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마을에 개발 바람 일으킨 '무장공비 침투'

[미니벨로 타고 서울골목여행 21] 예술동네 평창동, 1·21 사태 이전엔 조용한 시골 마을

등록 2008.03.15 18:13수정 2008.03.17 0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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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창동 전경
평창동 전경조정래

서울 대표 부자 동네인 평창동은 서울에 올라온 초창기부터 종종 찾던 동네다. 일 때문에 서울예고를 찾았고, 음악회를 보러 가나아트센터에 갔다. 두 곳 모두 평창동에 있다. 작가 이제하가 운영하는 문화카페를 취재하기 위해 찾은 적도 있다. 그 곳 또한 평창동이다.

평창동에 '절벽'이라는 유명한 술집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택시를 타고 술 2차를 갔다가 실패한 적도 있다. '유명세'에 비해 평창동의 밤은 너무 조용하고 한적했다. 밤새도록 불이 켜져 있는 서울 도심과 달리 평창동은 이미 취침 중이었다. 분명히 그 시간 불을 밝히고 있어야 할 술집이나 식당은 눈을 씻고 봐도 없었다. 함께 간 사람들의 핀잔만 잔뜩 들어야 했다.


 평창동 집은 담이 높다.
평창동 집은 담이 높다.조정래

그렇게 여러 차례 평창동을 찾았지만 동네를 본 것은 아니었다. 단지 서울예고만 본 것이고 가나아트센터만 봤을 뿐이었다. 동네는 면이다. 난 단지 면 안에 있는 몇 개 점만 봤을 뿐이다. '부자 동네'라는 유명세도 호기심을 자극했다. 도대체 어느 정도이기에.

2008년 1월 1차 답사를 떠났다. 그 날은 날씨가 추워서 단단히 무장을 하고 집을 나섰다. 실수였다. 온몸이 땀에 절어 수시로 옷을 벗었다 입었다 해야 했다. 등산이나 다를 바 없는 경사는 내 몸을 인공난로로 만들었다. 옷을 벗으면 금세 찬 바람이 불어와 몸을 얼음으로 만들었다. 냉온탕을 반복했다.

막다른 길이 많았다. 길 끝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와서 옆 길로 가는 일을 반복했다. 나중엔 "힘들다"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걸어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게 이해가 됐다. 경사가 가파르면서도 길어 자동차가 없는 노약자라면 살기가 무척 불편하겠다 싶다.

게다가 대로변을 빼면 동네엔 식당이나 가게 하나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보이는 것은 높다란 담과 집 뿐. 길을 거닐다 목이 마르거나 허기가 져도 대로까지 내려가지 않으면 답이 없었다. 다음에 올 땐 꼭 간식과 물을 챙겨 오리라 다짐했다. 그렇게 1차 답사를 끝냈다.

김신조 무리의 청와대 습격사건 뒤 주택단지 조성


 평창동 길은 오르막이 가파르다.
평창동 길은 오르막이 가파르다.조정래

골목여행을 함께 다니는 정래와 시간을 맞추기가 쉽지 않았다. 마침내 2월 어느 날 날을 잡았다. "지금까지 다닌 곳 중에서 가장 힘들다"고 겁을 줬다. 정래가 잔뜩 겁을 먹은 눈치다.

평창동은 조선시대 공물(貢物:특산물)을 쌀로 통일해서 바치게 한 납세제도인 대동법과 관계가 있다. 선조 이전까지 세금을 각 지방 특산물로 바치게 했기 때문에 수송과 저장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 지방에서 나지 않는 특산물을 바치게 하는 경우도 있어 민원이 많았다. 어려움은 세금 감소로 이어졌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가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했고, 담당 기관으로 선혜청(宣惠廳)을 뒀다. 평창동은 선혜청의 창고인 평창(平倉)이 있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동 크기는 종로구 전체의 37%나 될 정도로 크다. 북한산을 끼고 있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부자 동네가 생기는데 북한 무장'공비'가 나름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때는 196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하기 위해 김신조 일당이 내려와 자하문고개를 넘었다. 당시 여러 가지 이후로 북악산 일대엔 드문드문 사람이 살던 때였다. 김신조 일당의 습격은 그런 동네를 한 순간에 바꾸었다.

