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보름 축제 2007년 (안양천)
최병렬
'대보름'이다. 거리마다 윷놀이 대회 현수막이 걸려있고 쥐불놀이 등 각종 대보름 행사를 예고하는 광고가 즐비하다. 농경사회였던 우리민족에게는 대보름이 추석·설과 함께 중요한 명절이었다.
지금부터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은 내 어린 시절 대보름이다. 기억 속에 있는 대보름은 책 속에 있는 대보름이나 요즘 도심에서 각 단체가 주도해서 진행하는 대보름 놀이와는 사뭇 다르다.
대보름날만 되면 아침부터 불 깡통 만들기에 바빴다. 쥐불놀이를 하기 위해서다. 깡통에 구멍을 숭숭 내고 양 귀퉁이에 철삿줄을 매단 다음 그 속에 송진과 관솔, 솔방울을 가득 채우면 준비 끝이다.
대보름 유래나 의미를 제대로 알 턱이 없었다. 마을에 민속학자가 있는 것도 아니고 요즘처럼 컴퓨터 자판만 두드리면 정보가 넘치는 시절도 아니었다. 그저 어른들에게 허락받고 불장난하는 날이었을 뿐. 그 당시에는 또래 아이들끼리 모이면 으레 불장난을 했다.
우리마을과 앞마을은 넓은 들판을 사이에 두고 있다. 약 2㎞ 정도 되는 거리다. 대보름은 구만리 사람들과 공식적으로 싸우는 날인 줄로 알았다. "대보름 놀이가 부족국가 시대부터 시작됐다"고 누군가 얘기했던 터라 마을 간 패싸움 하는 것이 꽤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다. 부족 간 싸움하던 풍습이 남아있어서 대보름날만 되면 그 때처럼 싸움한다는 것.
대보름? 공식적으로 싸우는 날 아냐? 초등학생 시절에는 마을 청년들이 논바닥에서 만나 서부의 무법자들처럼 결투를 벌이는 줄 알았다. 때문에 무서워서 앞마을 근처에는 가지도 못했다. 패싸움하다가 붙잡히면 죽도록 몰매 맞는다는 소문이 흉흉했기 때문이다.
대보름 다음날이면 각종 소문이 아이들 입을 타고 떠돌아 다녔다. '복남이 형은 팔이 부러졌고 영식이 형은 머리가 깨졌다'는 식의 소문이다. '싸움 잘하는 길동이 형이 맹활약을 펼쳐서 앞마을 청년들이 지레 겁먹고 항복했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중학교 1학년 때, 친구들 몇 명과 앞마을로 원정을 떠났다. '이제 클 만큼 다 큰 청년'이라는 건방진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시시했다. 아이들 몇 명이서 깡통을 돌리고 있을 뿐이었다. 팔이 부러지고 머리가 깨지는 치열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소리를 지르며 달려가자 모두 도망갔다. 아마 우리가 제법 덩치 큰 청년들이라 생각했나 보다. 나중에 알고 보니 같은 학교에 다니는 선배도 있었다.
전리품이 필요했다. 그 때 눈에 들어온 것이 '짚누리'('짚단더미'의 순우리말)였다. 웬만한 초가집 한 채 크기의 짚누리. 누군가 그 곳에 불을 지르자고 말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겨울 가뭄에 바싹 마른 짚누리는 활활 타올랐다. 그 때까지 그렇게 큰 불을 본 적이 없었다. 어린것들이 겁도 없이 '달집태우기'를 제대로 한 셈이었다.
불길이 하늘까지 치솟았다고 느낄 무렵 '불이야'라는 소리가 들렸다. 불길이 거세지면서 슬슬 겁이 나기 시작했던 터라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냅다 줄행랑을 쳤다. 앞마을 청년들이 우리를 붙잡으러 오는 소리인 줄 알았다. 착각이었다. 앞마을 어른들이 불 끄러 오는 소리였다.
겁없이 짚누리에 불질렀다, 그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