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후손은 될 일도 안 되더군요"

[누가 이 나라를 지켰는가 42] 광주 - 김원국 김원범 형제 의병장 (2)

등록 2008.04.14 21:59수정 2008.04.15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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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족들의 고단했던 삶

a  대구형무소에 수감 중일 때의 김원국 의병장

대구형무소에 수감 중일 때의 김원국 의병장 ⓒ 눈빛출판사


청주터미널 부근 거리에서 몇 블록을 헤맨 끝에 커피숍을 찾았다. 커피숍 실내는 한적했으나 음악으로 시끄러웠다. 아가씨에게 소리를 줄여 달라고 부탁하자 선선히 들어주었다.

"할아버지 형제분의 기록이나 사진 등 유물 한 점 없습니다. 일제 강점하 대역 죄인 가족으로 살아남기에 급급했으니 두 분의 행적을 지우기에 바빴을 테지요. 저희 집안에서는 그러지는 않았습니다만, 어느 집안에서는 남은 가족이 살기 위해 호적과 족보에서조차 이름을 지웠다고 하지 않습니까?"

'오늘의 처지에서 그때를 말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군사정권 시절에는 집안에 운동권 학생만 있어도 쉬쉬 했는데, 일제 강점하 처형된 의병 가족의 삶이야말로 말이나 글로 다 쓸 수 없는 고난의 연속이 아니었겠는가. 의병이나 독립투사 유족 가운데는 일경과 밀정들의 감시로 도저히 이 땅에서 살 수 없어 단봇짐을 싸들고 만주로, 상해로, 떠난 이들도 적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왜놈들이 기록한 '폭도에 관한 편책' '전남폭도사' '고등법원 판결문' 등에 기록이 남아 있기에 두 할아버님 행적을 알게 되었고, 그놈들이 만든 '남한폭도대토벌 기념사진첩'에 나온 할아버님 사진 때문에 모습을 어렴풋이 짐작하지요.”

몇몇 의병 후손들은 이 사진을 확대하여 당신 할아버지 영정을 만들기도 하였다. 사실 일본의 기록성은 철저하여 배울 만하다. 오래 전 일로, JAL 여객기가 후지산 기슭에 추락하는 순간에도 일본 승객이 기록을 남겨 세계적으로 화제가 된 적도 있었다. 일본 측 기록과 자료가 다 공개되면 누가 제대로 독립운동을 하고 친일하였는지, 확실히 드러날 것이다.

"독립운동가 후손이라면 될 일도 안 되더군요"


- 무슨 업종의 사업을 하십니까?
a  김원국 의병장 후손 김복현씨

김원국 의병장 후손 김복현씨 ⓒ 박도


"플라스틱 계열의 조그마한 기업체입니다. 나이 탓인지 요즘은 업체 규모가 점차 줄어들고 있네요. 홀어머니 밑에서 저도, 아우도, 참 열심히 살았습니다. 아우는 서울에서 아무개 은행지점장으로 명퇴하였지만 밥 걱정하지 않고 살고 있고, 저도 은행 돈 빌리지 않고 이 업체를 꾸려가고 있습니다.

지난날 처절했던, 뼈저린 가난 때문에 이제는 세 끼 밥걱정하지 않고 사나봅니다. 그런데 사업을 하면서 체득한 것은 '독립운동가 유족이란 걸 꺼내지 않는 게 낫다'는 겁니다. 독립운동가 유족이라고 하면 될 일도 안 되더군요. 거래처 사람에게 독립운동가 후손이라고 소개하면, '존경합니다'라고  겉으로 말은 하지만 속으로는 상대하기 껄끄럽다, 만만치 않겠다고 생각하는지 될 일도 안 되더군요. 독립운동가 후손이라면 행동에 제약만 많습니다. 솔직히 말해 우리나라 정계고, 재계고, 친일파 후손들이 주류 아닙니까?"