1970년부터 1977년까지 서울특별시에서 기획관리관, 도시계획국장, 내무국장 등을 맡았고, 서울시 시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기도 한 손정목씨는 저서 <한국 도시 60년의 이야기>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조용한 시골 마을 그대로였고 재래종 능금의 생산지로 알려져 있었다. 시내 다른 지역보다 땅값이 훨씬 싸서 집을 지어 이사 가는 사람도 있기는 했으나…세검정 삼거리에는 가로등 같은 것도 없어 밤이 되면 암흑의 거리가 되었다. 아마도 당시의 청와대 경호실이나 수도방위사령부의 생각으로는 인왕산·북악산은 물론이고 그 북쪽 일대 개발을 최대한 억제하고 따라서 사람의 출입도 제한하는 것이 청와대 경호상 상책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러나 1·21 사태는 바로 그런 생각에 대한 호된 질책이고 경종이었던 것이다."

1·21 사태가 일어난 지 얼마 안 된 2월 9일에 북악산길 개발 계획이 발표되었고, 자하문길도 12m에서 25m로 두 배 이상 폭이 넓어졌다. 또한 1970년대 초에는 고급주택가인 평창단지가 생기면서 평창동 개발 바람이 시작됐다.

그렇게 해서 사람이 한 명, 두 명 모이기 시작했는데, 경치가 좋고 조용해서 작품 활동을 하는 예술가들과 작가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을 비롯해 작가 이제하 박범신 양귀자 윤후명, 바리톤 황병덕, 지휘자 정명훈 등이 이 곳에 살고 있거나 둥지를 틀었다.

 평창동엔 절이 무척 많다. 사진은 비구니 도량인 '혜광사'.
평창동엔 절이 무척 많다. 사진은 비구니 도량인 '혜광사'.김대홍

1990년대 이후에는 대통령을 보좌하기 위해 측근 인사들이 이 곳을 찾았다. 참여정부 정무수석을 한 문재인, 문민정부 정무수석 이원종, 최형우 전 의원, 서석재 전 의원, 권노갑 전 의원 등이 이 곳에 거처를 마련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2년 선거 직전 찾은 당시 정몽준 의원의 집도 평창동이었다.

그 외 연예인이나 재벌 그룹 총수들도 이 곳에 많이 사는 편이다. 정래와 나는 혹시나 유명한 사람을 만날까 싶어 두리번거리며 거리를 다녔다. 허나 날이 추워서 그런지 주말엔 외출을 하지 않는지, 아니면 이미 외출을 한 것인지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가끔씩 자동차만 오르락내리락 할 뿐이었다.

산악 동네라 그런지 절이 무척 많은 편이다. 한밤에 서울 시내를 보면 십자가만 보인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지만 평창동에선 교회보다 절이 훨씬 많다. 절 형태를 갖춘 곳도 있지만, 일반 주택에 절 명패만 건 곳도 있다.

정래는 동네 집들을 보고 한 마디로 '성'이라고 했다. 가파른 경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담이 높아진 측면이 있다. 담을 높이지 않으면 산을 깎아야 하는데, 그 대신 담을 높인 것이다. 그걸 감안해도 담이 높긴 너무 높다. 담 너머를 기웃거리는 일은 평창동에선 불가능하다.

임옥상미술연구소, 가나아트센터... 곳곳이 미술관

 평창동은 인사동과 함께 유명한 미술관 동네다. 사진은 평창동에 있는 가나아트센터.
평창동은 인사동과 함께 유명한 미술관 동네다. 사진은 평창동에 있는 가나아트센터.김대홍


 평창동에 있는 갤러리 그안.
평창동에 있는 갤러리 그안.김대홍

평창동엔 인테리어 잡지에서 본 듯한 집들이 넘친다. 개성이 강하다. 녹이 슨 외피가 막을 만들어 보호하는 코르텐 강으로 만든 집, 큰 바위 그대로 벽을 만든 집, 울긋불긋 대문 집, 해저 기지처럼 생긴 집 등 다 다르다.

