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인가, 기회인가? 발전하는 중인가, 퇴보하는 중인가? 대화할 여지는 있는가 아니면, 오직 투쟁이든 싸움이든 부딪힐 일만 남았는가? 2007 대선에 이어 2008 총선까지 보수진영이 승리하면서 지금 우리 사회는 보수 연승, 진보 참패, 개혁 실종이라는 '쓰리쿠션' 압박에 시달리고 있다. 평형추가 균형감을 상실한 것 같은 상황을 겪고 있다는 말이다.
정치체제로 본 민주주의 제도는 우리나라에서 여전히 '실험중'이다. 우리나라 스스로 그 정치체제를 도입한 것도 아니고, 더욱 중요한 사실은 우리 스스로 그 제도의 진정한 가치를 찾아 본 기간이 아직은 너무 짧다.
사실, 삶 자체가 끊임없는 과정인 마당에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형태를 찾는 정치체제라는 도구적 대상에 완성을 기대하긴 참 어렵다. 그러나, 우리 삶에 어떤 울타리를 치는 것과 같은 정치체제에 대한 끝 모를 토론 문화를 이어가지 않고는 우리나라 민주주의는 부평초처럼 외부 상황에 지나치게 영향을 많이 받기 쉽다. 그래서, <민주주의 대 민주주의>는 지금 우리 사회에 마치 이렇게 질문하는 것처럼 보인다. '대한민국 민주주의, 넌 도대체 누구니?'
대한민국 민주주의는 지금 어디 쯤에 있는가?
그 어떤 나라 사람보다 정치에 관심이 많다고들 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민주주의는 어떤 것일까? 우리 내부에서 갈등을 겪는 것은 물론 당장 코 앞에 있는 전혀 다른 정치체제를 안고 사는 우리 사회가 겪어 온 민주주의는 어떤 모양이며 또 몇 가지일까? 다양한 사람, 다양한 공동체, 다양한 가치 등 다양함과 어울림에 대한 토론과 연구가 활발한 21세기 사회에서 민주주의는 더더욱 한 가지 모양일 수 없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 어디서나 낮은 투표율 때문에 고민하고 있다. 정치 선진국이라는 데에서 이런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날마다 정치권을 타박하면서도 은근히 정치 관심도가 높은 우리나라가 정치 선진국인지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지만, 여하튼 세계는 정치에 대한 불신 그리고 투표율 하락으로 항상 고민하고 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정치는 우리가 무시할 수 없고 무시해서도 안 되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우리 삶이 어느 정도 범위를 유지하고 살아갈 수 있는지를 가늠하게 해 주는 것이 바로 정치요 정치체제이기 때문이다. 같은 민주주의라도 나라마다 문화권마다 다 다르다. 개인 가치를 중요시하는 나라의 민주주의와 공동 가치를 중요시하는 나라의 민주주의가 같을 수 없다. 종교다원주의를 허용하는 나라와 특정종교가 사회를 이끌어가는 나라의 민주주의가 결코 같을 수 없다.
물론, 이런 식으로 생각하다 보면, 민주주의는 사람 머릿 수 만큼이나 다양하다고 볼 수 있다. 골치 아픈 일이 될 수도 있지만, 우리 사회가 어떤 민주주의를 갖추고 있는지 그리고 어떤 민주주의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놓고 끊임없이 고민하고 토론하지 않는다면 그날로 우리 사회는 '식물인간' 상태에 들어간다. 살아있지만 움직이지 않는 사회, 서로 말하지만 울림이 없는 사회, 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있지만 함께 나누는 대화는 없는 사회에 우리는 언제든 빠져들 수 있다.
겉으로는 누구나 같은 걸 보고 같은 걸 얘기하기에 평등해 보이는 사회가 있다. 그런데, 속을 보면 사실상 나눔도 교류도 다 사라지고 없는 '빈 수레'같은 사회가 있다. 앞서 말했듯이 살아있지만 움직이지 않는 그런 사회 말이다. 우리는 이런 사회를 전체주의 사회라고 부를 수 있다. 그리고 그 사회 속내를 잘 들여다보고 실체를 알고 나면 다들 '절대 그런 사회만큼은 용납할 수 없다'는 말을 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전체주의 사회가 어떤 사회이길래 이러는 것일까? 꼭 알아두어야 할 문제임을 재확인하는 가운데, 그래서 조금 긴 글을 굳이 살펴봄으로써 전체주의 사회 한 단면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들여다본다.
