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한 연령통합반의 모습. 미국에서는 1990년대부터 나이에 따라 획일적으로 반편성을 하는 현행 학교 체제에 대한 대안운동으로 연령통합교육(Multiage education)을 시작했습니다
강희정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자본의 요구에 따라 읽기, 쓰기, 셈하기 등의 기본 능력을 가진 저급 노동력을 대량생산하기 위해 마련된 체제가 바로 오늘날의 학교의 모습입니다. 자본의 요구에 따라 형성된 학교 체제는 사실상 지식의 획일화와 더불어 교육의 비인간화를 가져왔습니다.
비인간화된 교육체계의 문제를 바로 잡기 위해 많은 교육철학자들이 대안적인 교육체제를 모색해 왔는데 이들 대안교육체제의 특징은 작은 학교를 지향하며 학년별 통합반을 운영하고 교사 학생 간의 긴밀한 인격적인 관계 형성을 주 목적으로 한다는 점입니다.
루돌프 슈타이너, 몬테소리 등의 외국의 교육철학자들만이 아니라 1990년대 후반 이래 세워지기 시작한 한국의 대안학교들도 이러한 교육적 가치들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공립학교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미국에서는 1990년대부터 나이에 따라 획일적으로 반편성을 하는 현행 학교 체제에 대한 대안운동으로 연령통합교육(Multiage education)을 시작했습니다.
1990년 7월 미국의 켄터키 주에서는 모든 초등학교에서 연령통합교육을 실시했으며, 미시시피주, 오레곤주, 펜실베이니아주, 플로리다주, 아칸사주, 조지아주, 캘리포니아주, 텍사스주, 테네시주, 뉴욕주 등 여러 주에서 그 프로그램을 도입했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오하이오주의 더블린시에서도 연령통합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으며 학부모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고 있습니다.
우리 아이가 다니는 학교에서는 1학년과 2학년을 통합한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연령 통합반이 두 개 반이 있고 일반 학급이 두 개 반이 있습니다. 킨더카튼이 끝나는 무렵 학부모들은 자신의 아이들이 연령통합반을 보낼 것인지 일반 학급에 보낼 것인지 결정합니다. 많은 학부모들이 연령 통합반을 선호하기 때문에 신청자들 중에서 추첨을 통해 결정됩니다. 여러 연구 결과들도 연령통합교육의 장점과 긍정적 효과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연령통합반 선호하는 미국 학부모들... 추첨으로 결정연령통합반의 특징을 살펴보면 하나의 교실에 나이 차이가 있는 학생들이 함께 공부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산업화 이전에 있었던 '한학급 학교'(one-room school)를 연상시킵니다. 이런 형태의 학교는 미국의 아미쉬 공동체에 아직 남아있습니다.
의사이자 교육사상가였던 몬테소리는 연령통합반 모델이 이상적인 교육 형태임을 보여 주었고 미국에서 실시되고 있는 연령통합운동은 몬테소리의 교육사상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교실로 이루어진 작은 학교에서 서로 나이도 다르고 따라서 지적 능력도 다를 수 있는 아이들이 함께 배우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실지 삶에서 이루어지는 환경과 크게 닮아 있습니다. 사실 연령에 따라 학급을 나누어 이루어지는 교육체제는 지극히 인위적인 환경이지요.
연령통합반은 선생님과 학생들이 상대적으로 오랫동안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특징을 가지기도 합니다. 연령별 반 편성체제에서는 1년에 한 번씩 교사가 바뀌는 반면 연령통합반에서는 최소한 2년 또는 3년 간 같은 선생님 밑에서 배움이 이루어집니다.
루돌프 슈타이너의 사상에 따라 운영되고 있는 발도르프 학교에서는 한 사람의 교사가 8년 동안 학생들을 가르친다고 합니다. 발도르프 학교에서 8년 담임제를 하는 이유는 한 교사와 학생들이 오랫동안 관계를 지속하면서 학생들로 하여금 교사와 깊이있는 사귐을 하도록 함으로써 인간에 대한 신뢰와 깊이있는 관계 맺기를 배워나가게 한다는 뜻에 있습니다. 일년마다 교사가 바뀌는 환경에서는 교사와 학생 간에 깊이있는 사귐이나 믿음이 만들어지기가 쉽지 않지요.
초등학교에서 배우는 교과 내용은 학생들의 나이에 따라 확연히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어떤 아이들은 다른 아이들보다 일찍 이해하기도 하고 어떤 아이들은 더 늦게 이해하기도 합니다. 연령통합반에서 아이들은 첫 해에 배운 내용을 다음 해에 또 배우게 됩니다. 아이들에게는 같은 내용을 두 번 접하게 함으로써 이해를 깊이있게 하고 온전히 자기 지식이 되게 하는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먼저 깨우친 아이들은 이해하지 못한 아이들에게 가르쳐 주기도 합니다.
교육철학 없는 학년통폐합은 실패했다많은 교육철학자들은 연령통합반이 아이들의 발달과정에 보다 적합한 교육형태라고 주장합니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연령통합반이 교육재정을 줄이기 위해 학급을 통폐합한 것이 아니라 바람직한 교육에 대한 고민과 철학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교육철학이 뒷받침되지 않은 채 경제 논리에 따라 이루어진 학년통폐합은 오히려 부작용을 낳기가 쉽습니다. 경제논리로 이루어진 학년통폐합은 한 교실에서 교사가 서로 다른 두 개 학급의 학생들을 시간을 쪼개어 나누어 가르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교육방식이나 교육철학이 바뀌지 않은 채, 비용의 최소화만을 고려한 학년통폐합은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시간을 반으로 줄이는 조치가 되어버릴 수 있습니다. 미국에서도 1960년대 후반에 시도되었던 연령통합교육은 재정상의 필요에서 이루어졌을 뿐 교육철학이 뒷받침되지 않아 실패했다고 합니다.
연령통합반의 경우 교사 한 사람이 가르치기도 하지만 둘이 팀을 이루어 가르치는 경우가 더 많이 있습니다. 일반 학급에서는 한 사람의 교사가 20여명의 학생들을 가르치는 반면, 일부 학교의 연령통합반에서는 두 사람의 교사가 같은 수의 학생들을 함께 가르칩니다. 경제논리에 따르면 당연히 하기 어려운 조치이지요. 1인당 학생 수는 교육의 질을 평가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고 있습니다. 이런 기준에서 본다면 폐교 위기에 있는 학교는 바람직한 모델에 더 근접해 있는 셈입니다.
연령통합반이라고 해도 모든 학생들이 똑같은 교육내용을 전수받는 것은 아닙니다. 우수한 재능을 보이는 학생에게는 그 학생의 수준에 합당한 교육내용이 별도로 주어져야 합니다. 교사가 개인별 차이에 따라 적절하게 교육내용을 달리하며 모든 학생들이 지적인 도전을 받도록 하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에 통합반 성공 여부가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연령통합반 교육에 참여하는 교사들이 학생들의 지적 능력의 차이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고 각자의 능력에 맞게 학습내용이 제시되도록 꼼꼼히 준비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연령통합반에서는 최소한 2년 이상 가르쳐 교사가 학생의 수준과 능력에 대해 쉽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되지는 않을 수 있습니다.
연령통합반, 이래서 학생들에게 사랑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