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왕세종> 원경왕후는 현명했다

[사극으로 역사읽기] 정나라 강씨 부인의 빗나간 자식 사랑

등록 2008.03.22 10:30수정 2008.03.22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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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이방원'에 '그런 원경왕후'

 원경왕후 민씨. 드라마 <대왕세종>.
원경왕후 민씨. 드라마 <대왕세종>. KBS

드라마 <대왕세종>에서 태종 이방원만큼이나 피를 말리는 또 다른 인물이 있다. 바로 그의 부인인 원경왕후 민씨다. 아들들이 왕위를 놓고 혹시라도 분란을 일으키지 않을까 하고 그는 늘 노심초사하고 있다.

원경왕후의 남편인 이방원이 원래부터 충녕대군을 점찍어 두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적어도 그것은 사료상으로 볼 때에는 아무 근거 없는 억측에 불과하다.

이방원은 아들들 간의 분란 가능성을 항상 경계하고 큰형을 중심으로 단결할 것을 늘 강조했을 뿐이다. 충녕의 등극은 '불가피한 최후 선택'에 불과했다. 

우리는 '그런 이방원'의 모습에서 '그런 원경왕후'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원경왕후가 남편과 상반되는 태도를 취했다고 볼 만한 뚜렷한 증거를 찾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이 점을 볼 때에 <대왕세종>에서 표현되고 있는 원경왕후의 태도는 실제의 역사적 사실을 비교적 잘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차남이 보위 잇기 희망한 강씨 부인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원경왕후와 너무나도 상반되는 여인이 있었다는 점이다. 그는 바로 <좌전>에 나오는 정(鄭)나라 무공(武公)의 부인인 강씨 여인이다. <좌전>은 춘추시대에 노(魯)나라 사관인 좌구명이 지은 역사책이다.


현대 중국인들은 학교교육 등을 통해 무공과 강씨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다. <좌전>에 나오는 강씨 여인의 이야기를 통해, 이 여인이 원경왕후와 얼마나 대조적이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 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로 인해 어떤 결과가 초래되었는지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정나라 군주인 무공(武公)이 신(申)나라 국군(國君, 제후의 개념)의 딸인 강씨 여인과 결혼했다. 일종의 정략결혼이라고도 볼 수 있는 그런 결합이었다. 이때가 기원전 8세기 후반이었다. 정나라는 주나라의 제후국으로서 5등급(공·후·자·작·남)의 제후국 중에서 1등급인 공국(公國)에 속하는 나라였다.


무공과 강씨 사이에서는 장공(莊公)과 공숙단(共叔段)이라는 아들들이 태어났다. 장공이 맏아들이었으므로 그가 무공의 보위를 계승하는 것이 마땅했다.

그런데 보위 계승권자를 놓고 무공과 강씨 사이에 의견차가 생겼다. 아버지인 무공은 당연히 맏아들이 자신을 계승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어머니인 강씨는 그렇지 않았다. 강씨는 차남인 공숙단이 보위를 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좌전> 기록을 근거로 추정할 때에, 장공은 성격도 원만하고 멀리 내다볼 줄 아는 사람이었다. 야심적이고 도발적인 공숙단과 비교할 때에 오히려 장공 같은 인물이 지도자로서는 더 적합하지 않았을까? 지도자의 품성으로서 덕을 최우선시하는 동아시아 사회의 전통을 고려할 때에, 공숙단보다는 장공 같은 인물이 보다 더 훌륭한 왕재(王才)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장공은 장남이고 공숙단은 차남이었다. 따라서 특별한 하자가 없는 한 장공이 다음 보위를 잇는 게 원칙이었다.

그런데도 그의 어머니 강씨는 차남이 보위를 잇기를 희망했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장남이 미웠기 때문이다. 왜 미웠을까? 그 답은 <좌전>에 적혀 있다. '장공오생'(莊公寤生), 즉 장공(莊公)이 오(寤)의 상태로 태어났기(生) 때문이다. 

뱃속에서 나올 때에 발이 먼저 나온 큰아들

 강씨 부인의 고사를 소개하고 있는 <좌전>. 이 책은 <춘추좌전> 등 여러 가지 표현으로 불리고 있다.
강씨 부인의 고사를 소개하고 있는 <좌전>. 이 책은 <춘추좌전> 등 여러 가지 표현으로 불리고 있다.

오(寤)란 무엇일까? 오늘날에는 '오'가 '잠에서 깨다' 혹은 '깨닫다'의 의미를 띠고 있지만, 춘추시대에는 오(牾)의 의미로도 사용되고 있었다. '거스르다'라는 뜻의 오(牾)는 신생아가 거꾸로 나왔음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이는 장공이 어머니 뱃속에서 나올 때에 발이 먼저 나왔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만큼 난산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어머니에게 고통을 안겨주면서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에 그는 어머니로부터 미움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좌전>에서는 바로 그 때문에 강씨가 장남을 미워했다고 한다. 잘 이해되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 처지가 아니니 강씨를 뭐라 나무라기는 힘들 것 같다. 

