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샴록은 아일랜드의 국가적 상징이기도 하다. 사진은 아일랜드의 링거스 항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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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에 뱀이 없는 이유는 성 패트릭 덕분?이날은 성 패트릭이 타계한 날이다. 그는 1500여 년 전인 4세기에서 5세기에 걸쳐 살았으며, 아일랜드인들은 그의 사후 오랫동안 이 날을 기념해왔다. 이날은 아일랜드의 공식 국경일로 지정되어 있다.
성 패트릭은 본래 영국 태생이지만, 14살에 납치되어 아일랜드에 노예로 팔려갔다. 그는 이 어려움 속에서 신을 만났고, 6년 후 노예생활에서 벗어나 가족에게 돌아간 후에도 아일랜드를 잊지 않았다. 그는 주교가 되어 아일랜드로 돌아갔고, 그 곳에서 신을 전파했다.
그는 아일랜드를 가톨릭 국가로 바꾸어 놓았다. 그는 아일랜드 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종교인이었지만, 평생을 청렴하게 살다 가난하게 죽었다. 성 패트릭은 오늘날 아일랜드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가장 존경받는 성인 가운데 한 명이 되었다.
성 패트릭과 연관되는 두 가지 이미지는 '샴록(shamrock)'이라 불리는 작은 클로버와 뱀이다.
성 패트릭은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해 클로버를 썼다고 한다. 하나의 줄기에 잎에 세 개 붙은 샴록은 '삼위일체(trinity)'를 설명하기에 더없이 좋은 도구였을 것이다. 게다가 클로버는 이미 아일랜드인들에게는 성스러움의 표상이었다. 봄이 찾아오기 무섭게 들판을 수놓는 클로버는 새로운 생명과 기운을 의미했다.
다른 하나는 뱀으로, 성 패트릭이 아일랜드의 뱀을 모두 쫓아냈다는 일화에서 유래한 것이다. 아일랜드에 뱀이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아일랜드는 대륙에서 떨어진 섬으로, 성 패트릭 이전부터 뱀이 존재하지 않았다. 뱀은 '이교'를 몰아낸 기독교의 은유적 의미로 보는 편이 정확하다.
지금은 누구나 아일랜드인이 돼볼 수 있지만성 패트릭의 숭고한 삶을 기리는 전통은 아일랜드에서 시작되었으나, 이날이 종교적 의미를 벗어난 대중문화의 형태로 발전한 데는 미국의 역할이 컸다.
이날의 상징이 된 '성 패트릭의 날 가장행렬(Saint Patrick's Day parade)'을 가장 먼저 시작한 것도 미국이었다.
1762년 3월 17일, 뉴욕시에 주둔하던 영국군 소속의 아일랜드 병사들이 음악을 연주하며 행진한 것이 계기였다. 그들은 타국 땅에서, 그것도 영국 국기 아래 복무해야 했던 한 많은 이방인들이었다. 그들의 이 작은 '뿌리찾기' 노력은 아일랜드인들에게 커다란 마음의 위안을 주었으며, 아일랜드 이민자 증가와 더불어 이 행사의 의미는 점차 커졌다.
성 패트릭의 날에 길을 거닐다 보면 거리와 상점에 "3월 17일에는 모든 이가 아일랜드인이다"라는 글귀를 쉽게 만날 수 있다. 간혹 "나는 아일랜드인이니, 키스해 줘요(Kiss Me, I am Irish)"라는 글이 쓰인 티셔츠를 입고 다니는 사람도 볼 수 있다.
물론 이런 치장을 하고 다닌다고 해서 모든 이가 아일랜드 혈통은 아니다. '모든 이가 아일랜드인'이 되는 날이니 당연하지 않겠는가?
비록 지금은 누구나 가벼운 마음으로 아일랜드인이 되어볼 수 있지만, 20세기 초까지도 '아일랜드인'이라는 이름은 저주와 차별의 상징이었다. 일제 치하의 '한국인'과 나치 독일의 '유대인,' 그리고 미국의 '흑인'이 그랬듯이 말이다.
"흰 검둥이"... 백인도 피하지 못한 인종차별영국인들의 잔혹한 압제와 흉년의 배고픔에 고통 받던 아일랜드인들은 미국행 배에 몸을 실었다. 미국에 아일랜드 이민자들이 대거 늘어난 것은 19세기 중반이다. 1845년에 시작되어 5년 가까이 계속된 대기근 때문이었다.
굶어죽은 사람이 110만 명이 넘었고, 그보다 더 많은 수가 식량을 찾아 아일랜드 땅을 떠났다. 1921년, 아일랜드가 독립을 쟁취했을 때 인구가 대기근 이전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당시의 끔찍한 상황을 잘 말해준다.
그러나 꿈을 품고 찾아온 '신세계'에서는 인종차별이 기다리고 있었다. '미국인'이라야 결국 같은 이민자들이었으나, 이들은 먼저 왔다는 이유만으로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찾아온 아일랜드인들을 조롱하고 모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