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드라마의 주인공은 모두 세 명이다.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 이재오 의원, 그리고 이명박 대통령이다.
박 전 대표가 먼저 이재오 의원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박 전 대표로서는 이명박 대통령을 겨냥할 이유가 없다. 7월 전당대회만 놓고 본다면 이미 청와대로 간 이 대통령을 직접 겨냥하는 것이 크게 도움이 될 리 없다.
이재오 의원의 총구는 박 전 대표가 아닌 이상득 부의장과 이명박 대통령을 향했다. 공천갈등과 내각 인사 파문으로 인한 여권의 지지도 하락 책임을 권부의 핵심에게 떠넘긴 것이다. 여기에 강재섭 대표가 갑자기 '조연'으로 뛰어들었다. 이 대통령의 신임을 등에 업고 7월 전당대회에서 주도권을 잡겠다는 의지로 해석된다.
23일 박근혜 전 대표의 공천 비판과 당 지도부 책임론 주장, 강재섭 대표의 불출마 선언, 정두언 등 '이명박계' 의원들의 이상득 부의장 용퇴론 제기, 이재오 의원 청와대 면담 등 일련의 상황들은 각자가 자신을 주인공으로 그린 시나리오가 어긋나면서 벌어진 일들이다. 그러나 이들 모두 코 앞에 둔 총선을 넘어 7월 전당대회를 바라보고 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당내 공천 갈등을 강 건너 불구경 하던 청와대 역시 예상치 못한 시나리오에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박 전 대표는 그렇다 치더라도, 누구보다 믿었던 핵심 측근들의 '도발'이라는 점에서 이 대통령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불청객'의 방문에 당혹스러운 이 대통령
휴일이었던 23일 벌어진 사건 중 최고의 하이라이트는 이재오 의원의 청와대 방문이었다. 당이 공천 갈등의 책임론을 두고 한창 민감해져 있는 상황에서 이 의원이 이 대통령을 직접 만나려고 했다는 시도 자체가 의외였다. 자칫 일각에서 제기하고 있는 이명박 대통령의 공천 개입설을 공식화하는 행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 자리에서 이 의원은 이 대통령의 친형인 이상득 국회부의장과 자신의 동반 불출마를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겉으로는 이상득 부의장을 겨냥했지만, '형님 공천'이라는 비판이 제기된 상황에서 사실상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직격탄을 의미한다.
파문이 확산되자, 이 의원은 24일 보도자료를 통해 총선 동반 불출마 얘기를 원점으로 되돌렸다. "이 대통령과의 회동에서 당내 현황은 논의했지만, (두 사람의) 동반 불출마는 사실과 다르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이 의원의 한 측근은 "현재 수도권을 중심으로 총선 판세가 대단히 어렵게 돌아가고 있다"며 "이 의원은 대통령을 만나 당 화합과 총선에서의 안정의석 확보를 위한 수습책을 논의했고, 이상득 부의장과 함께 불출마하는 방안은 여러가지 수습책 중 하나로 거론된 것일 뿐 확정된 것은 아니었다"고 설명했다.
이 의원 측 설명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민감한 시기에 청와대를 방문해 총선을 화두로 얘기를 꺼낸 것 자체는 이 대통령에게 적지 않은 부담이다. 헌법에 보장된 대통령의 선거 중립 의무를 정면으로 위배했다는 지적이 제기될 수도 있다.
때문에 청와대는 이 대통령과 이재오 의원의 면담 여부 자체를 "확인해 줄 수 없다"는 입장이다. 박재완 청와대 정무수석은 이날 <오마이뉴스>와의 전화통화에서 "이 대통령과 이 의원이 어떤 얘기를 나눴느냐"는 질문에 "(대통령과 이 의원이) 만난 사실이 있는지조차 모른다"고 답했다.
"이재오 의원의 '동반 불출마' 제안에 대한 이 대통령의 입장은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해서도 "아무 것도 알 수 없다"며 전화를 끊었다. 다른 청와대 참모들 역시 이 의원의 청와대 방문이나 당내 문제에 대해 일제히 입을 굳게 닫았다.
다만 청와대는 이번 당내 공천 문제와 무관하다는 원칙론적인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전날 정두언 의원 등 수도권 출마자들의 청와대 사과 요구에 대해 "모든 책임을 청와대로 돌리는 것은 지나치다"고 비판했다. 이 부의장에 대한 불출마 주장에 대해서는 "청와대가 아니라 당과 이상득 부의장 본인이 결정할 문제"라며 "청와대는 공천 문제에 전혀 개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감 놔라, 배 놔라' 할 입장이 아니다"고 반박했다.
