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울로 도계가 나는 바람에 다른 동네가 되었네

[2008년 제3차 충북 도계 탐사 ②] 적성교에서 모녀티까지

등록 2008.03.25 13:45수정 2008.04.01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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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봉 가든의 칼국수 맛에 모두 반하고 말았다

 충청북도 단양군의 상징 온달과 평강
충청북도 단양군의 상징 온달과 평강이상기

식당에 들어가자 박연수 대장이 칼국수를 시킨다. 이곳의 칼국수는 송이 칼국수로 6000원이나 한다. 이 식당의 점심 메뉴 중 꽤 비싼 음식이다. 다들 점심을 싸 왔으니 밥을 국수에 말아먹을 요량으로 칼국수를 시킨 것이다. 이곳 신선봉 가든은 방곡리의 가장 끝에 있는데도 찾는 사람이 꽤 많다. 이 화백이 제대로 된 칼국수일까 걱정을 하기도 한다.


한 15분 기다렸을까? 칼국수가 나온다. 기다리는 동안 배가 고픈 대원들은 이미 도시락을 꺼내 밥을 먹기도 한다. 칼국수가 나오자 다들 뜨거운 칼국수를 한 젓갈씩 입에 넣는다. 칼국수를 좋아하는 이 화백이 '어 콩가루가 들어간 게 제대론데' 하고 한 마디 한다. 모두들 칼국수가 맛있다고 야단이다. 칼국수에 들어간 송이가 국수의 맛을 향기롭게 한다. 또 함께 나온 김치 맛이 참 좋다.

 적성교 건너편에는 문경지역임을 알리는 聞喜慶瑞 표지석이 보인다.
적성교 건너편에는 문경지역임을 알리는 聞喜慶瑞 표지석이 보인다.이상기

봄에 푸성귀를 먹기 어려운데 어디서 구했는지 아주 싱싱하다. 또 주인장이 더 먹고 싶으면 추가로 더 줄 수 있다고 한다. 인심까지 후하다. 나도 칼국수에 밥을 말아 다 먹고 나서 덤으로 주는 칼국수를 조금 더 먹는다. 도계 탐사를 하면서 이렇게 여유 있게 뜨거운 음식을 먹어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대부분 산 속에서 도시락으로 점심을 해결해왔기 때문이다. 도계가 식당 옆으로 지나가니 이렇게 맛있는 점심을 먹게 되는 행운도 생기는가 보다.

또 점심을 먹는데 이곳 주민들이 더덕과 도라지를 캐 와 판다. 밥을 먼저 먹은 사람들이 주변으로 몰려든다. 더덕은 1㎏에 만 원이고 도라지는 1㎏에 오천 원이란다. 가격을 아는 사람들이 아주 싸다고 하면서 산다. 더덕은 순식간에 다 팔리고 도라지도 조금 있다 다 팔린다. 도라지를 마지막에 산 김태경 대원은 떨이라고 해서 양이 다른 사람의 두 배는 되는 것 같다.

벌천리 마을을 나누는 단양천과 벌천

 충북과 경북의 도계를 이루는 단양천
충북과 경북의 도계를 이루는 단양천이상기

점심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차로 방곡리를 지나 벌천리로 간다. 방곡리는 도예촌이 형성되어 있고 도예전시관이 있다. 길가에 도자기로 만든 조형물들이 보인다. 우리는 이곳에 내리지 않고 지나친다. 사실 방곡 도예촌은 생활도자기를 만드는 곳으로 이곳의 자기가 예술적으로 뛰어난 것은 아니다. 도예전시관에 가면 도자기 제작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시대별 방곡 도자기의 특징을 알 수 있을 텐데 아쉽다.


벌천리는 방곡리 하류에 있으며 행정구역도 단성면에 속한다. 행정구역을 인위적으로 나누다보니 같은 생활권인 방곡리와 벌천리가 대강면과 단성면으로 나눠지고 말았다. 벌천리의 순 우리말은 벌내로 내가 셋으로 벌어져 있어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모녀티에서 내려오는 벌천이 단양천과 합쳐져 하류로 흘러가는데 이것이 마치 셋으로 벌어진 양상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벌천교 위의 도계 탐사대원들
벌천교 위의 도계 탐사대원들이상기