"그렇다면 무엇이 전체주의 국가일까? 아마 많은 이들의 머리 속에는 일부 독재자에 의해 전횡이 이루어지고 그 사회 구성원들이 정치적으로 동원되는 과거 소련 스탈린 체제의 이미를 떠올릴 것이다. 혹은 마치 가대한 톱니바퀴의 부품처럼 아리랑 축전에 어린 학생들을 정치적으로 동원한 북한 체제의 모습도 떠올릴 것이다. 다시 말해 정치가 과잉되어 개인의 자유와 창의가 말살되는 이미지 말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공화주의 정치 사상가인 아렌트에 따르면 전체주의는 정치의 과잉이 아니라 정치의 제거이다. 그녀는 왜 이러한 상식적 이미지와 반하는 주장을 했을까? 전체주의적 개미사회에 맞서 싸우는 한 영웅적 개미의 탁월한 활약을 다룬 만화 영화인 『앤트』의 내용을 상기해 보면 아렌트의 주장이 그리 낯설지는 않을 것이다.
이 영화에서 개미들은 단순한 거대한 생산 공장의 기계로서 평생을 살아가며 어떠한 의견의 공적인 교환도 차단되어 있다. 개미들은 언제나 전체주의의 눈길을 두려워하며 바로 옆의 개미들마저도 신뢰하지 못한 채 저항할 의미마저 생기기를 두려워한다. 결국 그들은 단지 전체주의자의 의지를 내면화하여 전쟁 같은 정치 행위에 단순히 동원된다. 이들이 스스로의 정치적 판단 능력을 상실한 채 단순한 동원의 대상으로 전락한다는 점에서 이는 정치의 확장이 아니라 아렌트의 지적처럼 탈정치화된 동원에 지나지 않는다."(<민주주의 대 민주주의>, 81-82)
각종 통신기술이 발달하고 좋은 교통수단이 늘어나면서 우리는 점점 예전보다 많은 것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예전에는 알고 싶어도 알 수 없는 각종 문제들을 기술발달에 힘입어 알수 있게 된 것도 많다. 단순히 정보가 많아져서가 아니라 그 많은 정보들을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 얻을 수 있는 수단이 많아졌다. 참 좋은 사회이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다.
정보가 많은 사회는 흔히 정보가 (지나치게) 넘쳐나는 사회라는 묘한 비아냥을 듣기도 한다. 그리고 기술발달, 통신발달, 교통발달 등을 통해 이루어진 사회 '업그레이드'는 결코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해당하지 않는 경우를 종종 본다. TV없는 집을 상상하지 못하는 사회, 휴대폰 없는 손을 상상하지 못하는 사회, 컴퓨터 없는 사무실을 상상하지 못하는 사회에 살면서 우리는 종종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발견하곤 한다. 그리곤 가끔 이렇게 중얼거리며 놀라워한다. '어떻게 저런 사회(사람)가 있을 수 있지?' 그리고 우리는 놀란 가슴을 식히고자 에어콘을 튼다. 환경 문제를 놓고 열띤 토론을 하는 TV 속 토론자들을 보면서.
<민주주의 대 민주주의>를 놓고 우리 사회 민주주의를 굳이 비틀어보는 이유는 우리 사회가 정말 민주주의 사회일까 하는 근본적인 의구심 때문이다. 사실 어떤 면에서는, 다양하다는 게 마냥 좋은 것은 아니다. 뭔가를 결정하고 나아가야 할 때 다양한 목소리를 모두 듣
겠다고 마냥 시간을 허비하는 게 항상 좋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좋은 게 좋은 것 아니냐'는 식으로는 결코 작은 문제 하나 해결할 수 없다.