대문 옆 벽에 그림이나 조각을 붙여 지나가는 사람 눈요기를 하는 집도 있다. 김철수 화백의 작품과 벌거벗은 닭이 실뭉치를 깔고 앉은 실험성 짙은 사진, 말 탄 사람 모형을 구경했다. 동네가 미술관이란 생각이 들었다.

유명 건축가들이 개성을 발휘한, 일명 작품 주택은 1980년대 이 곳 평창동과 방배동에서 붐이 일었다. 1994년부터 1996년까지 취득세가 나온 고급주택이 가장 많은 곳은 성북동, 그 다음이 평창동이었다.

평창동엔 월탄 박종화가 살던 한옥도 그대로 남아 있다. 1975년 월탄은 살던 충신동집이 헐리자 평창동으로 이사했다. 일제시대 때 창씨개명을 거부한 월탄은 해방 이후에도 정치와는 거리를 두며 작가의 길을 걸었다. <임진왜란> <양녕대군> <여인천하> <금삼의 피> 등 역사소설로 큰 인기를 끌었다. 1981년 세상을 떠났다.

집을 구경하다가 쇠로 만든 큰 물고기 모형이 눈길을 끌어 봤더니 '임옥상미술연구소'라고 돼 있다. 임옥상이 누구인가. 매향리에 떨어진 미군 폭탄 파편으로 큰 신상인 '자유의 신 in Korea'를 만들고, 멸종 위기종인 저어새를 테마로 환경시계를 만든 설치미술가다. 사회를 향해 예리한 시선을 들이대는 작가의 연구소가 이리 예쁠 수 있나 싶어 신기했다.

 평창동엔 규격형 집이 아니라 개성 넘치는 집이 많다.
평창동엔 규격형 집이 아니라 개성 넘치는 집이 많다.김대홍


다른 길에선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이 세운 영인문학관을 봤다. 문인들의 육필원고와 그림 전시를 하는 곳이다. 의외로 외관이 소박하다. 김종영미술관과 김흥수미술관, 갤러리 '그안'도 보인다. 가나아트센터 주변에 미술관이 많이 모여 있다. 1992년 가장 먼저 평창동에 자리를 잡은 토탈미술관을 비롯해 갤러리 세줄, 갤러리 궁, 평창아트, 그로리치화랑, 키미아트 등이 근처에 있다.

그림 같은 집들과 미술관이 많으니 영화나 드라마 촬영지로도 평창동은 인기가 높다. 영화 <바람난 가족> <빈집> <팜므파탈>, 드라마 <커피프린스 1호점> <개와 늑대의 시간> <아름다운 날들> <천국의 계단> <사랑과 야망> <요조숙녀> 등 목록을 보면 평창동이 얼마나 촬영지로 인기가 높은지 알 수 있다.

허나 정래와 내 취향은 달랐다. 두 사람 눈을 혹하게 만든 곳은 다른 곳에 있었다. 으리으리하고 그림 같은 집들이 즐비한 평창동에 '이런 집이 있었나' 싶은 집 몇 채였다.

"나무가 좋은데 집을 왜 팔아요?"

 구홍서씨의 집. 100평이 넘는 집을 나무로 채웠다.
구홍서씨의 집. 100평이 넘는 집을 나무로 채웠다.김대홍

 구홍서씨.
구홍서씨.조정래

북한산이 아래를 보고 내려가다 움푹 팬 곳이 있다. 그 곳에 기와집 몇 채와 시멘트벽에 슬레이트 지붕만 얹은 작은 집 한 채가 있다. 슬레이트집은 집은 작지만 마당이 꽤 크다. 그 큰 마당은 모두 나무로 채워져 있다. 갈 때마다 누군가가 나무에 물을 주고 있었다.

