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8월말, 인도 여행 중 보통 이틀 코스로 잡는 마날리-레 구간을 빠르고 편하게 이동할 욕심으로 비싼 돈을 내고 미니버스를 탔다가, 결국 52시간이나 걸려서 갔던 경험담이다.
마날리에서 레까지 475Km. 한가한 시간대의 경부고속도로 같으면 5시간대 주파도 가능하겠으나, 굽이굽이 히말라야 산자락을 깎아 만든 이 산간도로를 통과하는 데는 통상 이틀이 걸린다.
아침 일찍 마날리를 출발하는 버스를 타고 하루 종일 열심히 달려 중간에서 하룻밤 자고,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또 열심히 달리면 저녁 무렵에 레에 도착하게 된다. 워낙 황량한 지역이라 115km 지점에 있는 '깰롱' 이후에는 민가가 없어, 허허벌판에 세워진 2개의 텐트촌 '사츄' (224Km 지점)나 '빵'(303km 지점)에서 자야 한다.
좀더 빠른 이동을 원하는 사람들을 위해 새벽 2시에 마날리를 출발해서 16시간을 꼬박 달려 오후 6시에 레에 내려준다는 지프나 미니버스 등의 사설 교통수단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것은 날씨와 도로 등 모든 상황이 완벽하게 협조적일 때 가능한 이야기이고 실제로 타 본 사람들 얘기를 들으면 보통 20시간에서 26시간까지 소요된다.
연 이틀 버스를 타는 게 무리일 것 같고 간신히 회복세로 돌려놓은 감기가 텐트에서 자다가 도질 염려도 있어서 500루피 미만이면 가는 지역버스의 2배가 넘는 1200루피를 내고 미니버스를 타기로 했다.
새벽 2시에 출발하는 미니버스를 타기 위해 하룻밤 숙박비를 더 써야 하나 고민하는데 마날리에 머무는 동안 하루에 한 시간씩 한국어를 가르쳐 줬던 숙소 옆 구멍가게 주인 바크쉬(Bakshi)가 '자기가 가게를 2시까지 열 테니 가게에 있다' 가란다.
사실 숙박비보다 더 큰 문제가 새벽 2시에 혼자 어떻게 버스 출발장소까지 오느냐 였는데, 바크쉬의 가게와 출발장소는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이니 모든 문제가 한 번에 풀렸다. 시즌 끝물이라 저녁 10시면 문 닫는 걸 뻔히 아는지라, 많이 미안하지만 고맙게 받아들였다.
체크아웃을 하고 배낭을 바크쉬의 가게에 던져 놓은 후 그간 정든 마날리를 한 바퀴 돌았다. 저녁 무렵 돌아와보니 손바닥만 한 가게에 한 무리의 한국 젊은이들이 들어앉아 바크쉬의 한국어 실력에 놀라고 있다. '안녕하세요' '마날리에 언제 오셨어요?' 정도의 말에 놀라는 걸 보니 바크쉬가 <왕의 남자>와 <대장금> 등 한국영화를 보며 혼자 공부해서 '한복'과 '버선'이라는 단어도 안다는 걸 알면 기절하겠구나 싶다.
'저 분이 저의 선생님입니다'라는 바크쉬의 소개가 있자 모두들 안으로 들어오라고 난리다. 좁은 가게에 나까지 들어가 앉을 상황이 아니어서 바로 옆 피시방에 들어가 놀다가 12시쯤 돌아와 보니 청년 한 명이 아직 안 가고 남아있다. '여기 마약 하는 애들도 있는데, 너무 늦지 않게 그만 들어가라'고 하니 '출발하시는 거 보고 가려고 일부러 남았습니다' 한다. 이 친구가 언제 봤다고 내 출발까지 챙겨주나?
세대와 성별이 다르고 이름이나 직업도 모르지만 여행자의 화제는 끝이 없다. 게다가 간만에 툭툭 부러지는 영어가 아닌 술술 풀리는 한국어로 말할 수 있으니 참 좋다. 한국어를 많이 안다고는 하지만 아직 이 화려한 한국어의 향연에 참여하기에는 무리인 바크쉬에게는 듣기 훈련 시간이니 한쪽에서 얌전히 듣고 있으라고 하고….
'2시 정각에 출발하니 1시 반까지 꼭 나와 있으라'던 당부와는 달리 버스는 2시 10분에야 어둠 속에 모습을 드러내더니, 승객 신원을 일일이 확인하고 짐을 차 지붕 위에 매다느라 2시 반이 되어도 떠나지 못한다.
11명의 승객 중 동양인은 나 하나. 혼자 여행하는 사람도 나 하나. 부부로 보이는 두쌍의 서양인과 시끌벅적한 6명의 이스라엘 청춘남녀들. 각기 자신들의 언어로 숑숑대는 사이에서 하릴없이 눈만 껌뻑거리며 버스가 달리기만 기다리고 있자니… 문득 외롭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한국인 동행을 만들걸 그랬나? 족히 스무 시간은 걸릴 텐데 말 한마디 안 하고 심심해서 어떻게 가나? 차멀미가 나거나 고산병이라도 걸리면?
하지만 창밖에 전송자가 있는 건 나밖에 없지 않은가? 그것도 둘씩이나! 그래, 그만하면 됐다. 어차피 인생에는 여러 스펙트럼이 있다. 저들처럼 긴 여정을 갈이 해줄 사람은 없다 해도 아무런 이해관계 없이 새벽 3시가 가까운 시간까지 나의 출발을 지켜봐 주는 지구인이 두 명이나 있다는 게 어디냐? 그래, 그만 하면 됐다.
지들끼리만 살가운 저 탑승자들도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면 아예 모른척 하지는 않을 거고.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나면… 사실, 그땐 옆에 누가 있어도 별 소용없다. 어차피 그건 이미 인간의 영역이 아니니….
새벽 3시가 다 돼서 드디어 버스가 출발한다. 하품을 참으며 창밖에서 손을 흔드는 바크쉬와 청년의 피곤한 모습이 안쓰럽다.
2008.01.22 10:49 | ⓒ 2008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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