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5점. 2008년 1월 25일, 내가 기록한 점수다. 개인적으로 수능 점수보다도 토익 점수보다도 마음에 깊이 남을 점수다. 수능 점수나 토익 점수는 내 개인의 노력에 불과한 것이겠지만, 이 점수는 내 개인이라기보다 많은 이들의 열망과 바람이 가득 담겨 있는 점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체 무슨 점수냐고?
24일자로 오마이뉴스에 ''우리말' 잊고 '영어'만 잘하면 만사형통인가?'이라는 제목으로 내 글이 실렸다. 그리고 이 글이 모 포털사이트 뉴스로 전송된 것이었다. 495점은 바로 그 포털사이트를 이용하던 누리꾼들이 만들어준 추천 점수였다. 기분이 묘했다. 사실 개인적으로 그 포털사이트를 잘 이용하지 않았기에 더욱 그랬다.
잘 이용하지도 않는 포털사이트를 찾아가 내 기사가 실렸는지 확인까지 하게 된 것은 몇 통의 메일 때문이었다. 메일을 열어보니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사람들로부터 메일이 와 있었다. 스팸 메일일까 싶었지만 혹시나 싶어 다 열어보았다. 모두 '고맙다'는 이야기였다.
댓글로 동조한 누리꾼들
대체 뭐가 고맙다는 얘기인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찬찬히 내용을 읽어보니 오마이뉴스에 송고한 내 글과 관련한 이야기들이었다. ''우리말' 잊고 '영어'만 잘하면 만사형통인가?'인가를 읽고서 내용에 공감한다면서 앞으로도 좋은 기사 많이 부탁한다는 내용들이었다. 오마이뉴스에서 활동한 지 벌써 5년째이지만 욕이 아닌 이런 감사하다는 메일의 내용을 받아본 것은 처음인 듯 했다.
당연히 기분이 묘할 수밖에. 그 묘한 기분에 결국 그들 세 명이 모두 모 포털사이트에서 내 글을 보았다기에 그 포털사이트로 달려가 보았다. 내 기사를 검색해 찾아보자 495점이라는 추천 점수가 눈에 확 들어왔다.
어디 그 뿐인가. 무려 188개나 되는 댓글이 달려 있었다. 기뻤다. 댓글이 많이 달려서가 아니라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이 정말 많다는 생각에 기뻤다. 이명박 정부가 내놓은 영어 정책에 대한 글을 쓰고 나서 아버지와 함께 뉴스를 보다가 충격적인 말을 들은 후라 더욱 그랬다.
"너도 나이 먹어도 계속해서 영어 공부 열심히 해야 해. 저 정책이 뭐냐. 지금 어린 애들이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다 영어 잘하겠다는 거 아니야."
아버지께서 이명박 정부에 대해 호의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영어로 전과목을 가르치겠다는 정책에 대해서까지 우호적이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반론을 제기하고 싶었으나 꾹 눌러 참았다.
사실 2002년 대선 때부터 아버지와 나는 정치에 대한 생각이 많이 달랐고, 그 때문에 식사 하는 도중에도 아버지는 아버지 나름대로 언짢은 기분이 드셨고, 나는 나대로 불만스러웠다.
서로 조금씩 이해하려 노력하긴 했지만, 역시 워낙 다른 생각을 하고 있어 되도록이면 민감한 주제는 피해가고자 노력했다. 아버지께서 영어로 교육하겠다는 데 대해 별다른 거부 반응을 보이시지 않자 조금은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반대 의견이 많아도 아버지처럼 우호적인 의견도 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영어로 전과목을 가르치겠다는 계획이 정말 실현될 수도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던 중 몇 통의 메일이 날아들었다. 그리고 그 메일들 덕분에 포털사이트에 실린 내 글에 대한 반응들도 접할 수 있었다. 내 글에 대한 반대 의견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나와 같은 의견들이었다. 그리고 그 의견들을 보면서 한 번 더 다짐을 했다. 비록 내 재주는 없으나 이토록 새로 들어설 이명박 정부에 대한 영어 교육에 대한 반대 목소리를 확실히 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이라도 더 이런 여론을 전달해야겠다는 사명감 같은 것이 생겼다고 할까.
