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게소의 화장실(왼쪽)과 따리 고성 뒷골목의 화장실(오른쪽)
박경
과연! 말로만 듣고 책으로만 보던, 많은 여행자를 두려움에 벌벌 떨게 하는 그 악명 높은 중국의 화장실, 바로 그것이었다. 문짝이 없을 뿐만 아니라 서로 마주 보게 되어 있으니 부끄러움 많은 여학생은(알고 보니 그 여학생은 한국인이자 베이징 유학생이었다) 차라리 참기로 했나 보다.
그에 비해 우리 모녀로 말하자면, 무수하게 머릿속으로 그려 본 것에 대한 호기심 어린 확인쯤으로 받아들였다고나 할까? 아니 그걸 넘어서서, 드디어 겪어야만 할 것을 맞닥뜨린 듯, 예상했던 시험문제를 받아들기라도 한 듯 잘 해내야겠다는 성취욕구가 불끈불끈 솟을 지경이었으니.
우리 모녀는 서로 문짝이 되어 주면서 사이좋게 볼일을 보고 사람들이 없는 틈을 타 사진까지 찍고 나왔다. 이후 우리 모녀는 화장실 적응에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간혹 한 줄로 뻥 뚫리고 칸막이만 처져 있는 곳에서는 대(代)를 이어 똥통에 얼굴을 처박은 <형제>의 이광두가 떠오르기는 했다. 그래도 우리가 겪은 화장실은 양반인 셈이다. 높든 낮든 칸막이는 있었으니 말이다.
중국 화장실에 왜 문이 없는가에는 여러 가지 설이 분분하다. 오래 전 똥 돼지를 키우는 구조다 보니 그렇다는 둥, 사회주의니 만큼 화장실에서 모의하는 일을 경계해서라는 둥, 성에 대한 신비감을 없애기 위해 등소평이 화장실 문을 없애라고 했다는 황당한 주장까지.
아마도 중국 사람들에게 화장실은, 배설만을 위한 더럽고 지저분한 곳이라기보다는 잘난 놈이나 못난 놈이나 똑같이 기본적인 걸 해결하면서 서로 인사도 나누고 정보도 교환하는 자연스러운 곳인 듯싶다. 그렇게 마주앉은 채로 힘주며 볼일을 보다가 그 자세로 엉거주춤 걸어와 담배를 권하기도 한다는 걸 보면 말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배설을 하는 건데 그게 뭐 그리 부끄럽고 숨길 일이냐, 가진 놈이나 못 가진 놈이나 먹은 만큼 뱉어놔야 하는 법, 먹는 것만큼 싸는 일도 자연스러운 일인데 돈 들여 문짝은 뭐하러 다나, 뭐 이런 정도로 나름 해석해 본다. 따지고 보면 장점이 없는 것도 아니다. 다 드러난 화장실이다 보니 치한이나 범죄에 대한 두려움도 덜할 듯싶다.
우리 가족은 기특하게도 사흘 나흘이 지나면서 화장실에 대한 거부감을 완전히 날려 버렸고, 심지어 여행이 끝나갈 무렵엔 화장실 문이 답답하다고 느낄 정도가 되었다. 특히 5학년짜리 딸애는 낯선 곳 화장실에서 엄마를 앞에 세워 놓고 문은 활짝 열어놓은 채 볼일을 보았으니 아이들의 적응력은 놀랍다. 우리가 전혀 다른 문화 속에 젖어드는 데에 열흘도 채 걸리지 않은 셈이다. 물론 대변은 시간이 좀 더 필요했다고 솔직하게 고백하는 바이다.
세 시간 넘게 달리던 버스가 따리에 도착하자, 모국어 외치듯 '시에시에 자이지엔'(감사해요 잘가요)하는 이 아줌마의 능청스러움에 옆자리의 아가씨가 더 쑥스러운 듯 총총히 사라져 버렸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달려드는 삐끼 아줌마들, 숙박지 명함을 건네느라 난리들이다. 그들을 헤치고 빠져나오니 성큼 다가선 하늘과 사뿐히 내려앉을 것만 같은 흰 구름. 해발고도 2100m라는 걸 새삼 떠올린다.
서늘하게 와 닿는 바람이 예사롭지 않다. 온몸을 휘감고 도는 듯한 부드러운 바람의 질감이 공기보다 더 투명하게 느껴진다. 풍화설월(風花雪月)의 따리라는 말이 실감 났다. 따리 남부 샤관의 바람, 북부 샹관의 꽃, 서부 창산의 눈, 동부 얼하이의 달이라더니, 우리 가족이 다다른 곳은 바로 샤관 버스 터미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