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바보가 대중문화계를 주름잡고 있다는 매체담론이 많은 사람들의 눈에 어른거렸다. 예를 들면 '바보들이 스크린에 몰려온다'는 것 등이다.
우선, 영화 <대한이, 민국씨>(2월 14일 개봉), <바보>(2월 28일 개봉)를 들 수 있다. <대한이, 민국씨>는 주인공들의 사랑과 야망을 다룬 슬랩스틱 코미디다.
<바보>는 강풀 원작만화로 차태현과 하지원 주연으로 주인공의 홀로서기와 사랑을 다룬다.
영화뿐만 아니라 드라마에도 바보가 등장한다고 한다.
3월 방영 드라마 <우리 집에 왜 왔니>는 정준하, <온에어>에서는 김하늘이 7살 정신 연령에 멈춘 캐릭터를 연기한다.
이렇게 등장하는 이유에 대해서 당연히 현대생활의 각박함이 순수한 바보들을 불러일으킨다고 분석하겠다. 그런데 이 바보들이라는 단어를 보면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바보들은 바로 장애인들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언급한 영화와 드라마의 주인공들은 모두 지적 장애인이나 발달 장애인들이다. 장애인을 바보로 표현하니 씁쓸할 수밖에 없다.
연기자들은 장애인 연기를 통해 도약을 하려 하겠지만, 장애인이 수단이 된다면 좋은 일은 아니다. 더구나 그들의 실제 삶보다는 그들의 전인격이 감동과 웃음을 위해 전적으로 쓰인다면 더욱 그렇다. 이럴 때 한꺼번에 이러한 작품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반길 일만은 아니다.
요즘 바보의 의미는 단지 지적 능력이 다른 이들보다 뒤지는 사람만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정직한 사람이 바보다. 정직한 사람을 불편해하는 사회다. 그들은 갈등과 분란을 일으키는 존재가 된다. 조직에서 성과와 결과물을 위해서 속이는 일에 관해 무감각해질수록 더욱 바보들은 살아남을 수 없다.
또한 우직한 사람이 바보다. 올해는 무자년 쥐의 해다. 이제 쥐와 같은 캐릭터가 각광을 받는다. 쥐는 옥황상제가 열두 띠를 정할 때 소의 머리 위에 타고 가다가 결정적일 때 폴짝 뛰어서 일등이 되었다.
소같이 우직하게 전진하는 이보다 쥐처럼 남의 노력에 기대어 결정적일 때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이가 선호되는 풍토가 생겼다. 소에게는 바보라는 딱지가 붙는다. 조직에 우직하게 남아있는 이들은 이제 선망이나 존경이 아니라 바보가 되었다.
하지만 ‘지우이신(至愚而神)’이라고 했다. 어리석음이 도의 경지에 이르면 세상을 바꾼다. ‘우공이산’이라고도 했다. 영리한 이들은 세상에 재빠르게 영합하지만, 바보들은 세상에 관계없이 자기 일을 하며 세상을 자기에게 맞춘다. 결국 세상을 조금이나마 바꾸는 것은 바보들이다. 세상에 재빨리 맞추기만 하면 세상을 바꾸지는 못한다. 거꾸로 재빠른 쥐의 움직임을 보면서 소가 움직일 때다.
사람들은 자기와 다른 사람들을 바보라고 한다. 개성과 창의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일수록 바보는 많아진다. 이럴수록 사회는 다양화되지 못하고 역동성과 활력을 잃어간다. 만약 바보들만이 있는 곳에서 영리한 이들이 오히려 바보일 것이다.
또한 바보는 단순히 백치가 아니라 경험과 그에 따른 통찰이 많은 사람만이 구가할 수 있는 경지다. 그래서 수많은 성인(聖人)과 현자들이 바보철학의 경지를 말했다. 이기적이고 위선적인 사회에 대항한 예수의 힘은 단순성과 정직성이었다.
김수환 추기경은 자신의 자화상을 '바보야'로 이름 붙였다. 운보 김기창은 자신의 산수화를 ‘바보산수’라고 했다. 신영복은 바보 철학이 세상을 바꾼다고 했다.
그런데 대중문화 속 작품들은 하나같이 지적 장애 혹은 발달 장애인을 수단화하는데 치중하고 만다. ‘무한도전’의 바보들은 진짜 바보가 아니다. 왜 일까?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 맞는 ‘바보철학’에 대한 궁구(窮究)가 없기 때문은 아닐까.
2008.02.11 11:26 | ⓒ 2008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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