그리하여 이번에는 내 글에 달린 댓글들 중 몇 개를 소개하여 이번 이명박 정부 정책에 대한 우려와 반대의 목소리가 얼마나 큰지 다시 한 번 말해야겠다. 정말 이명박 정부가 국민을 섬기는 정부가 되겠다면 부디 이런 간절한 목소리를 외면해주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기사에 그대로 소개하기에 다소 거친 표현은 다듬었기 때문에 원문과 다소 차이가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 밖에도 많은 글들을 소개하고 싶었지만, 지면 관계상 가장 누리꾼들의 반응이 많았던 댓글 세 개만 골랐습니다.)
이명박 당선인님, 이거 한 번 영어로 번역해주세요.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조지훈 시인의 승무 첫 두 연이다.이거 원문 느낌 그대로 살려서 영어로 완벽하게 번역할 수 있으면 영어강의를 하든 말든 상관하지 않겠다.
일제강점기도 아니고 민족정기 말살인가?
일제 강점기때 학교에서 일본어만 쓰게 했던 거 생각나네. 우리말은 우리나라사람들의 얼이요 얼!! 자기의 언어와 문자를 가진다는 것이 얼마나 긍지를 가질 만한 일인지 모르는가?
저기 인도네시아, 남미, 과거 다른 나라에 의해 침략당하고 식민지가 되었던 나라들 대부분이 라틴어, 불어, 영어 등 침략자들의 언어를 사용하고 자신들의 언어를 잃었는데, 우리나라가 우리의 말을 지켜 온 것은 그에 비하면 자랑스럽지 않은가? 그런데 지금 이 나라 대통령이 될 사람이 저런 소리나 해대다니 앞으로 5년이 걱정이다.
4000만이 영어 잘하면 수출강국이 저절로 되나?
글로벌시대에 영어의 중요성에 앞서 더욱 중요한 건 다양한 분야의 전문인력 창출이 아닌가? 이 정책의 문제점은 영어를 못하면, 수학, 국어, 국사, 지리, 과학 등등 모든 과목을 못한다는 말이다. 어휘력이 떨어지면 다른 분야에 천부적 소질이 있더라도 배움의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정책이다.
대한민국 국민 4000만이 전부 영어만 잘하면 수출이 잘되나? 여러 분야의 전문인력들이 뭔가를 만들어야 팔 거 아닌가? 일본 태생이면 좀 제대로 배우고 오시지 왜 제국주의만 배워와서 요따구 몹쓸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일본이 강대국이 된게 그들이 영어를 잘해서라 생각하나? 일본이 강대국인 이유는 그 저주받은 혀에서 나오는 영어 덕이 아니라 몇 백년을 이어온 장인정신 때문이다. 영어를 잘하면 거의 모든 분야에서 유리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최소한 자기가 하고 싶은 게 뭔지 알 기회는 줘야 하는 거 아닌가? 자신에게 무엇이 맞고 잘하는 게 무엇인지 알고 그 분야에 영어가 필요하다면 하지 말라 해도 자기 스스로 한다.
이토록 많은 이들이 반대하는 영어 과목이 아닌 다른 과목까지 영어로 가르치겠다는 정책을 정말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인가. 최근 인기를 모으고 있는 사극 속 인물들처럼 이명박 당선인 앞에 가서 무릎을 꿇고 수 백 번이라도 절을 하면서 '부디 통촉하여 주시옵소서'하는 심정이다.
그리고 이런 심정은 비단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섬기는 정부가 되겠다면 이 엄동설한에 그 앞에 가서 엎드릴 마음도 있다는 이런 국민의 마음을 모른 척 해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닐까. 제발 그 정책 거두어주시기를 두 손 모아 빌고 또 비는 바입니다. 제발!
참고로 이명박 정부 영어 몰입교육 반대 청원 서명 운동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아래는 주소입니다.
http://agora.media.daum.net/petition/view?id=36939
덧붙이는 글 | 이번 정책에 대해 정말 우려하고 걱정하시는 분이 많은 것 같아 다시 쓰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부터도 정말 걱정이 많이 되니까요.
2008.01.26 08:42 | ⓒ 2008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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