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봉사'가 가져다준 또 하나의 선물

등록 2008.03.10 17:33수정 2008.03.10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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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7일 발생한 유조선 사고에 의한 '기름재난'은 우리에게 엄청난 피해를 계속적으로 안겨주고 있지만, 그에 맞서 싸우는 우리 민족의 저력으로부터 참으로 많은, 또 값진 정신의 실체들이 속속 확인되고 있음을 본다.


우선 가장 쉽게 확인되는 것이 자원봉사로 나타나는 우리 민족의 응집력이다. 지난달 21일 100만 명을 넘어선 자원봉사자 수는 세계에 유례 없는 일이다. 우리 민족이 예로부터 국난 상황 앞에서는 자발적으로 또 즉각적으로 거대한 응집력을 나타내는 고유의 습성을 지녔음을 잘 보여주는 값진 증거다.

a 재난 초기 군부대 간식 제공 재난사고 발생즉시 출동한 군부대들을 발빠르게 찾아다니며 간식 제공을 한 태안성당 봉사팀이 재난 초기 만리포에서 봉사하고 있는 모습

재난 초기 군부대 간식 제공 재난사고 발생즉시 출동한 군부대들을 발빠르게 찾아다니며 간식 제공을 한 태안성당 봉사팀이 재난 초기 만리포에서 봉사하고 있는 모습 ⓒ 지요하


오늘의 이런 응집력은 지난 2002년 월드컵 축구대회 때 나타난 거대한 응원 결집과 성격이 비슷하면서도 확연히 다른 점이 있다. 그때는 단순한 응원 열기였고 신명을 동반하는 것이었지만, 오늘의 재난봉사 응집에는 절절한 비원(悲願) 같은 것이 함께 한다. 분노와 한탄을 가슴에 안고, 자기 비용 쓰고 자기 시간 쓰면서 장시간 노고를 감수하는 희생정신의 발현이다. 우선 우리 바다부터 살려놓고 보자는 마음, 충청도 태안만의 바다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바다라는 인식이 당연히 공유되어 있지만 거기에는 상부상조의 정신도 깃들어 있다.

이처럼 오늘의 기름재난은 고통과 불행 속에서나마 우리 민족의 저력을 확인시켜주는 값진 기회가 되었다. 여태까지 유조선 관련 법규조차 제대로 마련해놓지 못한 채 충돌사고 발생 가능성이 높은 근해에 거대한 위험덩어리를 불러들여 놓고도 만날 싸움질과 안일 무사로 허송 세월한 정치권, 미연의 사고방지는 물론이고 사고 당시 즉각적인 대처능력을 상실한 채 멍청하게 기름유출을 이틀씩이나 구경만 한 해경 등 관계 기관에는 뜨거운 각성의 기회가 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a 태안성당 주임신부와 군부대장의 악수  사단장의 감사패를 전달하기 위해 태안성당 사제관을 찾은 육군 제1789부대장 김영준 대령이 태안성당 최익선 주임신부와 악수하며 파안대소를 하고 있다.

태안성당 주임신부와 군부대장의 악수 사단장의 감사패를 전달하기 위해 태안성당 사제관을 찾은 육군 제1789부대장 김영준 대령이 태안성당 최익선 주임신부와 악수하며 파안대소를 하고 있다. ⓒ 지요하


정치권의 무감각, 안일무사와는 달리 우리의 군은 비상시의 대처 능력이 매우 뛰어남을 유감 없이 보여주었다. 이번 재난봉사에 참여한 군 지휘관들은 사고발생 당시 출동 요청이나 명령이 올 것을 미리미리 예상하고 즉각적으로 출동준비를 해놓고 있었다고 한다. 정부 고위관리로부터 "내일 병력을 투입할 수 있겠습니까?"라는 전화 문의가 오자 "아닙니다. 지금 즉시 출동하겠습니다"라고 답한 지휘관들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재난초기 막대한 양의 기름을 양동이로 퍼내는 일에는 군인들이 가장 큰 힘을 발휘했다. 위험을 무릅쓴 그들의 드라마틱한 작업 모습은 그만큼 감동적이기도 하다. 에피소드들도 있다. 어느 시민 자원봉사자는 방제복 때문에 군부대인 줄 모르고 군인들 틈에 끼었다가 죽는 줄 알았다고 한다. 순식간에 대열이 만들어져서 자신도 엉겁결에 그 열에 끼어 무려 2시간 동안이나 기름 가득한 양동이를 연속적으로 받아 릴레이 하는 작업을 했는데 두 팔이 떨어져나가는 것 같았다고 한다. 이윽고 점심시간이 되어 해변으로 따라 나가 방제복 위쪽을 벗고 보니 모두 군인들이 아닌가. 앗 뜨거워라 싶어 얼른 다른 곳으로 내뺐다는 것이다.   


