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가 차려준 밥상을 차지 말라"

[서평] 김영조의 <맛깔스런 우리 문화 속풀이 31가지>

등록 2008.03.25 10:19수정 2008.03.25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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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 31가지> 김영조 지음
<우리문화 31가지>김영조 지음이지 출판
저는 흔히들 개량한복이라고 불리곤 하는 생활한복을 입어본 적이 없습니다. 입을 기회도 없었지만, 인식조차 없었기 때문입니다. 뉘앙스가 별로 좋지 않게 다가오는 '개량'이라는 단어가 붙은 '개량한복'이라는 어휘만 알고 지냈습니다. 솔직히 조금 특별한 사람들이나, 개성 강한 사람이 조금은 오기로 입는 옷이라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김영조 기자의 책 <맛깔스런 우리 문화 속풀이 31가지>를 읽고 편견이 많이 씻겼습니다. 인식이 생겼다고나 할까요. 또한 생활한복이라는 좋은 어휘를 알아 다행입니다. 생활한복 입는 당사자들도 사실은 무척 편해서 입고 다니는 것이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잘 몰랐던 우리 한복의 멋과 실용성을 알게 되면서 슬며시 한 번 입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고, 이내 가끔씩 이 옷을 입고 일터에 나가도 되겠다는 바람까지 지녀보게 됐습니다. 아직 희망사항이기는 하지만요.

건강에 안 좋을 몸에 딱 붙는 청바지 입은 젊은이들을 '딱하게' 쳐다볼, 그러면서도 한복처럼 품이 넓은 서양 힙합바지를 젊은이들이 불편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비유할 정도로 이 책은 '그저 우리 것이 소중하고 좋으니 잘 누리자'가 아닌 좋을 만하니까 좋다는, 설득력 있는 논리전개로 진행됩니다. 그런 식의 '속풀이'입니다.

더욱이 "생활한복을 15년 전부터 입으면서 '건강하게' 살고 있다" 고백하고 있고, 우리 문화가 살아있는 전국을 누비며 탐색했으며, 수많은 참고문헌을 찾아 관련 증거들을 모아놨으니 믿음직스럽습니다. 그렇게 써서 <오마이뉴스>에 올린 글들이 600개가 넘습니다.

이 책 출판 기념회 자리에서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도 그런 점을 언급했습니다. "김영조 기자님 보면서 우리 문화에 대한 사랑 알게 됐는데 이 자리에 와보니 더 실감하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김영조 기자의 <맛깔스런 우리문화 속풀이 31가지> 출판기념회는 그가 인연을 맺은 전통문화 명인들의 공연 마당을 겸한 자리였고, 수많은 관련인사들도 참석했기 때문입니다.

선암사 뒷간 전라도 승주의 선암사 화장실. 조계산 아래에 위치한다. '뒤깐'이라는 작은 간판이 눈길을 끈다.
선암사 뒷간전라도 승주의 선암사 화장실. 조계산 아래에 위치한다. '뒤깐'이라는 작은 간판이 눈길을 끈다. 박태신

아름다운 순환


오래전 소설가 김훈의 <자전거 여행>을 통해 알게 된 선암사 '뒷간'을 이 책을 통해 다시 접했습니다. 저도 세 번인가 이곳에 들렀습니다. 남녀가 같이 '볼일' 보면서 대화도 가능한 내부 구조에다 쌓인 것들은 그대로 활용되는 쓰임새, 거기에다 건축상 품격까지 지녔으니 유명할 만하지요.