벌천리를 지난 단양천은 선암계곡을 이룬다. 이곳에는 단양팔경 중 삼경인 상선암, 중선암, 하선암이 있다. 그리고 벌천리 동쪽으로는 유명한 도락산(道樂山, 964m)이 있다. 여기서 도락이란 '도를 아는 즐거움'을 말하는 것으로 우암 송시열 선생에 의해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벌천리는 벌내를 중심으로 서쪽에 모녀티, 북쪽 용두산(994m) 아래 산안, 단양천 동쪽에 궁기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궁기동의 원래 이름은 궁텃골로 고려시대 공민왕이 이곳으로 피난 와 머물렀다는 전설이 있다. 벌천리 가까이는 도락산과 용두산이 있고, 조금 더 멀리는 남쪽에 황장산(1077m) 서쪽에 문수봉(1161m)이 있다.

 벌천을 지키는 고고한 소나무
벌천을 지키는 고고한 소나무이상기

벌천 건너편으로는 폐교가 된 명전초등학교 터가 보이고 보건진료소가 들어서 있다. 몇 채의 집들이 보이는데 이곳은 행정구역상 동로면 명전리에 속한다. 그러나 이곳은 산골이지만 그래도 논과 밭이 있는 경작지로 과거 벌천리 사람들의 생활터전이었다. 이곳 사람들은 지금도 벌천과 단양천으로 도계가 나는 바람에 다른 동네가 된 것을 아쉬워한다.

궁텃골에서 만난 당집은 초라하기만 하고

 궁텃골의 당집
궁텃골의 당집이상기

벌천리에서 그래도 가장 많은 이야기를 간직한 마을은 궁텃골이다. 궁텃골은 물가에 형성된 마을이다. 이곳에는 엉성하기는 하지만 당집이 있어 전통을 이어가는 마을임을 알 수 있다. 가까이 가보니 당집 안에는 신위라든지 제기 같은 것은 전혀 없다. 당집 밖으로 소원지를 단 새끼줄만이 나무 기둥에 길게 매어져 있다. 한 마디로 초라하고 볼품이 없다. 그나마 물가에 피어나는 갯버들이 쓸쓸한 마음을 달래준다. 갯버들이 피어나는 것을 보니 봄이 가까이 오긴 온 모양이다.

 봄의 전령사 갯버들
봄의 전령사 갯버들이상기

그리고 도락산 쪽으로 쑥 들어가면 골짜기에 내궁기가 있다. 내궁기 쪽으로 들어가다 보면 노적바위, 가마바위, 사모바위, 족두리바위 등을 볼 수 있다. 보통 등산객들이 이곳 내궁기를 거쳐 도락산에 오른다. 이곳 내궁기는 세상을 멀리하는 사람들이 사는 별천지 같다.

궁텃골이 있는 벌천교에서 벌내를 지나 서북쪽 상류로 약 3㎞를 올라가면 모녀티 마을이 나온다. 모녀티는 단양군 단성면 벌천리와 제천시 수산면 도기리를 잇는 고개 이름으로 마을 이름이 그것에서 유래했다. 그러므로 모녀티 마을도 대단한 산골 이다. 그래도 길이 잘 나 있어 모녀티에 접근하기는 어렵지 않다.

이처럼 마을로 가는 길이 잘 나있는 것은 옛날 이곳에 광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녀티를 넘어 도기리 다락골까지는 임도로 연결된다. 모녀티 마을에 도착하니 아이들 몇이 공을 가지고 놀고 있다. 집은 몇 채 안 되지만 마을 분위기는 괜찮은 편이다. 상당한 여유가 느껴진다. 선하게 생긴 황소도 물가에 앉아 느긋하게 되새김질을 하고 있다. 우리도 이곳 모녀티에서 여유 있고 느긋하게 도계 탐사를 마무리한다.

 충북과 경북의 경계를 이루는 모녀티교: 모여티교라고 썼다.
충북과 경북의 경계를 이루는 모녀티교: 모여티교라고 썼다.이상기


주변의 볼거리: 시간이 있어 찾은 사인암

 물에 비친 사인암의 아름다운 모습
물에 비친 사인암의 아름다운 모습이상기

사인암은 이번 도계 탐사에서 조금 벗어난 지점에 있다. 그런데 저수재를 향해 가다 이곳을 지나게 되었다. 우리 대원들이 오늘 탐사는 시간 여유가 있을 것 같으니 사인암을 보고 갔으면 좋겠다고 제안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생각지도 않게 사인암을 구경하게 되었다. 사인암(舍人巖)은 대강면 사인암리에 있는 깎아지른 절벽으로 남조천(일명 운계천)과 어울려 정말 의연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깎아지른 절벽 위로는 소나무가 독야청청 고고한 자태를 드러내고 절벽 아래 물길은 천천히 흘러간다. 바람 한 점 없어서인지 사인암의 모습이 물 속에 반영되어 그윽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또 봄을 알리는 산수유가 피기 시작해 물과 바위에 따뜻한 기운을 전해준다. 우탁 선생은 가을 사인암의 아름다움을 표현했는데, 봄이 오기 시작하는 이즈음의 모습도 정말 차분하면서 좋다.

