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 날, 우연히 들어간 카페에서는

커피 한 잔, 가야금 소리의 여유

등록 2008.02.03 19:18수정 2008.02.03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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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봄에 본 느리게 봄이 오는 길목에서 우연히 벗과 함께 지나가다 이름이 좋아 찍어 두었던 느리게 모습

봄에 본 느리게 봄이 오는 길목에서 우연히 벗과 함께 지나가다 이름이 좋아 찍어 두었던 느리게 모습 ⓒ 윤병하

▲ 봄에 본 느리게 봄이 오는 길목에서 우연히 벗과 함께 지나가다 이름이 좋아 찍어 두었던 느리게 모습 ⓒ 윤병하
 

“느리게…” 조금은 낮선 그러나 호기심이 들 것 같은 느낌에 들어선 작은 카페. 친구와의 약속을 거듭 확인하고 시계를 들여다 보았다. 아직은 친구가 도착할 시간이 남아서 망설이기를 몇 분. 어쩐지 혼자 들어가기에는 민망할 것 같아 카페 문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a 카페 앞 전경 겨울이라서 인지 앙상한 모가나무가 입구를 지키고 있다.

카페 앞 전경 겨울이라서 인지 앙상한 모가나무가 입구를 지키고 있다. ⓒ 윤병하

▲ 카페 앞 전경 겨울이라서 인지 앙상한 모가나무가 입구를 지키고 있다. ⓒ 윤병하

 

겨울 장대비가 내리 친다. 지나가는 택시도 손님을 기다리기보다는 비가 그치기를 기다린 듯 움직임이 없다. 한낮의 적막함이다. 빗소리만 요란하다. 지나가는 사람들 조차도 입은 옷이 젖어드는 것을 피할 수 없어서인지 떨어지는 빗줄기에 외투를 뒤짚어 쓴다.

 

어디로 가야할까? 보통 때 같으면 아무런 망설임 없이 들어갈 수 있었던 카페가 눈앞에 있음에도 발길이 영 떨어지지 않았다. 창문 안쪽은 검푸르게 채색된 유리창에 쌓여서 들어다 볼 수가 없다. 그냥 들어가기에는 너무나 옷이 젖어서 어쩐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밖에서 기다리면서 시계 보기를 몇 번. 비가 멈추기만을 바라며 하늘을 바라보았지만 검은 구름은 쉬 자리를 떠날 것 같지도 않았다.

 

수건 하나가 문틈으로 밀고 나왔다. 그리고 주인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왜 그러고 서 계세요. 들어와서 기다리세요” 반가움이 묻어나는 목소리였지만 미안함이 더 세게 짓눌렀다.

 

‘그래, 그냥 들어가면 될 것을…’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밖에서 손님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습이 오히려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뿐. 밖에서 떨어지는 빗줄기만큼이나 온몸을 타고 내려오는 빗물은 어느 새 서 있는 자리를 흥건하게 만들어 버렸다. 겨울비가 무섭다는 생각이다.

 

온몸을 추스를 수 있을 만한 또 한 장의 커다란 수건이 나에게 전해졌다. 주인님의 배려다. 모든 것에 익숙해진 듯해 보이는 주인님의 배려에 구석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긴장이 풀리자 온몸이 떨려왔다. 떨어지는 물줄기를 한동안 훔쳐내자 따스한 기운이 감돌았다.

 

따뜻한 물 한 잔을 마시자 온몸이 풀리면서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찾아왔다. “기다리는 친구는 어떻게 되었을까? 혹시 비 때문에 오기를 포기한 것은 아닐까?” 여러 가지 상념이 스치고 지나갈 무렵 나와 똑같은 형색을 하고 친구가 들어섰다.

 

주인님의 익숙한 손놀림은 이미 친구에 마음을 읽고 있는 걸까! 똑같은 행동이 반복되었지만 친구는 여유롭게 주인님의 배려를 받아들였다. 잠시 후 메뉴판이 눈앞에 놓이자 친구는 카프치노 커피를 주문했다. 우린 같은 커피를 마시며 감미롭게 목을 감고 도는 카프치노 커피 향에 비로 처진 몸을 간신히 추스렀다.

 

커피를 무척 즐겨 마시는 친구는 오늘도 커피 향에 매료되어 말이 없다. 한참을 기다린 후에도 친구의 대답은 ‘향이 참 좋구나’가 전부였다. 지루하다 싶을 무렵 어디선가 빗줄기에 장단을 맞추듯이 가야금 소리가 들려왔다.

 

천상의 소리일까.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는 ‘비 오는 날의 가야금 소리’. 그러나 그것은 관념의 이야기일 뿐, 이미 마음은 가야금 소리에 젖어들고 있었다. 한이 서린 듯한 가녀린 목소리와 어울린 그녀의 가야금 장단은 40여평의 조그마한 카페를 한순간 사로잡아 버렸다.

 

a 가야금 치는 여인 기야금에 맞추어 부르는 여인의 목소리는 한을 토해 낸듯.

가야금 치는 여인 기야금에 맞추어 부르는 여인의 목소리는 한을 토해 낸듯. ⓒ 윤병하

▲ 가야금 치는 여인 기야금에 맞추어 부르는 여인의 목소리는 한을 토해 낸듯. ⓒ 윤병하

 

박수소리가 조심스럽게 이어졌다. 분위기를 이어가기를 바라는 작은 바람이 일렁거렸다. 정확히 무슨 곡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미 카페는 작은 음악회가 되어가고 있다. 주인님의 가야금 소리는 이미 아마추어가 아닌 듯 손놀림은 힘차기도 하고 때론 가냘프기도 했다.

 

도심 속의 음악이 있는 카페. 그것도 현대적 건축 공간에서 현대 음악이 아니라 흔히 들을 수 없는 가야금 연주를 직접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흔치 않는 행운 같았다. 주변의 분위기와 테라스의 전경 때문에 그곳에 종종 들리곤 했지만 오늘 같은 우연은 처음이었다.

 

교육의 도시 순천의 콘크리트 도심 속에 가야금 연주를 들을 수 있는 작은 카페가 있다는 사실이 마음 한편을 곱게 물들였다. 그래 ‘나만 알기에는 너무 이기적일지도 모른다’ 순천에도, 그것도 우리가 일상으로 살아가는 도심 중앙에 비오는 날 들을 수 있는 가야금 소리가 있다는 것은 행운임에 틀림없다. 이런 저런 생각이 머리를 정리할 쯤 빗소리도 잠시 숨을 고르고 있었다.

 

‘느리게…’ 뒷 글자가 없다는 것이 오히려 묘한 호기심을 자극했다. 가만히 뒷 글자를 이어보지만 카페와 어울릴 만한 적절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 그냥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자. 의미를 둔다는 것은 또 하나의 구속이 된다는 생각을 남기며 계산대로 향했다.

 

진한 커피 향과 가야금 소리를 가슴에 안고 일상으로 돌아오면서도 가야금 소리의 여운은 마음 저편에 자리 한 듯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한다. 오늘은 참 운이 좋았다고 서로에게 무언의 말을 남기면서….

2008.02.03 19:18ⓒ 2008 OhmyNews
#느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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