당내 일각에서는 이재오 의원과 수도권 출마자들의 행태를 "대통령에 대한 중대한 도전"으로 규정하며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한 중진 의원은 "이재오 의원이 이 대통령을 만난 것은 대단히 부적절하다"며 "지역구에서 상황이 좋지 않으니까, 불출마의 명분을 찾기 위해 당을 권력 투쟁의 장으로 끌고가고, 심지어 대통령까지 물고 늘어지는 것은 옳지 않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설사 대통령이 당 공천에 관여했다고 하더라도, 여당의 책임있는 의원이 대통령을 물고 들어가는 것은 벼랑 끝까지 가겠다는 심사"라고 비판했다.
"박근혜보다 더 미운 이재오·정두언"
가장 당혹스러운 사람은 역시 이명박 대통령이다. 박근혜 전 대표나 이재오 의원만큼이나 자기가 구상했던 시나리오가 어긋났다. 대선 직후만 해도 200석 이상 차지할 수 있다고 판단한 총선이었다. 물론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치른다는 전제에서다. 그러나 그 목표는 170~180석으로 수정되더니, 지금은 과반 의석 확보도 위험한 상황이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시절의 정책 혼선이나 내각 인사 파문, 국제 경기 악화와 국내 물가 상승은 이명박 정부의 지지율을 50% 대로 추락시켰다. 여기에 당내 공천 파문이 겹쳤고, '친박근혜' 의원들의 이탈이 있었다. 특히 이재오·정두언 의원 등 자신을 대통령으로 만드는 데 공을 세웠던 최측근들의 칼날이 지금은 자신을 향하고 있다.
이 모든 일이 대통령으로서의 권력이 가장 강할 때라고 하는 지난 한 달간에 이뤄졌다. 과거 권위주의 정부까지는 아니라고 해도, 최소한의 대통령 권력을 두려워했다면 차마 있을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그러다보니 여권의 모든 힘이 대통령에게 집중되지 못한 채 분산됐고, 총선 역시 이미 대통령의 브랜드로 치를 수 없게 됐다. 대선후보 경쟁자였던 박근혜 전 대표는 그렇다치더라도, 이재오·정두언 의원의 경우는 대통령에게 힘이 되기 보다는 오히려 벼랑 끝으로 등을 떠밀고 있는 형국이다. 그래서 "박 전 대표보다 이재오·정두언 의원이 더 미울 수밖에 없다."(청와대 한 관계자)
상황이 이렇게 된 데에는 이 대통령의 정치력 부재도 한 몫 했다. 이 대통령은 평소 '여의도 정치 탈피'를 강조했다. 그러나 '모르면 당한다'고 했다. 사실상 여의도 정치는 이재오 의원에게 맡겨놨지만, 이미 이 의원의 권력 욕구는 이 대통령의 통제 범위를 벗어났다.
이 대통령이 '친형' 이상득 부의장의 불출마를 이끌어낸다고 한들, 이미 당을 장악해 나갈 원동력을 상실한 뒤다. 그나마 이 대통령이 당내에서 붙잡을 수 있는 끈은 강재섭 대표다. 강 대표 역시 7월 전당대회를 앞두고 혼자 힘으로 계파를 만들 수 없다면, 이 대통령을 배경으로 세우는 것이 나쁘지 않은 상황이다.
이 대통령은 전날 강재섭 대표가 총선 불출마 선언을 한 직후 직접 전화를 걸어 "왜 대표가 책임을 지려고 하느냐"며 '불출마' 결정 재고를 당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강 대표는 "대통령이 '공천은 공심위에서 했는데 왜 대표가 책임을 지느냐', '대통령도 자기 팔이 잘려나가 안타까운 게 수도 없는데 왜 대표가 책임을 지려고 하느냐'고 하더라"며 "저는 '책임을 지는 게 아니라 수습을 해야하는 입장'이라고, (불출마 재고는) 이미 물건너간 얘기라고 했다"고 전했다.
이 대통령은 24일 오전 부산에서 진행되는 국토해양부 업무보고 외에 공식일정을 잡지 않았다. 정국 타개책에 대한 구상에 몰두할 것으로 보인다. 오는 25일 예정된 강재섭 대표와의 정례 회동에서 당내 문제를 수습하기 위해 어떤 대책을 내놓을 지 주목된다.
2008.03.24 15:37 | ⓒ 2008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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