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싱글시대 8

백수 생활 1년간

등록 2008.01.25 10:54수정 2008.01.25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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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참히 짓밟힌 순정

 

S전기를 그만둔 뒤 1981년 1년 동안은 여자와의 만남에서 참패하는 한 해였습니다. 대학입시 공부를 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누가 보아도 나는 실업자였고 백수건달이었던 것입니다. 나는 백수건달로서 마음에 둔 여자들에게 철저히 밀려나고 있었습니다.

 

입시학원에 다녔지만 거기서는 마음에 드는 여자를 발견하지는 못했습니다. 다른 남자 학원생들과 어울려서 술이나 퍼먹으러 다니는 게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술을 마시면서 나는 고등학교 3학년 때 동기생들에게 건넸던 ‘장래의 위대한 소설가 문욱’이라 인쇄된 명함을 건넸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상고를 나왔으며 일류 회사의 인사 담당을 스스로 그만둔 만큼 일반 재수생이나 삼수생과는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J은행에 다니는 친구 임진걸을 찾았습니다. 점심 약속을 한 것입니다. 나는 그즈음 은행에 다니는 고등학교 동기생들과 점심 약속을 하여 만나러 다니는 것을 일삼곤 했습니다. 고등학교 동기인 은행원들은 내가 고교 3년간 가장 강력한 문학도였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으므로 나를 반갑게 대하며 점심을 사주곤 했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꼭 소설가로 데뷔하라고 응원해 주곤 했습니다. 자기도 소설가 친구 한 명 두면 얼마나 좋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만난 임진걸은 뜻밖의 제안을 합니다.

 

“같이 놀러 가지 않을래?”
“놀러? 어딜?”
“은행 동기들이 야유회를 가거든. 여자 동기들도 함께 가는 거야. 너, 소설 쓰는 친구라고 소개할 테니까 같이 가자. 예쁜 여자 동기들도 많거든. 마음에 드는 애 있으면 꼬셔.”

 

나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소년 신문의 일요동화란에 동화를 발표해서 동화작가로 데뷔한 사람이었습니다. 임진걸은 나의 그런 점을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곧 소설가로 데뷔할 것이라고 믿어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야유회 여행지는 경기도 용문산 계곡이었습니다. 그 계곡에서 우리는 밥도 해먹고 노래도 하면서 재미있게 놀았습니다.

그때 나는 한 여자에게 관심이 갔습니다. 그러니까 임진걸의 여자 동기 은행원 가운데서 한 여자였죠. 주미현이라는 여자였습니다. 잔잔한 눈웃음이 매력이었습니다.

 

야유회에서 돌아온 뒤, 나는 은행 근처에서 공중전화로 그 여자에게 전화를 하였습니다.

“임진걸 친구 문욱입니다, 소설 쓰는, 한번 만나죠. 제가 커피 한잔 사겠습니다.”

그러나 그 여자 대답은 차디찼습니다.

“시간이 없어요.”

나는 할말이 막혔습니다.

“그럼 다음에 전화했을 때 시간이 있으면 만나줘요.”

나는 그렇게 엉뚱하게 말했습니다. “그럼 언제 시간이 있지요? 미리 약속하죠”라고 말했어야 옳은데 말이죠.

 

나는 일단 전화를 끊었지만 이대로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주미현은 분명 매력이 있는 여자였습니다. 꼭 사귀고 싶었습니다.

나는 며칠 뒤에 그녀가 근무하는 은행 부근으로 가서 한 번 더 전화를 했습니다.

“주미현입니다.”
“안녕하세요? 임진걸 친구 문욱입니다. 한번 만났으면 합니다. 커피 한잔 하면서 재미난 얘기 좀….”


그러나 그 여자의 대답은 아주 냉랭했습니다.

“내가 왜 만나요? 착각하지 마세요.”

나는 무어라 대꾸하지도 못한 채 그녀가 전화를 끊는 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나는 심각한 굴욕감에 빠져들었습니다. 공중전화에서 나와 포장마차를 찾았습니다. 소주를 병째 마셨습니다. 2홉들이 소주를 세 병인가 병째로 마시고 비틀거리며 집으로 간신히 돌아갔던 기억이 납니다.

 

아마도 딴에는 소설가가 되려고 한다고는 하지만 미래가 불분명한 나를 인정할 수는 없었을 겁니다. 그녀의 눈에 오로지 나는 백수건달로 비쳤을 것입니다. 거기다 머리도 자주 감지 않고 수염도 자주 깎지 않는 내 모습은 그녀에게 작가다운 모습으로 비치지 않고 불결한 모습으로 비쳤는지도 모릅니다. 하여간에 그때는 그렇게 잘 가꾸지 않은 모습이 나의 매력이노라고 착각하고 다녔으니까요.

 

나는 그대로 주저앉자니 너무도 속상해서 한마디 기분 나쁜 말을 하고 마무리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주미현에게 한 번 더 전화를 했습니다.

“네, 주미현입니다.”
“여보슈. 못 생긴 여자가 튕기기는! 네가 뭐 그리 잘났냐?”
“뭐라고요?”
“나 같은 멋진 남자의 호의를 거절하다니! 천벌 받는다! 으하하하하!”
“아니! 뭐 이런 남자가 다 있어?”
“으하하하하!”

그러고는 전화를 끊었습니다. 

주미현과의 만남에서 실패한 뒤 한동안은 여자를 생각하지 않고 지냈습니다.

2008.01.25 10:54ⓒ 2008 OhmyNews
#싱글 #연재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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