그런데 강씨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한걸음 더 나아가 장남을 정치적으로 제거하려고까지 했다. 그래서 강씨는 남편에게 제안했다. 둘째한테 당신 자리를 물려주자고 말이다. 신나라 국군(國君)의 딸이라는 든든한 배경이 있었기에 보위계승 문제에도 간여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남편인 무공은 부인의 제안을 거절하고 장남인 장공에게 보위를 물려주었다. 무공이 그렇게 한 것은 장공에게 특별한 결격사유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공숙단이 보위를 이을 경우 처가 쪽인 신나라의 입김이 세질 수 있음을 우려했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장남을 제거하려는 어머니

결국 보위는 순리대로 장남에게 계승되었다. 하지만, 그걸로 문제가 끝나지는 않았다. 강씨의 태도에서 짐작할 수 있는 바와 같이, 강씨는 두 아들을 키울 때에 그들 사이의 서열을 명확히 세워주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장남을 미워하고 차남을 편애한 것을 볼 때에, 강씨가 차남 앞에서 장남의 권위를 세워주지 않았을 것임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 점은 장공의 보위계승 후에 불행의 씨앗이 되고 말았다. 장공으로부터 경(京)이라는 읍에 대한 통치권을 얻은 공숙단이 평소에 형을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다가 결국 형에게 반기를 들고 만 것이다. 형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어머니에게서 받은 영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의 법제에 따르면, 신하의 성벽은 주군의 성벽보다 3분의 1 혹은 5분의 1 또는 9분의 1 정도 낮게 쌓아야만 했다. 분봉(分封) 받은 지역의 규모에 따라 성벽의 높이를 조절했던 것이다.

공숙단이 받은 경(京)이라는 읍은 어느 경우에 해당했는지 알 길이 없지만, <좌전>에서는 공숙단이 그 높이를 준수하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관념으로 볼 때, 규정보다 더 높게 성벽을 쌓는 것은 주군에 대한 도전의 표명이었다. 그런데도 장공은 그런 동생을 묵인했다.

이렇게 평소 형을 무시하던 공숙단은 결국 형의 자리까지 탐내고 말았다. 군대를 이끌고 형과 전쟁을 벌인 것이다. 강씨가 장공을 차별하고 공숙단을 편애할 때부터 이미 예고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더 황당한 것은 어머니 강씨가 그런 동생을 도왔다는 점이다. 공숙단의 군대가 정나라 도성을 공격할 때에 성문을 열어주려 한 사람이 바로 강씨였다. 일종의 내응(內應)을 시도한 것이다. 

그러나 장공은 침묵 속에 상황을 관망하고 있었다. 공숙단이 사거리 안에 들어오기만을 기다리던 장공은, 신하인 공자여(公子呂)에게 명해 200백승(乘)의 병력, 즉 600명의 갑사(甲士, 갑옷을 입은 군사)와 1만4400명의 보병을 거느리고 공숙단을 물리치도록 했다. 결국 장공의 군대가 승리했고 공숙단은 망명의 길을 떠나고 말았다. 이때가 기원전 722년이었다. 

어머니와 동생을 상대로 이긴 '상처뿐인 영광'

정나라 장공은 어머니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보위에 올랐고 또 동생의 도전에도 불구하고 보위를 지켰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처뿐인 영광이었다. 그것은 남도 아닌 어머니와 동생을 상대로 거둔 승리에 불과했다.

이 집안의 불행은 근본적으로 어머니 강씨 때문에 생겼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부모가 서열을 명확히 세워주지 않을 경우 자식들은 결국 주먹을 들고 서로 싸울 수밖에 없다. 그렇게 싸워서라도 서열이 정해지면 좋겠지만, 그렇지도 못할 경우에 그런 형제들은 남남보다도 더 못한 관계가 될 수밖에 없다.

강씨 부인은 바로 그 점에서 현명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합리적 사유도 없이 차남에게 보위를 물려주려 한 그의 어리석음은 결국 아들들 간의 전쟁과 차남의 망명을 초래하고 말았다. 그는 장남에게는 정신적 상처를, 차남에게는 정치적 불행을 안겨준 '나쁜 어머니'가 되고 말았다.

왕실 평화 위해 장남을 왕위에 앉히려 한 원경왕후

그러나 이방원의 부인 원경왕후는 강씨 부인과는 다른 사람이었다. 결과적으로는 제3남인 충녕대군이 왕이 되긴 했지만, 그와 그의 남편은 어떻게든 장남을 왕위에 앉히려고 노력했다. 그것은 꼭 양녕대군을 더 사랑해서가 아니라 자식들 간의 평화, 왕실의 평화를 위해서였다고 봐야 할 것이다.

만약 원경왕후가 정나라 강씨 부인처럼 자식들 간의 서열을 무시했다면, 충녕의 즉위 후에 조선왕실에 어떤 피바람이 불었을지 상상하기 힘들 것이다. 평소에 부모로부터 형의 권위를 인정하도록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임금이 된 후의 충녕이 그토록 양녕대군을 챙기고 보호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자식들 간의 우애를 지키려고 노력한 점에서는 원경왕후와 그의 남편이 결과적으로 성공했다고 보아도 될 것이다. 셋째 아들이 왕이 된 후에도 아들들 간에 유혈쟁투가 벌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원경왕후 부부가 아들들 간의 화목을 위해 '지속적으로' 그리고 '끝까지'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대왕세종 #대왕 세종 #원경왕후 #좌전 #정무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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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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