그러면서 명함을 건네주는데, '광복산업주식회사 대표이사 김복현'이었다. 내가 상호에 '광복'이라는 말이 들어갔다고 하자, 사업 시작 때는 뭘 모르고 넣었는데, 곧 사업에 도움이 안 되는 걸 알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미 등록한 상호를 바꿀 수 없었다고 하면서 멋쩍게 싱긋 웃었다.

몇 해 전, 부인이 세상을 떠나 청주에서는 김복현씨 혼자 살고 있다. 주말에는 서울에 사는 자녀들집에서 지낸다고 하면서, 슬하에 남매를 두었다고 하였다. 두 분 할아버지 출생지에다가 동상이라도 세우려 하지만, 그 일이 쉽지 않다고 하였다. 귀담아 들어보니 유족이 부담해야 할 돈 때문인 듯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분이라면, 유족들에게 부담주지 않고 나라에서 세워주는 게 도리가 아니냐고 반문했다.

김원국 할아버지는 국립묘지에 안장하였으나, 김원범 작은 할아버지는 시신을 찾지 못해 여태 안장치 못했다고 매우 안타까워했다. 김원범 작은 할아버님은 총각으로 순국하여 후손이 없기에 아우(김복열)가 출계(양자로 감)하여 제사를 모신다고 하였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새 광주행 차시간이 되었다. 굳이 버스 승차장까지 따라 나와 광주행 버스가 떠날 때까지 승강장을 지키며 손을 흔들었다.

김원국 의병장 행적

김원국(金元國, 元局, 昌燮) 의병장은 1873년 전남 광주시 당부면 북촌리에서 출생하였다. 1905년 9월 광산 송정읍에서 일군을 타살하고 피신하였다. 1906년 3월, 아우 원범(元範)과 함께 광주 무등촌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교전을 하였다. 1907년 9월, 호남 의진의 우두머리인 기삼연(奇參衍)과 김태원(일명 金準)이 합진하여 일대성세를 이루게 되자, 그해 12월 김태원 휘하에 들어가 선봉장이 되었다. 이때 부하 삼백여 명으로 광주 수비대와 교전하여 40여 명을 사살하였다.

a  일제에 체포된 구한말 의병들.

일제에 체포된 구한말 의병들. ⓒ 눈빛출판사


1908년 1월, 기삼연과 김태원이 순국하여 일시 호남의진의 기세가 잠시 소강상태에 빠졌으나 김태원 휘하 부장들이 각기 의병장이 되어 의진을 재편하면서 전열을 정비하였다. 대표적인 의병장은 오성술(吳聖述)· 조경환(趙敬煥)· 전해산(全海山) 등이 있었다. 김원국은 이즈음 함평의 적량면· 여황면· 오산면 등지에서 일군과 접전하였다.

김태원 순국 후 개별적으로 의병활동을 전개하다가 1908년 9월 광주 선암시장에서 의병장 조경환을 만나, 동생 원범이 조경환 의진에서 활약하고 있음을 알았다. 이 인연으로 김원국도 조경환 의병부대의 선봉장이 되었으며, 동생 원범은 도포장에 임명되어 형제가 함께 한 의병부대에서 활약하였다.

1908년 1월 1일 창평 무동촌에서, 1월 11일에는 장성 낭월산에서, 3월 7일에는 영광 토산에서, 3월 25일에는 광산 어등산에서 일군과 각각 교전하였다. 1909년 3월 초에는 장성군 남일면에서 부하 150명을 거느리고 일군과 교전하였으며, 3월 18일에는 부하 80 명과 함께 나주 등지에서, 5월 19일에는 영광 불갑산에서 적과 싸웠다.

1908년 6월, 광주 우암면에서 일군과 교전하던 중, 중과부적으로 적에게 체포당하였다. 목포로 압송되던 도중 호송하던 일 헌병의 경계가 소홀한 틈을 타서 결박당한 손을 몰래 풀고 돌을 집어서 헌병을 타살한 후 함평 먹굴산에 잠시 피신하였다.

