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의 대물림이 이어질 수밖에 없지요

[누가 이 나라를 지켰는가 24] 광주 - 양진여 양상기 부자 의병장 (1)

등록 2008.02.05 09:23수정 2008.02.16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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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 형제 의병

한말 호남 의병사를 넘기다 보면 옷깃을 여미게 하는 대목이 많다. 순천대 홍영기 교수가 쓴 “부자 형제의 의병 참전”이라는 글에 보면, 호남 의병 가운데는 부자 형제 의병들이 많았다고 한다. 앞에서 소개한 김태원(金泰元) 김율(金聿) 형제 의병장, 김원국(金元國) 김원범(金元範) 형제 의병, 쌍산의소(雙山義所)를 주도한 양회일(梁會一) 양회룡(梁會龍) 형제 의병들이 있고, 부자 의병도 많았다고 한다.

호남창의회맹소에서 활약한 후군장 이남규(李南奎) 이정섭(李丁燮) 부자가 있었는데, 대체로 자식된 도리로서 아버지의 안위(安危)를 걱정하여, 아버지와 아들이 같은 의진(義陣)에서 활동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전한다.

안규홍 의병부대에서 활약한 임창모(林昌模) 임학순(林學淳)은 보성 출신으로, 부자가 한꺼번에 보성 묵석산 골짜기에서 동시에 순절하였다고 한다. 광주의 양진여(梁振汝) 양상기(梁相基) 부자도 모두 일제 군경에 체포되어 같은 대구형무소에서 두 달 사이로 교수형을 당한 부자 의병장이었다.

a  양진여 양상기 부자 의병장 묘소(광주 서구 백마산)

양진여 양상기 부자 의병장 묘소(광주 서구 백마산) ⓒ 박도


항일로 한 집안이 쑥대밭이 되다

송정리역 앞 밥집에서 서둘러 점심을 먹은 뒤, 약속 장소인 전남도청 앞 금남로 황금다방으로 찾아갔으나, 그 일대가 교통체증으로 도저히 주차할 수가 없었다. 오용진씨는 하는 수 없이 손전화로 양일룡(80)씨를 거리로 불러 곧장 차에 태우고, 그대로 백마산(白馬山) 부자 묘소로 달렸다. 양일룡씨는 우리에게 점심과 차를 대접한 뒤, 묘소로 가려고 계획을 세운 모양인데, 이미 우리는 점심도 먹었거니와 교통 체증과 주차 때문에 금남로에서 대접받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오용진 양일룡 두 분은 선대의 인연으로 서로 쌀뒤주 형편까지 아는 사이라, 오용진씨는  백마산 부자 묘소 위치도 잘 알고 있었다. 오용진씨는 다음 주에 순국선열유족회가 주최하는 큰 행사가 있기에, 그 준비로 다음날 서울 사무소에 출근으로 일정을 빨리 끝내야 할 처지였다. 그 사정을 아는 나는 시간 절약을 위해 묘소로 가는 차중에서 이런저런 집안 이야기를 묻고 들었다.


a  대구감옥에 수감 중인 호남 의병장들(뒷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양진여 의병장이다).

대구감옥에 수감 중인 호남 의병장들(뒷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양진여 의병장이다). ⓒ 박도


할아버지 양진여 의병장은 3남1녀를 두었는데, 맏아들 상기는 의병장으로 젊은 나이에 순국하여 후사(後嗣)가 없었다.

또 당신 부인 박순덕(朴順德) 여사와 둘째 아들 병수(秉洙)는 일제의 모진 고문으로 폐인이 되어 병수는 후손도 없고, 셋째 병공(秉公 양일룡씨 생부)이 다행히 후손이 있어 출계로 대를 이었다고 한다.


양진여 의병장 막내 동생 서영(瑞永)씨도 의병 투쟁을 하다가 3년 유배형으로, 충남의 한 섬에서 귀양살이를 하였다고 하니, 온 집안이 항일을 한 탓으로 그야말로 쑥대밭이 되었으며, 일제가 빨리 망하는 바람에 겨우 멸문(滅門)의 화만은 면했다고 속 깊은 얘기를 말씀하셨다.

항일 유족들은 잘 사는 사람들이 없다

양일룡씨는 서예 학원을 다니면서 망월동 공원묘지와 영락공원 묘지 비석글씨도 10여 년간 쓰면서 입에 풀칠을 간신히 하였고, 광복회 전남 사무국장을 하였으나, 오래 전에 후배에게 물려줬다고 했다.

나뿐 아니라, 항일 유족들은 잘 사는 사람들이 매우 드뭅니다. 복이 없으니 잘 살 수가 있겠습니까? 친일파들은 유산을 많이 물려받았을 테지만, 의병이나 독립투사 후손들은 왜정시대 목숨 부지하기도 어려웠습니다. 의병들 가운데는 후손도 없이 대가 끊어진 집안이 숱하게 많습니다.

겨우 살아남은 유족들은 재산도 물려받지 못하였고, 많이 배우지를 못하였으니 가난할 수밖에 없지요. 거기다가 조상의 강직한 성격은 물려받아 불의와 타협할 줄 모르니, 가난의 대물림이 이어질 수밖에 없지요. 저도 많이 못 배웠지만 제 자식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였습니다.   

양진여 양상기 부자 의병장 묘소는 지난날은 광산군 서창면 매월리였지만, 광주광역시로 편입되고는 서구 매월동 산191로, 백마산 양지 바른 곳에 부자의 묘소가 아래위로 자리 잡고 있었다.

“여기만 오면 마음이 편해요.”

a  양일룡씨

양일룡씨 ⓒ 박도


요즘은 전보다는 뜸하지만 몇 해 전까지도 낮이면 이곳에서 살다시피 나무도 가꾸면서 묘소를 돌봤다고 한다.

우리 일행은 두 분 의병장 묘소에 엎드려 절을 드린 뒤 하산했다. 오용진씨가 집으로 돌아간다니까 나도 집을 떠난 지 나흘이 지나 몸도 근질거리고, 집에 가고픈 생각이 불같이 일었다.

그동안 여러 의병장을 취재하였다. 더 욕심을 내다가는 헷갈릴 것 같아  일단 3차 취재는 그날로 마무리하였다.

막상 내 집으로 돌아오자 양진여 양상기 부자 의병장 취재가 부족한 듯하여 마음이 몹시 불편하였다.

내가 사는 강원 산골로 양일룡씨가 몇 차례 전화도 주고, 자료도 우송해 주셨지만, 그래도 내 마음이 편치 않아 다시 광주로 내려가 찻집에서, 광주시민공원에서 두 차례나 양일룡씨를 더 만난 끝에 이 기사를 쓰고 있다. 학문도 얕고, 필력도 부족한 사람이 정성으로나마 거룩한 분들의 그림자나 좇고자 함이다.
#의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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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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