문제 제기는커녕 관심조차 보이지 않는 태도는 우리 사회를 현 상태 그대로 마비시킬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 사회에서 들을 수 있는 소리가 단 한 가지밖에 없다면 그건 도저히 상상조차 하기 싫다. 이미 온 몸에 치를 떨며 읽었을 전체주의 사회의 한 단면이 이미 머릿속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민주주의는 지금 '실험 중'
복잡하고 다양한 목소리가 공존하는 사회(세계), 교류가 많은 만큼 다툼도 많아져 '싸울 일'이 많은 사회(세계)에 살면서 우리는 어느덧 대의민주주의라는 한 가지 정치체제에 익숙해 있다. 지나칠 정도로 많은 문제들 속에 파묻혀 살기에 때문인지 우리는 어떤 문제들을 쉽게 외면하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는 누군가가 우리를 대신해 이 복잡한 세상 일을 전담할 '전문가'들이 필요하며 그런 경우엔 '비전문가'들이 필요 이상으로 이의를 제기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어짜피 우리가 다 감당할 수는 없으니까' 하면서.
정말 그럴까. 세상이 점점 복잡해지고 관심 가져야 세세한 일이 많으니 정치체제와 같은 폭넓은 이야기는 그냥 '전문가'들에게 맡겨두어야 할 일일까? 200㎡ 보다 몇 배 또는 몇 십배 많은 공간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100㎡ 공간만 허용하는 사회에 산다면 당신은 정말 그런 사회를 그냥 보고만 있을 텐가? '전문가'들에게 맡겨 둔 일이니 언젠가는 나머지 공간도 허용하리라 믿고만 있을 텐가? 단 한 가지 짧은 질문만 했을 뿐이지만 이 질문 한 가지에도 당신은 당장 '그건 아니지'라고 생각할 게 분명하다. 속았다는 느낌은 둘째치고 절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말도 안 되는 불합리함이 있으니까 말이다.
사회가 복잡해지니 범위가 큰 문제는 항상 '비전문가'들에 대해 배타적 태도를 보인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식의 태도이다. 문제가 복잡한 만큼 지혜를 모아야 한다는 상식을 지닌 이들이 있는 반면에, 문제가 복잡한 만큼 더더욱 한정된 인원과 한정된 선택권을 놓고 신속정확하게 결정하는 태도를 지녀야 한다는 상식(?)을 지닌 이들이 있다. 다소 지나친 흑백논리를 펼쳤는지는 모르겠으나, 우리 사회는 점점 많은 경우에 '다른 의견이 있을 가능성'을 처음부터 받아들이지 않는 현상을 자주 겪는다.
풀어야 할 문제가 너무 많고 너무 복잡한 사회에 살기 때문에 어떤 문제는 어쩔 수 없이 한쪽 의견을 중심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게 어떤 '전문가'들의 주장이다. 그런데, 사람은 누구나 한쪽으로 기울어지느 것에 대해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낀다. 그런데도 왜 사람들은 사회구조에 대해서만큼은 이상하게도 둔감한 경우가 많을까. 우리에겐 비교할 여지조차 없는 큰 지구가 그토록 빨리 자전하고 공전해도 그 엄청난 상황을 깨닫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일까? 뜬금없는 질문을 하게 된다.
“이상과 같이 ‘결손’보다는 ‘과잉’, ‘투입’보다는 ‘산출’ 민주주의를 대변하는 대의민주주의가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관찰이다. ‘과잉’보다 ‘결손’이 심각한 위기가 되며 ‘산출’보다 ‘투입’에 대한 요구가 더욱 지배적인 것으로 부각되고 있다. 시민들이 투표에 잘 참여하지 않고 있고, 의회와 정부에 대해 그리고 정부 정책에 대해서도 강한 불만과 불신을 갖고 있어, 이른바 ‘민주주의 결손’이 심화되면서 심각한 정통성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
유럽회의(Council of Europe, 1997)는 유럽 전역에서 민주주의가 위기의 국면에 있다고 분석하며, 위기의 핵심을 ”유권자들의 실질적인 참여가 없는 상태에서 정치 지도자들이 심각한 좌절을 가져다주는 정책을 자주 한다“는 측면에서 찾는다. 또 지구촌 민주주의 현실을 분석한 UNDP(2002: 14)는 ”민주주의에 대한 방해물은 문화나 종교와 거의 관계없으며, 어떤 대가로든 권력을 유지하려는 권력자들의 야욕과 많이 관계된다. … (중략) … 모든 문화의 국민들은 이제 선택의 자유를 존중하며 자신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의사결정에 목소리를 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설명한다.” (같은 책, 22)
대의민주주의라는 정치체제를 오랫동안 이끌어 온 서구 세계는 그 오랜 경험을 통해 민주주의 정치체제가 오로지 한 가지 모양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두 번에 걸쳐 큰 전쟁을 치렀기 때문인지 유럽은 특히 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이해가 남다르다. 지나친 집단 행동을 경계하면서 한편으론 지나치다 싶을만큼 개개인에게 자유를 많이 부여하기도 한다. 언쟁이 아닌 실제 전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가 가져 올 무서운 결과를 잘 알기에 그들은 철저히 대화, 절차, (자연스런)흐름, 다양성 등을 강조한다.