담이 높고 거친 개가 한 두 마리씩 있는 평창동에서 이 집은 거의 유일하다시피 담이 없는 집이다. 송아지만큼 큰 개도 없다. 평창동을 거닐다 보면 외부인에 대해 잔뜩 경계심을 드러내는 개 소리가 하늘을 찌른다.

허나 슬레이트집 주변은 그렇지 않다. 나무로 대충 짜 맞춘 슬레이트집 대문은 모양만 대문일 뿐, 안과 밖을 막는 역할을 거의 하지 못한다.

두 번째 찾은 날 집 구경을 해도 되느냐고 물었더니 흔쾌히 허락하신다. 물을 주던 어르신은 구홍서씨. 1938년생이다. 지금은 경기도 고양시에 산다고 하신다. 나무가 좋아서 수시로 찾아와서 가꾼다.

이 집을 산 때는 1965년. 결혼하기 전 살다가 취직하고 지방으로 발령이 나면서 이사를 했다. 나무가 좋아서 이 집에 한 그루씩 모으기 시작했다. 경남 마산에서 가져온 나무도 있고, 경기도 수원에서 가져온 나무도 있다. 남쪽에서 가져온 동백나무는 이 곳 기후에 적응하지 못해 죽었다.

1960년대에 이 집을 샀을 때 비해 지금 땅값이 100배 이상 올랐다. "땅을 팔라고 하는 사람이 많겠다"고 묻자, "나무 가꾸는 게 좋은데 뭐 하러 파느냐"고 하신다. 팔라는 제의는 제법 있었단다.

"영화나 드라마 찍겠다고 찾아온 적 없었느냐"고 묻자, "한 번도 없었다"며 '껄껄' 웃으셨다.

"집이 못 생겨서 그런지 한번도 빌려달라는 적이 없대요. 저 위에 크고 으리으리한 집들은 많이 나오더라구요."

집엔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 샘이 있다. 어르신은 이번엔 샘 자랑을 하신다. "집이 예쁘다"고 하자 "언제든지 놀러 오라"고 하신다. "없을 때는 대문 옆 우편함에 쪽지를 남겨놓으라"는 배려도 잊지 않으신다.

산을 뒤덮은 집, 인간의 양보 필요

 인왕산에서 바라본 평창동 전경. 2005년 3월 찍은 사진이다.
인왕산에서 바라본 평창동 전경. 2005년 3월 찍은 사진이다.김대홍

전망이 좋고 조용한 평창동엔 기도원이나 금식원이 몇 곳 있다. 삼각산밀알기도원이란 곳이 있는데, 1970년대 '얄개' 시리즈로 자신보다 아홉 살 어린 이승현과 함께 큰 인기를 끌었던 손창호가 이 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당시 나이 45세였다. 손창호는 이 곳에서 생을 마감할 때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정래에게 "죽음과 삶이란 내용으로 기사를 써보면 어떨까"라고 물었더니 "좋다"고 말한다. 눈부시도록 화창한 날, 둘은 갑자기 '죽음'을 이야기하다가 이내 그만두었다.

평창동은 곳곳이 공사 중이다. 이 매력적인 곳에 들어오려는 사람이 많은 편이다. 반대로 이 곳에서 나가는 사람도 많다. 특이한 점은 인구변화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1998년 인구가 1만9346명, 2006년 인구는 1만9645명이다. 겨우 300여명 차이에 불과하다.

오고가는 사람은 많지만 집 숫자나 사람 숫자는 큰 차이가 없다. 새로 들어오는 사람은 자신만의 작품을 갖고 싶어 하기 때문에 헌 집을 헐고 새 집을 짓는다.

동 전체의 65% 이상이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여 있는 땅 평창동. 허나 인왕산에서 보면 산 꼭대기 근처까지 집이 올라가 있다. 좀 더 좋은 곳에 집을 짓고자 하는 사람의 욕심을 어찌할 순 없겠지만 평창동 또한 점점 위험수위에 가까워지는 듯하다.
#평창동 #골목 #자전거 #미니벨로 #박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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