 산수유와 사인암
산수유와 사인암이상기

사인암이라는 이름은 이 지역 출신으로 고려 때 사인 벼슬을 한 우탁(1263-1342) 선생이 이곳을 즐겨 찾았기 때문에 붙여졌다고 한다. 우탁은 호가 역동으로 성리학과 주역에 능통했으며 벼슬은 성균관 직제학에 이르렀다. 그는 임금 앞에 도끼를 들고 가 상소를 올릴 정도로 강직했다고 한다. 이곳 사인암의 벽면에는 '탁이불군 확호불발(卓爾弗群 確乎不拔)'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고 하는데 역동의 친필로 여겨진다.

사인암을 읊은 시로는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 1738-1816)가 지은 운선구곡시중 제7곡 '사인암(舍人巖)'이 유명하다.

 물에 비친 사인암 전경
물에 비친 사인암 전경이상기

칠곡 사인암                                               七曲 舍人巖

푸른 절벽이 깎아지른 듯 맑은 여울에 서 있어  蒼厓如削立淸灘
일찍이 높은 사람 한번 올라가 보았네.            曾得高人一陟看
그림자가 물결 속에 드리우나 흘러가지 않고    影落波心流不去
의연히 남겨진 자취 거울 속에 차구나.            依然遺躅鏡中寒。

 단원 김홍도가 그린 사인암
단원 김홍도가 그린 사인암이상기

사인암을 그린 그림으로는 단원 김홍도(1745-?)의 것이 유명하다. 단원이 연풍 현감일 때 주위 명승을 유람하길 좋아했는데 이때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그림을 보면 절벽 상단부를 강조하기 위해 약간 높이를 달리한 것 외에는 지금의 모습과 거의 다르지 않다. 아주 사실적으로 그리면서도 바위를 강렬하게 표현했다. 그리고 소나무 잎을 과감하게 생략해 바위를 강조하는 기법을 사용했다.

'사인암 마을 자랑비'와 단양군청 홈페이지의 '단양팔경' 중 사인암 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설명이 잘 되어있는 편이다.

 사인암 위에 있는 사선대의 모습
사인암 위에 있는 사선대의 모습이상기

푸르고 깊은 계류에 하늘높이 치솟은 기암절벽 사인암! 비단결 같은 바위 위에 노송이 곁들어 아름다움이 더하고, 운계천 굽이굽이 벽계수의 신비경이로다. 고려말 유학자 역학 우탁이 정사품벼슬로 청유하였다는 사연으로 조선 성종시대 단양군수 임재광이 사인암이라고 명명하였다. 수직으로 치솟은 석벽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사를 절로 자아내고 있으며 조선시대 화원인 단원 김홍도를 비롯하여 많은 시인묵객들이 이곳을 찾아 아름다움을 그림으로 남기거나 석벽에 각자(刻字) 하기도 하였다.

덧붙이는 글 | 입재 정종로는 경상도 상주 출신으로 함창 현감을 지냈다. 우복 정경세의 6세손으로 남인 계열의 학통을 이었다. 그가 지은 운산구곡시의 정확한 명칭은 ‘次雲巖吳侍郞大益寄贈韻並步其九曲十絶奉呈丁巳’이다. 정사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시는 그가 60세 되는 1797년 지은 것으로 여겨진다.


덧붙이는 글 입재 정종로는 경상도 상주 출신으로 함창 현감을 지냈다. 우복 정경세의 6세손으로 남인 계열의 학통을 이었다. 그가 지은 운산구곡시의 정확한 명칭은 ‘次雲巖吳侍郞大益寄贈韻並步其九曲十絶奉呈丁巳’이다. 정사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시는 그가 60세 되는 1797년 지은 것으로 여겨진다.
#벌천리 #방곡리 #적성교 #모녀티 #사인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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