에게 뭔가 미안한 생각이 든 것이었다. 냉동실에 있는 옥수수는 지난 해 밭에서 수확한 것으로 틀림없는 '강기희 표' 옥수수였지만 이상하게도 공짜로 먹는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옥수수를 위해 한 것이 없었다. 지난 해 봄 호미를 들고 옥수수를 심은 이후 옥수수대를 베어낼 때까지 눈길 한 번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