그런데 책 속에서 이곳을 다루는 부분의 꼭지명이 '뒷간, 밥을 다시 생산하는 시설'입니다. 눈치채셨겠지요. 거름으로 이용되던 예전 우리네 뒷간 '생산품'이 연유가 된 제목입니다만 이런 꼭지명을 생각해내긴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책을 읽다가 <똥벼락>이라는 동화가 생각났습니다. 똥을 재산처럼 여기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큰일' 볼 기미가 느껴져 자기 집으로 가던 돌쇠가 도깨비를 만나면서 겪는 이야기입니다. 돌쇠는 똥 때문에 부자가 됩니다. 그만큼 귀한 것이었지만, 지금은 도시든 시골이든 정화되고 분해돼 없어져야 할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분해된다 해도 강으로 바다로 땅으로, 즉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쓸모없는 존재로, 화학물질 가득 담은 채로 돌아갑니다. 그렇지만 우리네 뒷간의 생산물은 책에서 언급했듯이 '음식→똥→거름→음식'의 순환방식을 지닙니다.

'향'에 대한 설명도 푸근합니다. 모깃불, 솔잎 끼어든 송편, 쑥이나 창포물도 우리네 향 문화의 하나라는 사실도 알게 됩니다. '향(香)'이란 글자가 '벼 화(禾)' 자에 '날 일(日)' 자가 보태졌기에 '벼가 익어가는 냄새' 즉 사람을 살리는 물질에서 향기가 난다는 뜻으로 해석을 합니다. '향기'는 긍정적인 의미, '냄새'는 부정적인 의미가 강하다는 것을 이런 점에서 다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김영조 기자의 우리 문화에는 누룽지도 들어 있습니다. <동의보감>에 누룽지가 약으로 쓰인다고 나올 정도입니다. 소화흡수에도 좋고, 씹을 때의 턱관절 운동 덕분에 뇌가 자극을 받아 결국 치매도 예방하게 만든답니다. 책에서 언급한, 누룽지를 좋아한다는 최일도 목사님의 다음의 글귀가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세상엔 때깔 좋은 흰밥 같은 사람도 있지만 그 밥이 맛있게 뜸들 때까지 뜨거운 바닥을 온몸으로 감싸안으며 자신을 태우는 누룽지 같은 사람도 있다. 모두 흰밥처럼 살고 싶어 할 때 밑바닥에서 자신을 태워 누룽지같이 사는 사람도 필요하리라."

우리 예전 것은 왜 이렇게 좋기만 한 걸까요. 현대문명은 인위적으로 모든 것을 조절하려는 문명입니다. 다행히 그 조절이 자연과 친근한 생리를 가진 것인 경우에는 지혜가 되겠지만, 그렇지 못한 것은 자연을 거슬러서 해결하는 방식입니다.

애써 심은 전봇대를 뽑으면 미관은 좋을지 모르지만 이것을 대체할 지중화 사업은 땅을 파헤치고 많은 돈을 들여야 할 큰 일입니다. 도심 속에 깨끗한 물이 흐르게 조성한 청계천도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의 자연스러운 흐름이 아니라 매일 수많은 물을 인위적으로 흘러내려가게 하는 반자연적인 산물입니다. 한반도 대운하는 말을 해서 무엇 하겠습니까. 고속철도도 땅 넓은 나라에서나 필요할, 이제 다 만들어졌으니 통일이 되고 유라시아철도로까지 연결될 때라야 빛을 발휘할, 조금은 너무 앞서 간 문명입니다.

고속도로는 차를 타고 가장 빨리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지만, 불행하게도 빨리 벗어나면 좋은 그런 공간이기도 합니다. 편리한 곳이지만 고속도로에 오래 머물고 싶어 하는 사람은 드물 것입니다. 현대문명에 그런 요소들이 많습니다. 어쩔 수 없이 그런 공간에 살지만, 비정형이고 곡선이 넘치고 자연을 따르고 사람을 살리는 진보가 있는 우리 문화를 조금 더 생활 속으로 끌어들일 일입니다.

