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동 길은 오르막이 가파르다.
조정래
골목여행을 함께 다니는 정래와 시간을 맞추기가 쉽지 않았다. 마침내 2월 어느 날 날을 잡았다. "지금까지 다닌 곳 중에서 가장 힘들다"고 겁을 줬다. 정래가 잔뜩 겁을 먹은 눈치다.
평창동은 조선시대 공물(貢物:특산물)을 쌀로 통일해서 바치게 한 납세제도인 대동법과 관계가 있다. 선조 이전까지 세금을 각 지방 특산물로 바치게 했기 때문에 수송과 저장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 지방에서 나지 않는 특산물을 바치게 하는 경우도 있어 민원이 많았다. 어려움은 세금 감소로 이어졌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가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했고, 담당 기관으로 선혜청(宣惠廳)을 뒀다. 평창동은 선혜청의 창고인 평창(平倉)이 있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동 크기는 종로구 전체의 37%나 될 정도로 크다. 북한산을 끼고 있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부자 동네가 생기는데 북한 무장'공비'가 나름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때는 196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하기 위해 김신조 일당이 내려와 자하문고개를 넘었다. 당시 여러 가지 이후로 북악산 일대엔 드문드문 사람이 살던 때였다. 김신조 일당의 습격은 그런 동네를 한 순간에 바꾸었다.
1970년부터 1977년까지 서울특별시에서 기획관리관, 도시계획국장, 내무국장 등을 맡았고, 서울시 시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기도 한 손정목씨는 저서 <한국 도시 60년의 이야기>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조용한 시골 마을 그대로였고 재래종 능금의 생산지로 알려져 있었다. 시내 다른 지역보다 땅값이 훨씬 싸서 집을 지어 이사 가는 사람도 있기는 했으나…세검정 삼거리에는 가로등 같은 것도 없어 밤이 되면 암흑의 거리가 되었다. 아마도 당시의 청와대 경호실이나 수도방위사령부의 생각으로는 인왕산·북악산은 물론이고 그 북쪽 일대 개발을 최대한 억제하고 따라서 사람의 출입도 제한하는 것이 청와대 경호상 상책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러나 1·21 사태는 바로 그런 생각에 대한 호된 질책이고 경종이었던 것이다."1·21 사태가 일어난 지 얼마 안 된 2월 9일에 북악산길 개발 계획이 발표되었고, 자하문길도 12m에서 25m로 두 배 이상 폭이 넓어졌다. 또한 1970년대 초에는 고급주택가인 평창단지가 생기면서 평창동 개발 바람이 시작됐다.
그렇게 해서 사람이 한 명, 두 명 모이기 시작했는데, 경치가 좋고 조용해서 작품 활동을 하는 예술가들과 작가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을 비롯해 작가 이제하 박범신 양귀자 윤후명, 바리톤 황병덕, 지휘자 정명훈 등이 이 곳에 살고 있거나 둥지를 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