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0m 산 속에서 속옷만 입고 잠을 자다니

[백두대간 덕유산 종주는 '마라톤'이다 ④] 덕유산 주릉

등록 2008.02.14 09:50수정 2008.02.14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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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엽령은 백두대간을 종주하는 사람들의 쉼터

 무룡산에서 향적봉으로 이어지는 덕유산 주릉
무룡산에서 향적봉으로 이어지는 덕유산 주릉이상기

무룡산(1492m)에서 향적봉에 이르는 구간은 덕유산의 주릉으로 동엽령(1320m)까지 내려갔다 향적봉(1614m)까지 올라가는 양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물론 중간에 수도 없이 오르락내리락해야 하지만 생각보다 그렇게 힘들지는 않다.


여기서는 오히려 은근과 끈기만 있으면 된다. 왜냐하면, 가파른 구간이 없어 숨을 차게 하거나 기운을 빼게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또 이제는 이력이 붙어 관성으로도 나갈 수 있을 것 같다.

 덕유산 주릉의 낮은 바위암봉
덕유산 주릉의 낮은 바위암봉이상기

무룡산에서 동엽령 가는 길에는 신갈나무 군락이 산 전체를 뒤덮고 있고, 길가에 가끔 산죽 군락이 보인다. 덕유산 지역은 다른 산에 비해 소나무가 적은 편이다. 그래서인지 산이 더 평평해 보이고 바위와 소나무에서 느낄 수 있는 멋과 절개를 찾기가 어렵다. 그래서 가다가 바위라도 만나면 사진도 찍고 싶고 바위를 감상하며 쉬고 싶어진다.

 동엽령 휴게소
동엽령 휴게소이상기

무룡산에서 동엽령까지는 4.2㎞로 두 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다. 동엽령에 도착해 보니 나무로 바닥을 깔고 난간을 덧댄 휴게소가 보인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배낭을 벗은 채 쉬기도 하고 장비를 점검하기도 한다. 동엽령은 향적봉까지 가는 주릉 구간에서 해발이 가장 낮은 곳이다.

이곳에서는 동쪽으로 거창군 북상면 병곡리로 내려갈 수 있다. 향적봉까지 갈 길이 바쁜 우리 일행은 이곳에서 쉬지 않고 그냥 통과한다. 이제 다음 목표는 백암봉이다. 백암봉 삼거리에서 덕유산 정상인 향적봉 가는 길과 대봉으로 향하는 백두대간 종주 길이 갈라진다.

백암봉은 향적봉으로 향하는 삼거리


동엽령 안내표지판에 보니 향적봉까지 4.3㎞로 나와 있다. 시간은 벌써 오후 4시 20분이다. 요즘 해 떨어지는 시간이 오후 5시 50분 정도이니 해 있을 때 걸을 수 있는 시간은 1시간 반 정도에 불과하다.

이곳 덕유산은 사방이 탁 트여 일몰 후에도 1시간 정도는 랜턴 없이 산행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겨울 산행에서 일몰 후 산행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오늘(2일) 날씨가 아주 좋다는 사실이다.


 이번 산행을 함께 한 대원들
이번 산행을 함께 한 대원들이상기

동엽령에서 한 20분쯤 꾸준히 걸으니 멋진 바위가 나온다. 이곳에서 일부 대원이 나를 추월해 간다. 이들이 바위 정상에 설 때쯤 나는 그들을 불러 멋진 포즈를 잡도록 한다. 찰칵하는 순간 울퉁불퉁 바위와 파란 하늘 사이에 있는 멋진 산사람이 시간을 정지시킨다. 산 정상에 올라 느끼는 쾌감도 산행의 매력이지만 중간 중간 대원들과 만들어가는 추억어린 사진도 산행의 또 다른 매력이다.

 백두대간 산줄기에 노을이 내린다.
백두대간 산줄기에 노을이 내린다.이상기

이제 뒤를 돌아 우리가 걸어온 백두대간 길을 쳐다보니 옅은 저녁 안개로 산이 조금은 부옇게 보이고 비쳐드는 햇살도 약간은 붉은 기운을 품고 있다. 그래서인지 산이 오히려 신비스러워 보인다. 저 멀리 지리산은 운무에 싸여 천왕봉과 반야봉의 머리 부분만 보인다.