            
광화문 교보빌딩 내 레스토랑 안의 훈민정음 조형판 벽면에 훈민정음의 서두를 활자로 붙여 놓은 이색적인 풍경.
광화문 교보빌딩 내 레스토랑 안의 훈민정음 조형판벽면에 훈민정음의 서두를 활자로 붙여 놓은 이색적인 풍경. 박태신

잔칫상을 제발로 차버리지 마소

우리 문화를 이야기하면서 한글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새삼 세종임금이 얼마나 위대한 임금인지 잘 알게 됐습니다. 저도 집현전 학자들의 공이 컸다는 생각을 지니고 살았습니다만 그건 오해였습니다. 세종임금은 음성학, 음운학, 문자학에 뛰어났고 너무나 고심을 하며 훈민정음을 만드는 데 몰두하는 바람에 안질까지 걸렸을 정도였습니다. 신하들의 반발과 대국인 명나라의 의심을 지혜롭게 극복했다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지금 우리는 세종임금의 덕을 톡톡히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세계 언어학자들이 가장 우수한 언어로 우리 한글을 지목합니다. 우리나라가 IT 강국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컴퓨터나 휴대폰 자판에 한글 자모가 효율적으로 배치되는 이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한글은 또한 소리나는 대로 글자를 쓸 수 있는 최고의 글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지은이는 그럽니다. “제발 세종임금이 차려주신 잔칫상을 제 발로 차버리는 어리석음을 버렸으면 좋겠다”라고요. 올해 스승의 날 5월 15일은 또한 세종임금의 탄생일임을 기억하는 날이었으면 합니다. 앞으로 ‘5대 한(韓) 브랜드’인 한글, 한지, 한옥, 한식, 한복이 나라 안팎에서 더 소중히 가꾸어졌으면 합니다.

그리고 이 책에는 소중한 우리말 보기들이 많이 들어 있습니다. 꽃 향기에 취하는 말 ‘꽃멀미’는 어떤가요. ‘여우비’는 잘 알려져 있지만, ‘떡비’, ‘잠비’는 어떤가요. 물기를 머금어 척척 들러붙는 눈송이는 ‘떡눈’이라 한다지요. 솔개가 날 때 땅에 생기는 작은 그림자 같은 구름을 ‘솔개그늘’이라 한다지요.

이삼 스님 대금 '여음적'을 연주하고 있는 이삼 스님
이삼 스님대금 '여음적'을 연주하고 있는 이삼 스님박태신

우리 가락 우리 소리

지은이는 우리 악기를 세세히 설명했습니다. 거문고를 중국의 ‘금’과 다른 우리 고유의 악기라 말하면서, 거문고를 즐기며 덕을 쌓는 선비들의 모습을 인용했는데 저로서는 처음 듣는 말이지만 정말 공감하고 싶은 말입니다. “한 선비가 독서를 하면 혜택이 온 세상에 미치고, 보람이 만세에 드리워진다”, “선비는 편안한 마음으로 도를 즐겨 지키는 것인데 이것이 자신의 즐거움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기쁘게 함이다”라는 말이 그것입니다. 이 시대 지식인의 모습도 이래야 하겠지요.

대금을 연주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호흡법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출판기념회 날 대금 산조와 대금 독주를 들었는데, 지짓대를 이용해 한 손으로 대금을 연주하신 스님의 대금이 ‘여음적’임을 이 책을 통해 알았습니다. 순수 한쪽 팔로 만드셨다 합니다. 이삼 스님은 교통사고로 한쪽 팔을 못 쓰십니다.

판소리의 미학을 빼놓을 수 없지요. 판소리는 서양 성악과 달리 소리꾼 혼자서 성부의 구분 없이 혼자 다 해야 하는 고된 작업입니다. 고수의 북반주에 따라 창과 아니리를 반복하며 거친 길을 개척해 나가는 소리 모험입니다. ‘득음’은 그래서 저 너머의 소리를 얻는 일입니다.

판소리로 제가 아는 것은 영화로도 유명한 구슬픈 가락의 ‘서편제’뿐입니다. 영화 <서편제> 중 가족 셋이 기다란 굽이굽이 동네 어귀를 거닐며 ‘진도아리랑’을 부르는 장면은 잊지 못할 명장면입니다. 나중에 소리꾼 유봉은 말합니다.