1908년 12월, 조경환 의병장이 순국한 뒤에는 그 휘하의 의진을 스스로 통솔하여 의병장이 되었다. 곽진일(郭鎭一)을 선봉장, 오덕신(吳德信)을 중군장, 김재연(金在淵)을 후군장으로 하여 부하 오백 명을 거느리고 광주· 나주· 능주· 동복· 창평· 담양· 장성· 영광 등지에서 적을 괴롭혔다.

1909년 12월 5일 영광 불갑산으로 이동 중, 일군과 교전하다가 체포되니 36세의 한창나이였다. 광주 감옥을 거쳐 대구 감옥으로 이송되어 마침내 한을 머금고 총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김원범 의병장 행적

김원범(金元範) 의병장은 1886년 1월 9일 광주군 당부면 북촌리에서 출생하였다. 일찍이 거의하였던 13살 연상의 친형인 김원국과 함께 1906년 광주 무등산에서 거의하여 의병 삼백여 명을 규합하여 선봉장이 되어 일본군과 수차례 교전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1907년, 기삼연과 김태원이 거의하자 그 의진 휘하에 들어가 장성 등지에서 활약하였는데, 특히 의병 3백여 명을 이끌고 광주수비대와 교전하여 일본군 40여 명을 사살하였다. 1908년 봄, 기삼연과 김태원이 순국하고, 김태원 휘하 오성술· 조경환· 전해산 등 부장들이 각기 의병장을 칭하게 되자 처음에 전해산 의진 중군장이 되었다.

그러나 다시 조경환 휘하에 소속되어 활약하였는데, 이것이 인연이 되어 피신 중이던 형 원국도 광주군 선암시장에서 조경환을 상봉한 후 동생이 그 휘하에서 활약한다는 소식을 듣고 조경환 의병부대의 선봉장이 되고, 원범은 도포장이 되었다.

a  구한말 의병들로 농사꾼, 포수, 서생, 군인 등 각계 각층의 젊은이들이 나라를 지키고자 보잘것 없는 무기를 들고 일제에 맞섰다.

구한말 의병들로 농사꾼, 포수, 서생, 군인 등 각계 각층의 젊은이들이 나라를 지키고자 보잘것 없는 무기를 들고 일제에 맞섰다. ⓒ 눈빛출판사


이 해에 원범은 창평 무동촌· 장성 낭월산· 영광 토산· 함평 오산 등지에서 다시 적과 교전하였다. 특히 이즈음 형 원국은 광주 등지에서 의병토벌전 주역이던, 이른바 삼국대장(三國大將)이라고 일컫는 광주 수비대장 요시다(吉田)를 교전 중 사살하였는데, 이 전투에도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1908년 9월, 영광군 황량면에 살던 일본 헌병의 밀정 변 아무개를 부하 20 명과 함께 함평군 식지면 군평에서 붙잡아 총살하였다. 이 일은 전해산의 명을 따른것으로, 당시 호남의진 각 의병장간에는 유기적으로 작전계획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09년 1월, 의병장 조경환이 전사하자 다시 전해산과 합세하여 '대동창의단(大同倡義團)'을 조직하였다. 이 의진에서 김원범은 전해산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본인은 중군장을 맡았다. 그 후 광주· 나주· 담양· 장성 등지에서 계속 형 원국과 함께 활약하였다.

1909년 2월, 광주 무등산에서 일병과 교전 중 마침내 체포되어 광주수비대에서 취조를 받다가 1909년 9월 2일 스스로 혀를 끊어 23세의 젊은 나이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에 형 원국과 똑같이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국가보훈처 공훈록과 홍영기 지음 <대한제국기 호남의병 연구>, 홍순권 지음 <한말 호남지역 의병운동사 연구> 등을 바탕으로 하여 썼음을 밝힙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국가보훈처 공훈록과 홍영기 지음 <대한제국기 호남의병 연구>, 홍순권 지음 <한말 호남지역 의병운동사 연구> 등을 바탕으로 하여 썼음을 밝힙니다.
#호남 의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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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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