a 감사패 전달 태안성당은 군종후원회를 두는 둥 군종 쪽으로 많은 일을 하고 있지만 군부대로부터 감사패를 받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감사패 전달 태안성당은 군종후원회를 두는 둥 군종 쪽으로 많은 일을 하고 있지만 군부대로부터 감사패를 받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 지요하


이런 군부대의 발빠른 대응에 발맞추어 천주교 태안성당도 사고 당시부터 민첩하게 움직였다. 우선 군부대에 간식 제공을 하는 것이 매우 요긴한 일임을 간파하고 주임신부의 직접 주도하에 여러 부대에 간식 제공 의사를 밝히고 부대들의 작업 위치를 파악하고 12월 9일부터 간식 봉사에 들어갔다. 태안성당은 7공수여단, 32보병사단, 환경대대 등에 지속적으로 떡국, 라면, 빵 등으로 간식을 제공하고, 그 부대들이 철수할 즈음에는 본부로 찾아가거나 태안 읍내 음식점으로 초대하여 성대한 회식 자리를 마련해주기도 했다.

이런 태안성당의 정성에 군부대에서 감사를 표하는 일이 지난 7일 있었다. 충남 전역의 방위를 맡고 있는 육군 제32보병사단(백룡부대)장 황인무 소장 명의의 감사패를 전달하기 위해 휘하 부대인 제1789부대(연대)장 김영준 대령과 태안읍 평천리에 주둔하고 있는 3대대장 김기영 중령이 오후 1시 태안성당을 찾은 것이다.


a 감사패 전달 후 담소 감사패 전달식이 끝난 후 담소를 나누는 자리에서는 태안성당 최익선 주임신부의 과거 군종신부 시절 이야기도 소개되었다.

감사패 전달 후 담소 감사패 전달식이 끝난 후 담소를 나누는 자리에서는 태안성당 최익선 주임신부의 과거 군종신부 시절 이야기도 소개되었다. ⓒ 지요하


김영준 대령과 김기영 중령은 태안성당 사제관에서 최익선 그레고리오 주임신부님께 감사패를 전달한 다음 잠시 동안 담소를 나누었다. 이 자리에는 태안성당 사목회장(총회장)인 필자도 배석했다.

연대장 김 대령은 자신의 부대가 충남의 서북부(홍성, 서산, 태안, 당진, 아산)지역을 담당하고 있어 '기름과의 전쟁'에 자동적으로 즉각 선봉에 설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고, 재난봉사와 관련하는 여러 가지 에피소드들과 희망적인 전망 등을 말해 주었다.

태안성당에 진심으로 감사를 표하고, 힘차게 국난극복 의지를 피력하는 김영준 대령과 김기영 중령의 모습에서 필자는 색다른 감명을 받았다. 베트남 전쟁 참전으로 전쟁 경험 세대에 속하는 필자는 저 1980년대 군사독재 터널을 지나오면서 군에 대해서는 알게 모르게 거리감 같은 것을 가져왔는데, 그것이 온전히 불식되는 것 같은 정다움마저 느낄 수 있었다.

a 감사패 모습 육군 제32보병사단장 황인무 소장 명의의 감사패를 많은 신자들이 볼 수 있도록 태안성당은 사무실 안 난간 위에 올려놓고 있다.

감사패 모습 육군 제32보병사단장 황인무 소장 명의의 감사패를 많은 신자들이 볼 수 있도록 태안성당은 사무실 안 난간 위에 올려놓고 있다. ⓒ 지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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