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떠나간 자리에는 '기억'이 남는다.
조국 독립과 민족 정기 바로세우기에 평생을 바치신 조문기 선생이 5일 오후 5시 세상을 떠났다. 향년 81세.
5일 밤 9시 서울 혜화동 서울대병원 영안실. 선생의 빈소는 예상 외로 조용했다. 선생의 사위 김석화씨는 "빈소를 차린지 얼마되지 않아 조문객이 아직 많지는 않다"고 말했다. 평생을 '동지'로 살아온 부인 장영심 여사는 보이지 않았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오래도록 만성당뇨병을 앓아오던 장 여사는 최근 합병증까지 도진 데다 선생을 오랫동안 간병하느라 몸이 많이 상해 이날 영안실에 자리하지 못했다고 한다.
"사실 어머님은 벌써 입원하셨어야 했는데 아버님을 간병하시느라 못 하셨습니다. 원래 허리가 꼿꼿하셨던 분인데 지금은 허리도 휘고 걷지도 못하시는 상태십니다."
선생은 지난 2006년 11월 혈액암 진단을 받은 뒤 요양병원에 장기입원 중이었다. 선생은 돌아가시기 전 10일 전부터 간병 중인 부인을 한시도 떼놓지 않으려 했다고 한다. 이를 보고 임시정부 국무위원 비서장 차리석 선생의 아들 차영조 선생이 "선생님 부인 몸 망가지면 다시 오시지도 못한다"면서 반농으로 타박을 하자 선생이 눈물을 보이셨다고 한다. 그때 이미 앞을 내다보셨던 것일까.
유종하 광복회 경기도지부 수원시 지회장은 그날을 떠올리며 "그때는 선생님이 이렇게 빨리 돌아가실 줄 아무도 몰랐지"라며 말끝을 흐렸다.
"친일파가 득세하는 나라, 분단된 조국을 보려고 독립운동 했나"
선생은 1945년 '부민관 폭파 의거'의 주역으로 지난 1982년 '건국포장'을 받은 다음 해부터 '광복회 독립정신 홍보위원회' 홍보위원이 되어 전국 순회강연을 다녔다. 1999년에는 민족문제연구소 2대 이사장에 취임해 "친일청산이 오늘의 독립운동"이라는 신념으로 '친일인명사전' 편찬에 온 힘을 쏟았다.
지인들은 그런 생전의 조문기 선생을 '부끄러워 하는 독립지사'로 기억했다.
김종대 전 독도수호대 대장은 "선생은 중절모를 벗지 않으셨다"고 말했다.
"선생님께서 해방 이후 정부의 초청을 받아 가셨는데 일제 때 앉아있던 친일파 녀석이 똑같은 자리에 앉아있는 것을 보시고 '하늘로 간 동지들을 볼 면목이 없다'며 그 때부터 밖을 나서실 때 중절모를 벗지 않으셨어. 내가 딱 한 번 '중절모를 벗어볼까'라는 말씀을 들은 게 '친일인명사전' 편찬이 결정된 이후였는데, 결국 '친일인명사전'이 나온 후에 보시겠다며 안 벗으셨지."
서우영 민족문제연구소 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기획실장도 "선생님은 평양에도 초청받으셨는데 부끄럽다고 거절하신 분"이라고 말했다.
"선생님은 항상 '독립운동을 해서 뭐를 이뤘나. 친일파가 득세하고 있는 나라, 분단된 나라인데 부끄럽다. 나라에서 주는 연금도 받기가 부끄럽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 모습이야말로 이 나라의 독립운동가의 모습 중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선생은 광복회 민주화에도 헌신했다. 박정희 정권은 한일협정을 체결한 1965년 취약했던 명분을 세우고 자신의 친일 전력을 숨기기 위해 원호처(현 국가보훈처)와 광복회를 만들었다.
덕분에 광복회는 친일인사의 후손과 항일인사의 후손들이 한 테두리 안에 공존하는 왜곡된 형태로 운영됐다. 실제로 광복회는 지난 2002년 '민족정기의원모임'이 친일파 708명의 명단을 공개할 때 김활란 이화여대 초대 총장, 김성수 전 <동아일보> 사장, 방응모 전 <조선일보> 사장 등 16명이 명단에 들어갔다며 기자회견에 불참했다.
유종하 지회장은 "선생님은 광복회 내부의 '역적'으로 취급당했다"고 말했다.
"선생님을 87년인가 88년에 만나 독립운동가 유족 친목회를 만들기 시작했어. 수원을 기점으로 성남, 안양, 군포, 안성, 평택 … 계속 늘어갔지. 선생님은 항상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이 선조의 정신을 잇기는커녕 힘겹게 살아가는 것을 안타까워하고 광복회가 비민주적으로 운동하고 임시정부의 법통을 잇지 않는 것을 앞장서서 비판하셨지. 광복회 민주화에 씨앗과 밑거름이 되신 분이야."
그의 독립운동은 언제나 '현재진행형'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선생을 그리워하는 것은 그 분의 뜻이 고결하고 행동이 곧바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기억 속의 선생은 따뜻했고 사랑으로 가득했다.
이름 밝히기를 꺼리는 한 인사는 "아버님(선생을 지칭)은 누군가가 싫은 모습이 보여도 질책하지 않으시고 타이르시며 모든 것을 포용하셨다"며 "그 분의 성품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더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또 "2월 2일 오후 4시에 의식이 있을 때 마지막으로 '집사람 집사람 건강 건강'을 되뇌셔서 평생 곁을 지키신 부인에 대한 애정도 느낄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유종하 지회장도 "선생님은 연금을 타러 가는 날이면 날 데리고 민족문제연구소로 가셔서 30~40명 되는 직원들 점심 먹이는 것을 좋아하셨다"며 이제 다시 그럴 수 없음을 슬퍼했다.
서우영 실장은 선생을 모시고 화석정(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율곡리 임진강변에 위치한 조선시대의 정자-편집자주)에 간 일을 반추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화석정에서 선생님과 매운탕을 시켰습니다. 저는 매운 것을 좋아하거든요. 제가 먹고 있는데 선생님은 반찬만 드시고 매운탕에는 손도 안 대시더라고요. 알고 보니 선생님은 단 것은 좋아하시는데 매운 것은 못 드시는 겁니다. 나이도 지긋하신 분이 뭐라고 한 말씀 할 만도 한데 아무 말씀 없으셨지요. 그저 제가 먹는 것을 흐뭇하게 보셨을 뿐…."
그리고 그는 "앞으로 선생님이 소원하시던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마무리 짓는 일, 민족 정기를 되살리는 문화사업 등 해야 할 일이 많다"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의 독립운동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고 말했던 선생의 장례식은 '겨레장'으로 치러질 예정이다. 7일장이며 발인은 11일이다.
아직 향로에 올려진 향의 수는 많지 않았지만 밤 11시가 훌쩍 넘어가는 시간에도 5명의 조문객이 찾아와 선생께 절을 올렸다. 5일 늦은 밤 '어른'이 떠나간 자리에는 '그의 뜻과 정을 가슴에 담은 사람'들이 있었다.
2008.02.06 12:20 | ⓒ 2008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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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5월 입사. 사회부·현안이슈팀·기획취재팀·기동팀·정치부를 거쳤습니다. 지금은 서울시의 소식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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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은 부끄럽다며 중절모를 쓰고 다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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