동서로 뻗어있는 지리산 전체 능선을 오늘 정말 원 없이 보았다. 저녁이 되면서 다시 기온이 조금씩 내려가서인지 밟는 눈의 느낌도 다르다. 낮에는 눈이 조금 녹아 상대적으로 푹신했다면 저녁에는 다시 얼어붙어 딱딱해지는 것 같다.

동엽령에서 백암봉까지 2.2㎞ 거리를 1시간 10분 동안 걸어 5시30분 백암봉에 도착한다. 백암봉은 송계 삼거리라고도 불리는데, 이곳에서 횡경재를 거쳐 송계사로 내려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길은 내일(3일) 우리가 백두대간 길을 따라가면서 다시 갈 방향이고, 오늘은 북쪽에 있는 향적봉을 향해 가야 한다.

하늘에 붉은빛이 감돌기 시작하고 해도 벌써 상당히 기울었다. 향적봉 일몰이 최고라는데 그것을 보기는 이미 틀렸다. 일부 걸음이 빠른 대원들이나 볼 수 있을 것이다.
  
향적봉에 이르기도 전에 해는 떨어지고

 덕유산의 일몰
덕유산의 일몰이상기

이제 시간이 없다. 향적봉까지 2.1㎞이고 1시간은 족히 걸릴 테니까. 백암봉 삼거리에서도 주변을 조망한 다음 바로 걸음을 재촉한다. 오늘 지리산 연봉을 보는 것도 이곳이 마지막일 듯싶다.

중봉으로 향한 지 한 10분쯤 되었을까 일몰이 시작된다. 아직은 산등성이에 걸린 것이 아니고 나무 끝에 걸렸지만 해는 이미 마지막 남은 붉은빛을 토해낸다.

성철 스님의 임종계 마지막 구절 '일륜토홍괘벽산(一輪吐紅掛碧山)'이 생각난다. '수레바퀴 같은 해가 푸른 산에 걸려 붉은빛을 토해낸다'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겨울이라 그런지 산은 푸르다기보다 거무스름하다.

남쪽으로는 아직도 지리산 연봉이 붉은 노을 속에 아련하게 보인다. 중봉에 이를 때까지도 사방은 노을 기운을 받아 어둡지 않다. 중봉에 만들어진 나무 구조물에 서서 서쪽 하늘을 바라본다. 분위기 정말 좋다. 이곳에서 향적봉까지는 1.1㎞이다.

오늘은 벌써 어두워져 향적봉에 오를 수는 없고 향적봉 대피소까지만 가면 된다. 향적봉 대피소는 향적봉 바로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일부 대원들은 이미 대피소에 가서 저녁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저녁 메뉴는 청국장과 주물럭 고기구이로 되어 있다.

 중봉 근처의 주목
중봉 근처의 주목이상기

중봉에서부터는 주위에 다른 나무들이 보인다. 소위 향목(香木)과 적목(積木)으로 불리는 주목 군락이다. 주목은 살아 천 년 죽어 천 년을 간다고 하는데 제대로 된 모습은 내일 아침에나 볼 수 있을 것 같다.

주목 사이로 난 길을 따라 다시 10여분을 가니 푸르스름한 저녁 어스름 사이로 불빛이 흘러나온다. 향적봉 대피소다. 불빛 사이로 사람의 움직임도 보인다. 향적봉 대피소에 도착해 시간을 보니 6시30분이다. 우리 대원 24명 중 20명 정도는 벌써 도착을 한 것 같다.

향적봉 대피소의 저녁 풍경

 향적봉 대피소에서 휴식을 취하는 등산객들
향적봉 대피소에서 휴식을 취하는 등산객들이상기

취사장에서는 벌써 저녁을 준비하느라 부산하다. 짐을 대피소 2층 침상에 풀고 20번 자리를 배정받는다. 한 40명 정도 잘 수 있는 방으로 벌써 사람들로 꽉 차 있다. 우리 대원이 전체 투숙객의 60%이고 나머지는 등산객 반, 사진작가 반이다.

