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산 법종교 본부.
안병기
구릿골을 나와 관희교를 건너 원평 쪽으로 가다 보면 저수지의 초입에 닿기 전 좌측 언덕에 절 비슷한 건축물이 밀집된 곳이 나온다. 강증산의 딸 강순임과 사위가 창시한 증산법종교가 있는 곳이다.
이곳 영대에는 강증산 내외의 유해가 안치돼 있다. 서로 차지하려고 추종자들이 법정싸움까지 벌였던 강증산의 유해는 이곳저곳 옮겨다니다 팔 하나가 없어져 버렸다. 법종교 경내엔 미륵불을 모신 삼청전, 단군을 모신 태평전, 각 성씨의 시조를 모신 승도묘 등이 있다.
소멸 시효가 없는 '해원상생'이라는 개념증산이 살았던 시기(1871~1909년)는 조선의 국운이 거의 끝나가던 시점이었다. 조선을 둘러싼 열강들의 각축이 치열하게 진행되던 시기였다. 당시 조선사회는 서양세력의 침입에 따른 민족모순과 봉건 질서라는 계급모순을 동시에 겪고 있었다.
강증산은 당시의 역사적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그는 반상의 차별, 적서의 차별, 노비에 대한 차별, 직업의 귀천 등 조선의 봉건적 굴레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선천시대는 양의 시대였으나 후천시대는 음의 세계가 올 것을 예견했다.
나중에 강증산은 자신의 법통을 그의 제자였던 차경석의 이종 누이 고판례라는 여자에게로 넘긴다. 당시로서는 혁명적이랄 수 있는 조치를 취한 것이다. 차경석은 나중에 보천교를 세웠다. 해방되고 나서 보천교가 망하자 보천교 건축 중 일부는 뜯겨져 서울 조계사와 전주 경기전 건축에 쓰이게 된다.
강증산은 짧지만 치열한 삶을 살았다. 조선사회가 안으로부터 붕괴해 가고, 밖으로는 승냥이 같은 외세가 몰려들던 19세기 후반, 사회의 모순을 해결할 해법으로 증산교를 세웠다. 한 세기가 지나가고, 세상은 엄청나게 변모했지만 그의 사상은 아직도 용도폐기될 줄 모른다.
증산의 사상은 김지하 시인의 생명사상에도 영향을 끼쳤다. 김지하 시인이 쓴 <남조선 뱃노래>라는 책만 해도 "이 길은 남조선의 배질이라"라는 증산의 말에서 따온 것이다. 증산도 진리의 핵심개념인 '해원상생'은 이 극심한 갈등의 시대에 전보다 훨씬 유효한 슬로건이 돼 있다. 문제는 '해원'의 주체가 원한을 맺게 한 사회적 강자여야 한다는 점일 테지만.
금평저수지를 스쳐 지나간다. 물빛이 유난히 차갑게 느껴진다. 소금이 부패를 막듯이 차가움 역시 부패를 막는다. 소금과 차가움이야말로 모든 종교의 아이콘이다. 종교여, 자꾸만 세상의 온기를 느끼려 파고들지 마라. 금평저수지가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저수지 서쪽으로 뉘엿뉘엿 해가 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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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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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인이 굶으면 온 천하 사람이 굶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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