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비행장에 도착한 미군정 수뇌부, 왼쪽 두 번째부터 군정장관 딘 소장, 통역관, 유해진 제주도지사, 맨스필드 제주군정장관, 안재홍 민정장관, 송호성 총사령관, 조병옥 경무부장, 김익렬 9연대장, 최천 제주경찰감찰청장, 이날 제주에서 개최된 회의에서 조병옥 경무부장과 김익렬 연대장 사이에 육탄전이 벌어졌다(1948. 5.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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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극적인 대량 참극은 아이러니하게도 일제로부터 해방된 둘째 해인 1947년 3·1절 기념행사에서 비롯된다. 물론 당시는 대한민국이 없던 미 군정 치하였다. 해방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그 해 3·1절 기념식에는 무려 3만의 제주도민이 참석했다. 당시 제주도는 전국에서 가장 진보적인 성향의 지역이었다. 해방 후 이방을 떠돌던 6만 명의 해외 유입 인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념식이 파할 무렵 일부 군중들이 “통일조국전취”를 외치며 대로로 나섰다. 이때 난데없이 경찰의 총성이 울린다. 이것은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다. 이 무모한 발포로 인해 관덕정과 도립병원 앞에서 6명이 사망하고 8명이 중경상을 입게 된다.
닷새 후인 3월 5일, 3·1 사건 대책 남로당 제주도위원회가 결성된다. 이어서 3월 10일에는 제주도청을 시작으로 일제 때에도 전례가 없었던 민·관 총파업이 이루어진다. 제주도 전체 직장인의 95%가 참여한 파업이었다. 이것은 당시 군정의 사후 대책이 얼마나 미흡하고 부당했는지를 명백한 반대급부로 일러준다.
다시 일주일 뒤인 3월 12일에는 경무부 최경진 차장(경무부장 조병옥)이 제주 파업 사태를 언급하면서, “원래 제주도는 주민의 90%가 좌익 색채를 가지고 있었다”고 발언한다. 이것은 어마어마한 매카시즘이었다.
그러나 이로부터 1년 동안은 그 다음의 참상에 비한다면 그리 많은 희생자가 난 것은 아니었다. 당국이 어느 정도 단속과 선무(宣撫)를 겸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새로 내도(來島)한 반공단체 서북청년단에 대한 불만이 차츰 고조되어 가고 있기는 했다.
불행히도 1948년 3월 14일 모슬포 지서에서 청년 양은하의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한다. 이를 보고 받은 남로당 제주위원회에서는 ‘단정반대’의 행동목표와 ‘무장투쟁’의 행동강령을 최종 확정한다.
한편 이런 제주도민의 분위기에는 아랑곳하지 않은 이승만은 3월 28일, 방한한 미 육군성 드레퍼 차관에게 제주도를 미군 군사 기지로 제공할 용의가 있음을 피력한다.
이에 남로당 제주도당은 회합을 갖고 무장 투쟁 개시일을 4월 3일로 확정지었다. 급기야 4월 3일 새벽 2시, 350명의 제주도 남로당 무장대가 도내 12개 지서와 우익 인사의 집을 습격한다. 이어 미 군정장관 딘이 극비리에 제주도를 방문한다. 직후 김정호 제주 비상경비사령관은 “밤 8시 이후 통행금지 위반자는 사살하라.”는 섬뜩한 명령을 내리게 된다.
5월이 되도록 사태가 진정되지 않자 미군 수뇌부는 “무장대를 총공격하여 사건을 단시일 내로 해결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6월 2일에는 제주 주둔 미군 사령관 브라운 대령이 “제주도의 서쪽에서 동쪽까지 모조리 휩쓸어 버리는 작전을 진행시키고 있다”고 밝힌다.
이윽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출발한다. 도민들의 불안감은 적중하여 닷새 후인 8월 20일에는 800명의 경찰이 제주도에 증파된다. 이승만은 법조문에도 없는 계엄령을 반포하여 무자비한 토벌작전을 감행한다. 결과 사태는 일단 진정 국면으로 들어선다. 해안 5km 이상의 중산간 지대 마을이 모두 토벌의 표적이 되어 무도하게 가옥이 불살라지고 최소 1만2000명 이상의 주민이 다 죽어나간 후였다.
1950년 5월 30일에는 제주도 국회의원 선거가 무사히 치러진 것으로 보아 항쟁은 거의 진압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동안의 피해는 실로 무자비했다. 한국전쟁 발발 직전 시점에 도지사가 발표한 인명 피해자가 3만 명에 이를 정도였던 것이다. 1000명 이하에 불과한 무장대원을 진압하기 위해 수만 명의 양민을 무차별로 희생시킨 것이었다.
제주도민을 두 번 죽인 한국전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