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히드로 공항 새 얼굴은 빅 브라더?

[해외리포트] 새로 개관한 5청사, 탑승 직전 지문 감식 의무화 방침 논란

등록 2008.03.26 18:02수정 2008.03.26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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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드로 공항.
히드로 공항.Adrian Pingstone / Wikimedia Commons

'21세기 영국의 관문'을 자처하며 야심차게 문을 연 영국 히드로 공항의 신청사에 비상이 걸렸다. 히드로 공항을 운영하는 영국공항공사(BAA) 측이 최근 개관해 일반인 공개를 코앞에 두고 있는 제5청사를 이용하는 영국인 승객에 한해 비행기 탑승 직전 지문 감식을 통한 이중 보안 수속을 의무화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영국공항공사 측은 내국인들이 이 신청사를 통해 국내선 항공편에 탑승할 경우 보안 수속 과정에서 얼굴 사진 촬영은 물론 탑승 직전 지문 감식 장비를 통해 본인 확인을 거친 뒤에야 탑승권을 내주겠다는 계획을 밝힌 바 있다. 이렇게 되면 연간 이 신청사를 이용하게 될 것으로 예상되는 4백만 명의 영국인이 비행기 탑승 전 줄서서 지문을 찍는 진풍경이 벌어질 전망이다.

뿐만 아니라 히드로 공항은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보안 수속 이후 탑승 직전에 지문 확인을 요구하는 공항이 될 가능성이 높다. 물론 이는 지난 2005년 7월, 700여명의 사상자를 낸 런던 시내 지하철 테러 사건 이후 부쩍 강화된 대테러 방지 대책의 일환이다.

영국에서는 지난해에도 스코틀랜드의 얼굴이나 다름없는 글래스고우 공항에 자살테러 차량이 돌진해 청사 건물이 화염에 휩싸이는 사건이 발생했는가 하면, 올해 들어서도 배낭을 메고 히드로 공항 활주로로 돌진하는 테러 추정 용의자를 경찰이 사전 검거하는 등 공항 주변의 대테러 대응에 이미 빨간 불이 켜진 바 있다. 

 히드로 공항 레이더 타워.
히드로 공항 레이더 타워.David Monniaux / Wikimedia Commons

매년 4백만 영국인이 줄서서 지문 찍을 전망... 명분은 테러 방지

그러나 히드로 공항 측이 '테러 방지'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지문 확인이라는 특단의 조치까지 들고 나오는 것은 이 신청사의 독특한 설계 구조와도 무관하지 않다. 국내선 청사와 국제선 청사를 엄격히 구분하는 일반 공항들과 달리 히드로 신청사는 탑승 수속을 마친 국내선 승객과 국제선 승객이 같은 라운지에서 탑승 대기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다 보니 해외에서 영국행 비행기표를 끊었거나 히드로 공항에서 다른 유럽 공항으로 여행하는 환승객을 가장한 테러리스트들이 이미 탑승 수속을 마친 국내선 승객들의 탑승권을 바꿔치기해 국내선을 이용, 영국 내로 잠입할 경우 속수무책의 상황에 놓일 우려가 크다는 것이다.


여권 등을 이용한 별도의 신분 확인 절차를 요구하지 않는 국내선 보안 수속의 허점을 테러리스트들이 노릴 가능성을 봉쇄하기 위해서는 '병목'에 해당하는 탑승구 앞에 이중 보안 시설을 설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공항 측의 설명이다. 그리고 탑승권을 받아간 승객과 실제 탑승객이 동일 인물인지를 한 사람 한 사람 확인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바로 지문 확인 시스템 도입이라는 결론이다.

사생활 침해-생체 정보 오용 우려 목소리... 정부 기구도 이에 동참


그러나 히드로 공항 측의 이러한 보안 강화 구상은 여기저기서 반대 목소리에 부딪치고 있다. 인권단체들의 반발은 물론 개인정보 보호를 위한 정부 내 독립기구인 '정보위원회 (Information Commissioner’s Office)'마저도 이를 문제 삼을 움직임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 사생활 침해 관련 독립 규제기구인 '정보위원회'는 히드로 공항 측의 지문 요구 조치가 개인정보보호법을 위반했을 가능성을 조사하겠다고 나섰다. 또 필요할 경우 시정을 요구할 방침이며 공항공사 측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고발 및 기소까지도 가능하다며 으름장을 놓고 있다.

특히 영국 내 인권단체들은 두 가지 문제점을 집중적으로 제기하고 있다. 첫째는 사생활 침해 논란. 공항 보안 시스템을 통해 수집된 개인의 생체 정보가 의도적이든 아니든 경찰 및 행정 당국으로 넘어가 개인의 사생활을 통제할 수 있는 자료로 활용될 가능성에 이들 단체들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물론 히드로 공항 측은 지문 인식 시스템에 입력된 개인 생체 정보는 24시간 내에 자동적으로 폐기되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에 이 자료가 경찰이나 정보기관에 넘어갈 가능성은 없다고 해명하고 있다. 그러나 인권단체들은 설령 경찰이나 정보기관에 이 자료를 넘기지 않더라도 국내선 여행 승객들이 어디서 어디로 이동했는지 고스란히 공개되는 것만으로도 심각한 사생활 침해를 야기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두 번째는 지문 인식 시스템의 실효성 문제. 미국의 경우만 보더라도 지문 인식 시스템의 정확성은 90% 정도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나 막대한 예산을 들여 이 제도를 도입한다고 해서 테러리스트들의 잠입을 완전히 차단할 방안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테러용의자의 지문을 데이터베이스화된 범죄정보와 일일이 대조하는 데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지문 인식 시스템을 도입한다고 해도 현장에서 테러용의자를 색출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 인권단체들의 주장이다.
 
 미국이 새로운 국경 보안 강화 조치의 일환으로 시작한 외국인 지문 채취와 사진 촬영을 위해 대기하고 있는 한국 승객(자료사진).
미국이 새로운 국경 보안 강화 조치의 일환으로 시작한 외국인 지문 채취와 사진 촬영을 위해 대기하고 있는 한국 승객(자료사진). AP=연합뉴스

악명 높던 히드로 공항, 이미지 변신 성공할까

히드로 공항 제5터미널은 '21세기 영국의 관문'이라는 모토로 영국 정부가 야심차게 추진한 프로젝트다. 축구장 면적의 50배 크기로, 최초 구상 단계부터 치자면 20년이 걸려 완성된 대형 국책사업이다.

그만큼 영국 정부 역시 이 신청사 개관으로 인해, 그동안 이름값이 무색할 정도로 '혼잡하고 더러운 공항'으로 악명 높던 히드로 공항의 이미지가 확 바뀌기를 기대하고 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직접 신청사 개관행사에 참석해 축사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일반인 이용을 코앞에 두고 인권 침해 논란에 휩싸여 히드로 공항의 이미지는 또 한 번 상처를 입게 생겼다. 히드로 공항 측은 그러나 이러한 논란에 대해 아직까지 '문제될 것 없다'는 태도여서 이 신청사를 통해 비행기가 뜨고 내리기 시작한 뒤에도 당분간 논란은 계속될 전망이다.

 히드로 공항 5청사 개관식에 참석한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
히드로 공항 5청사 개관식에 참석한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더 선>
#히드로 공항 #지문 감식 #생체 정보 #테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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