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에서 전개되고 있는 원빈홍씨·혜경궁 대 효의황후·성송연의 대결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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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실제 역사 속에서 혜경궁과 효의황후 사이에 정말로 갈등이 존재했을까? 역사 기록에 따르면 한없이 조용하고 품격 높았던 두 여인이 정말로 그런 갈등을 빚은 걸까?
혜경궁과 효의황후의 관계는 오늘날의 <이산> 시청자들뿐만 아니라 18·19세기 조선인들에게도 관심의 대상이 된 것으로 보인다.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을까? 그것은 혜경궁 홍씨가 죽은 뒤인 순조 16년(1816)에 기록된 홍씨의 지문(誌文)을 통해서 추론할 수 있는 일이다. 지문이란 죽은 사람에 관한 이러저러한 정보들을 기록한 문서를 말한다.
이 지문을 작성한 사람은 순조의 장인인 김조순(1765~1832년)이었다.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기초를 닦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인물이다. 어명을 받아 지문을 작성한 김조순은 혜경궁 홍씨에 관해 칭찬 일색으로 일관했다. 기본적인 사실관계야 틀리지 않지만, 상당히 과장된 미사여구로 혜경궁 홍씨를 잔뜩 띄워주고 있다.
이렇게 순풍에 돛 단 듯이 혜경궁을 찬미하던 김조순은 지문의 끝부분에 가서 갑자기 잠시 '멈칫' 한다. 바로 혜경궁·효의황후·원빈홍씨 3자가 관련된 부분에서 그가 속도를 확 줄인 것이다. 속도가 줄어들었다는 것은 갑자기 말이 많아졌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고속도로에서 시속 100km로 달리다가 전방의 장애물을 발견하고는 갑자기 브레이크를 밟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뭔가 조심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조선정부 공식 기록에는 없는 '고부갈등'세 사람에 관한 부분에 이르자, 김조순은 갑자기 말이 많아진다. 앞부분에서는 혜경궁 홍씨에 대한 칭찬 일색으로 술술 잘 나가더니, 이 부분에 이르러서는 '칭찬은 하되 설명을 좀 덧붙이자'는 쪽으로 분위기가 바뀐 것이다.
이 부분에서마저 칭찬 일색으로 나갔다가는 자칫 독자들이 자신의 글 전체를 불신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한 듯하다. 문제의 부분은 다음과 같다.
"홍국영의 악이 무르익었을 때에 그 누이동생을 궁중에 들이고는 원빈이라고 일컬으면서 분수에 넘는 일을 넘보았으므로 중궁(효의황후, 인용자 주. 이하 같음)이 여러 차례 위태로운 지경에 놓였다. 하지만 빈(혜경궁)께서는 간사한 싹을 미리 꺾어 극력 보호함으로써 마침내 안전하게 되었다. 그런데 궁중의 일은 은밀하여 아는 이가 없기 때문에, 불만을 품은 무리가 도리어 간사한 말을 퍼뜨리기를 '중궁이 위험에 빠진 것은 자궁(혜경궁)이 주장하여 꾸며낸 일'이라고 하였다. 아! 이는 하늘마저 속이려는 짓이니, 분명히 따지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앞부분 같았으면, 그냥 "혜경궁은 효의황후를 극진히 사랑한 자애로운 시어머니였다"라고 한마디 하고 넘어갔을 것이다. 그런데 김조순은 이 부분에 이르러 갑자기 한없이 신중해졌다. 혜경궁과 효의황후의 관계에 대한 세간의 부정적인 소문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는 혜경궁·효의황후·원빈홍씨 사이에 그 만큼 민감한 문제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김조순의 말에 따르면, 누이인 원빈 홍씨를 후궁으로 들인 홍국영 때문에 중전인 효의황후가 여러 차례에 걸쳐 위험에 빠졌지만, 그때마다 중전을 위기에서 건져준 사람이 바로 혜경궁 홍씨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조선정부의 공식 기록에 의할 것 같으면, 혜경궁 홍씨와 효의황후 사이에서는 고부갈등이 없었다는 말이 된다. 드라마에서는 혜경궁이 원빈 편에 선 것으로 묘사되고 있지만, <순조실록>에 실린 '혜경궁 홍씨 지문'에서는 위와 같이 혜경궁이 효의황후 편에 서서 원빈에게 맞섰다고 기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