한에 파묻히지 말고 그 한을 넘어서는 소리를 해라…동편제는 무겁고 맺음새가 분명하다면 서편제는 애절하고 정한이 많다고들 하지. 하지만 한을 넘어서게 되면 동편제도 서편제도 없고 득음의 경지만 있을 뿐이다.”

그 <진도아리랑>을 다시 듣습니다. “춥냐 덥냐 내품 안으로 들어라…”

문화의 가치

유기농 방식도 하나 새롭게 알았습니다. 배밭 가꿀 때 배나무 밑에 있는 잡풀을 뽑지 않는 것이 그것입니다. 벌레들이 살 수 있는 공간을 남겨두어 배나무까지 올라갈 필요가 없게 하는 것입니다 벌레도 살 공간을 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의 답변을 지은이는 듣습니다. "풀도 먹고 살아야죠" 조금은 불편하게 조금은 더럽게 사는 것이 사실은 속 편한 일인데 우리는 멸균, 청결, 적자생존 이념을 머릿속 골수에 패이도록 지니고 삽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생활 속에서 말끔할 수 있는 시간은 적은 양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온갖 세균 속에서 살고 있으니까요.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더러워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반복해 말하지만 차라리 우리가 나쁘다고 더럽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약간씩 허용하는 넉넉함이 우리 건강에도 좋습니다. 우리 몸에 항체를 지니고 살 듯 벌레도, 퇴비도, 약간의 불편도 허용하는 삶이 건강한 삶입니다.

우리 문화를 전하는 방식은 여럿 있겠으나, 김영조 기자는 날카로운 비판보다는 논리와 현실성, 실행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우리 문화를 소개합니다. 서양화된 현대의 삶에서 올곧게 우리 문화만을 강권하는 것은 선각자 몇 분이나 하실 일입니다.

다수를 설득시키기 위해서는 '눈에 보이는' 설득력을 보여줘야 합니다. 그저 서양문화를 비판만 하지 않습니다. 그저 좋은 것을 좋다고 말할 뿐입니다. 그리고 누릴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다른 이들도 선택할 여유를 갖습니다. 이 책에 그런 것들이 있습니다.

일반적인 문화의 차원에서도 그렇습니다. 내가 좋다고 누린 문화를 남들도 누리게 권하고 보여줘야 합니다. 그러나 자발적으로 그렇게 하도록 해야 한다고 봅니다. 마음이 동하면 행동도 달라진다고 봅니다. 요즈음 많이 발생하는 가슴 아픈 사건들도 윤리의식보다는 넓은 문화의 누림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싶습니다.

사람과 자연을 살리게 하는 문화를 자주 누렸다면, 명화 같은 아름다운 예술품을 자주 접해 인간은 악하지만 예술성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는 점을 알았다면, 돈보다 더 가치있는 것들이 무수히 많다는 것을 교감 속에서 알 기회가 많았다면, 자신이 소중하듯 남들도 소중하고 남들이 소중하듯 자신도 소중하다는 글귀를 책을 통해 가끔씩이라도 읽었다면, 가난하게 살더라도 아름다운 풍광 넓은 세상 보는 여행을 조금 더 했더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책 속에 언급한 한 스님의 말에 눈길이 꽂힙니다.

"우리 겨레는 숙우(熟盂 : 끓인 물을 식히는 대접)에 찻잎이 천천히 퍼지면서 향기와 맛을 남기는 가운데 자신을 돌아보아 밝음과 어두움을 보고 자신의 분에 맞는 푸근한 삶의 지름길을 터득하였다."

힘든 길이지만 맛깔스럽게 살아볼 일입니다.

맛깔스런 우리문화 속풀이 31가지

김영조 지음,
이지출판, 2008


#김영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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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어 번역가이자, 산문 쓰기를 즐기는 자칭 낭만주의자입니다. ‘오마이뉴스’에 여행, 책 소개, 전시 평 등의 글을 썼습니다. 『보따니스트』 등 다섯 권의 번역서가 있고, 다음 ‘브런치’ 작가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https://brunch.co.kr/@brunocloud). 번역은 지금 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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