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왕세종>, 명나라행을 거부한 조선의 여인들

[사극으로 역사읽기]

등록 2008.02.09 11:12수정 2008.02.09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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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나라 칙사 황엄(위)과 통역관. <대왕세종>에서
명나라 칙사 황엄(위)과 통역관. <대왕세종>에서KBS

최근 방영된 <대왕세종> 제10회에서는 명나라 칙사 황엄의 고압적 태도로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는 장면이 묘사되었다. 드라마 상의 시점은 태종 9년(1409)인 것으로 보인다.

칙사 황엄은 1만 마리의 군마 외에 처녀 조공도 함께 요구했다. 그런데 이런 일이 한두 번 있었던 게 아니다. 그로부터 1년 전인 태종 8년(1408)에도 황엄이 조선에 와서 처녀 조공을 요구한 적이 있었다. 이때 열린 전국적 처녀 심사에서 5명이 최종적으로 선발되어 황엄과 함께 명나라로 가게 되었다. 

인권 개념이 발달하지 않은 당시에는, 그렇게 뽑힌 처녀들은 명나라 황제에게 진헌될, 일종의 '상품'으로 간주되었다. 군마 기타의 상품과 함께 조선 국왕이 명나라 황제에게 제공하는 상품으로 간주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조공무역의 일환으로 처리되었다. 그에 대한 대가로 명나라에서는 회사(回賜) 형식의 답례품을 지급하였다.

처녀들이 상품으로 간주되었다면, 처녀 1명당 얼마씩 하는 식으로 가격이 매겨지지는 않았을까? 그렇지는 않았다. 이는 다른 상품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에서 어느 정도의 조공품을 제공하면 명나라에서도 어느 정도의 회사품(回賜品)을 지급한다는 식이었다. 개별 상품의 가격을 일일이 매긴다는 관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너희가 이만큼 주었으니 우리도 이만큼은 답례하겠다는 식이었다. 상호 간에 일종의 '성의 표시'란 관념이 존재한 것이다. 이것은 '포괄적 물물교환'이라고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물물교환의 일환으로 명나라에 파견된 것이라면, 그 처녀들의 신세가 혹 고달프지는 않았을까? 물론 고향과 가족을 떠나 외국에 가서 살게 되었다는 점에서는 그들의 삶이 고달팠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이 명나라에 가서 대개 후궁에 봉해진 점을 보면 육체적으로는 그다지 힘들지 않았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태종 9년(1409) 5월에 조선을 다시 방문한 황엄이 구두로 낭독한 명나라 황제의 유지에 따르면, 태종 8년에 선발된 그 5명은 미모에 따라 비·미인·소용 등의 후궁에 봉해졌다고 한다. 조선 처녀들은 조선 국왕이 명나라 황제에게 제공하는 조공품이라는 지위를 띠고 있었기 때문에 명나라측에서도 그들을 함부로 다룰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고향과 가족을 떠나는 고통을 감내해야 하긴 했지만, 명나라 칙사에게 선발된 조선 처녀들은 일단 명나라 황제의 후궁이라는 높은 신분을 향유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의 명나라가 군사적 최강국임은 물론이고 경제적으로 세계 정상급의 무역흑자국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명나라 황제의 후궁이 된다는 것은 개인으로 보나 가문으로 보나 분명히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고려시대 때에 몽골 황실에 딸을 시집보낸 기씨 집안을 생각하면, 명나라 황실에 딸을 시집보낸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로 말하면, 백악관에 자기 딸을 시집보내는 것에 비유될 만한 일이었다.


그럼, 당사자인 조선 처녀들과 그들의 가문에서는 이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갖고 있었을까? 조선 왕실보다도 더 높은 명나라 황실의 외척이 될 수 있는 이 기회를 그들은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을까? 태종 8년(1408) 명나라 칙사 황엄 앞에 선 조선 처녀들의 태도를 보면 당시 조선인들이 이 문제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태종 8년 7월 2일의 처녀 심사장으로 가보기로 한다. 의자에 앉은 황엄의 심기가 매우 뒤틀려 있다. 왜 그럴까? 세 명의 처녀 때문이다.

황엄이 이따금씩 처녀들의 얼굴이 마음에 안 든다며 '깽판'을 친 일이 있지만, 이 날 황엄이 화를 낸 것은 꼭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자국 황제의 후궁이 될 수도 있는 이 엄청난 '행운'에 대처하는 조선 처녀들의 자세 때문에 그는 화가 치밀어 오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 날, 평성군(平城君) 조견의 딸은 마치 중풍에 걸린 사람처럼 입이 돌아간 모양을 하고 있었다. 이조참의 김천석의 딸은 중풍에 든 사람마냥 머리를 마구 흔들어대고 있었다. 전 군자감(軍資監) 이운로의 딸은 무슨 병에 걸린 사람처럼 다리를 절룩거리고 있었다.

안 그래도 처녀들의 외모가 마음에 들지 않아 화가 나 있던 차에, 입이 돌아가고 머리를 흔들어대며 다리를 절룩거리는 처녀들의 모습을 보자 황엄은 더욱 더 화가 치밀어 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드라마 <대왕세종> 제10회에서는 조선을 무시하는 황엄의 태도에 격분한 양녕대군의 모습이 방영되었다. 실제 역사 속의 황엄 역시 명나라를 무시하는 듯한 처녀들의 태도에 격분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조선 왕실은 명나라 황실의 무시를 받고, 명나라 황실은 조선 처녀들의 무시를 받은 셈이다.

그 여자들이 처음부터 몸이 불편했는지 여부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이 풍경을 통해 당시의 조선 여인들이 명나라의 황제의 후궁이 되는 일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음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또 최종적으로 선발된 여자들이 명나라로 갈 때에 길거리에서 통곡 소리가 끊이지 않은 점을 통해서도 그러한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의 조선인들은 그것을 결코 영광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우리는 '조선 전기는 명나라에 대한 사대주의가 가장 극심했던 시기'라고 인식하고 있다. 물론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다. 이성계와 그의 후손들로 이루어진 조선 왕실은 분명히 명나라에 대해 한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정통성이 약해 내부적 도전에 직면한 그들은 명나라에 의존해서라도 권력을 연장하고 싶어 했던 것이다.

그런데 조선의 사대부나 일반 평민층에서 명나라 황실에 자기 딸을 시집보내는 것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었던 점을 보면, 조선 전기의 일반 사회에 존재한 대(對)명 사대주의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리 심각하지는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과 명나라 사이에는 강한 정서적 이질감이 존재했던 것이다. 

그럼, 명나라 칙사 황엄 앞에서 '황제의 후궁 되기를 몸으로써 거부한' 조견·이운로·김천석의 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실록에서는 그 세 명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알려주지 않는다. 그 대신, 그들의 아버지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잘 알려주고 있다.

"사헌부에서 조견 등이 딸을 잘못 가르친 죄를 탄핵하고 관리를 보내 그들의 집을 수직(죄인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경계를 서는 일)하게 하였다. 조견은 개령에, 이운로는 음죽에 부처(付處, 유배의 일종)하고 김천석은 그 직무를 정지시켰다."
#대왕세종 #대왕 세종 #황엄 #처녀 조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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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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