방 안에는 덕유산의 사계를 보여주는 멋진 사진들이 걸려 있다. 우리보다 먼저 온 다른 팀의 사람들은 담소를 나누기도 하고 오늘 찍은 사진에 대해 이야기하며 여유 있는 시간을 보낸다.

잠시 후 취사장으로 가니 저녁이 벌써 준비되어 있다. 대원들이 너무 피곤해서 고기는 굽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도 각자 가지고 온 반찬과 청국장으로 밥을 맛있게 먹는다. 해발이 높아서인지 밥의 뜸이 좀 덜 든 것 같기도 하고, 압력밥솥에 익숙해서인지 밥맛은 좀 덜한 편이다. 그러나 이 추운 겨울에 이렇게 높은 곳에서 이 정도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것만도 정말 고맙고 멋진 일이다.

 백두대간 줄기에 퍼지는 운해
백두대간 줄기에 퍼지는 운해이상기

밥을 먹고 방으로 들어와 덕유산 국립공원에서 발행한 '자연해설 프로그램 안내' 팸플릿을 본다. 내용을 들여다보니 읽을 만하다. 우리가 무심코 지나쳤던 자연의 세계를 다른 눈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마련한 프로그램이라고 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덕유산 식물·곤충과 함께 하기'와 '아고산대 야생화를 찾아서' 프로그램이 좋아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겨울에 불가능하니 그림의 떡이다. 지금 우리가 즐길 수 있는 것은 덕유산 능선에 펼쳐진 하얀 설경이다. 봄을 상징하는 덕유평전 철쭉과 원추리, 한여름의 무주구천동 계곡, 가을의 적상산 단풍은 다음을 기약하는 수밖에 없다.

대피소는 밤 9시에 불을 끈다. '불 끄겠습니다' 하는 관리인의 말이 나오자 한쪽에서 준비가 덜 되었는지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한다. 잠시 후 불이 꺼지고 사람들은 잠 속으로 빠져든다. 낮에 피곤했는지 순식간에 코를 골아대는 사람이 있다. 나는 몸도 피곤하고 잠자리도 낯설어서인지 쉽게 잠이 오지 않는다. 거기다 또 지속적으로 잠꼬대를 하는 사람도 있다. 코 고는 소리 잠꼬대 소리를 들으며 몸을 뒤척인다.

 우리가 하룻밤을 보낸 향적봉 대피소
우리가 하룻밤을 보낸 향적봉 대피소이상기

심야 전기를 이용한 난방이라 그런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방바닥이 뜨뜻해져 온다. 나중에는 방바닥이 찜질방 수준이다. 안에 입었던 옷을 모두 벗는다. 1600m 산 속에서 런닝 셔츠와 팬티만 입고 잠을 자다니 집에서도 못해본 일이다.

겨우 잠이 든 것 같은데 나중에는 너무 건조해서인지 목이 말라 자꾸 잠을 깬다. 또 공간이 너무 좁아 옆 사람과 부딪쳐 잠을 깨기도 한다. 그렇지만 13시간 산행의 피로를 잊기 위해 나는 계속 잠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내일 향적봉의 아침 기온은 -9.3℃라고 한다. 겨울 기온치고는 대단하지 않다.

덧붙이는 글 | 2월 2∼3일 1박 2일간 백두대간 덕유산 구간을 종주했다. 이때 보고 느낀 일을 산행기 형식으로 5회에 걸쳐 연재할 예정이다. 덕유산 종주를 마라톤에 비유해 보았다. 그것은 백두대간 덕유산 종주가 장거리 산행으로 인내와 끈기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2월 2∼3일 1박 2일간 백두대간 덕유산 구간을 종주했다. 이때 보고 느낀 일을 산행기 형식으로 5회에 걸쳐 연재할 예정이다. 덕유산 종주를 마라톤에 비유해 보았다. 그것은 백두대간 덕유산 종주가 장거리 산행으로 인내와 끈기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동엽령 #백암봉 #향적봉 #덕유산 주릉 #향적봉 대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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