한쪽으로 사회가 기우는 것에 혐오감을 느낄 정도로 싫어하는 유럽사회는 어찌보면 우리보다 더 진지하게 민주주의를 '실험하는 중'인지도 모른다. 우리에 비해서는 민주주의를 오래 전부터 겪어 온 그들이 말이다.
“사실 최근의 추세는 대의민주제에 직접, 주창민주제가 부분적으로 결합된 제도화에 있다는 것을 서구 사례에서 볼 수 있다(OECD, 2000; 2002; Council of Europe, 2004a; 2004b).
(같은 책, 20)
민주화를 제도화한 1987년이 20여 년이라는 세월을 지나 이미 저멀리 가버린 지금 97년 'IMF사태'마저 역사 속에 묻어버렸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세계화시대라는 말마저 식상해하는 신세계화시대에 들어서고 있다. (이미 그런 세상에 들어섰는지도 모른다.)
제도적 민주화 20여 년을 보낸 우리 한국사회는, 지나치리만치 보수 쪽으로만 기우는 (또는 그럴 것만 같은) 사회를 보면서 이제는 정말 대한민국 민주주의 자체를 다시 요모조모 살펴볼 필요를 느끼고 있다. 제도상으로는 이미 조금씩 그 모양새를 갖추기 시작했을지도 모를, 다양하고 새로운 민주주의를 사회 현장으로 가져가 '모내기'를 시도할 때가 왔다는 말이다. 그래서일까, 민주주의는 한 가지가 아니라고 말하는 이 책은 요즘같은 시기에 썩 읽기 괜찮은 책이다. 조금 아주 조금 '전문적'이라는 점만 빼고는.
복잡한 사회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욱 더 많은 이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동참하는 '참여민주주의' 시대를 실제 사회에 뿌리내리게 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대의민주주의'가 아닌 '참여민주주의'가 무엇인지 그리고 어떤 방법(들)이 있는지를 알아두어야 한다. 모두가 정치에만 매달려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언제든 정치에 참여하고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마련해야 한다는 말이다.
투표 이후에는 사실상 손을 놓아버리게 되는 '대의민주주의'가 아니라 투표 전후로 언제든 참여하고 의견을 나눌 수 있는 '참여민주주의'가 우리에게도 필요하다. 혹시 우리사회가 이미 '참여민주주의' 사회라고 말하고 싶은 이가 있다면, 아마도 우리사회가 다양한 목소리를 허용하지 않는 사회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을 걱정하는 목소리에 좀 더 귀기울여야 할 게다. 그리고, 말 자체에 이미 다양성을 포함하는 '참여민주주의'라는 단 한 단어를 이해하고 실현하는 방식이 여러가지라는 사실도 되짚어봐야 할 게다. 그렇다. 대한민국 민주주의는 다시 '실험 중'이다. 만일 그렇다면, 이 책 역시 우리 사회에서 '실험 중'이다.
“이 책에서 집필자들은 대의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대안으로 ‘참여민주주의’ 시대가 진행되고 있다고 본다. 이는 집필자들의 주관적인 판단이라기보다는 지구촌 학계의 논의를 종합적으로 검토한 결과를 반영한 시각이다. 따라서 머리글격인 ‘대의민주주의를 넘어서: 참여민주주의의 시대로’는 지금은 ‘참여민주주의의 시대’라고 규정하고, 직접민주주의, 공화민주주의, 결사체민주주의, 토의(심의)민주주의, 전자민주주의뿐 아니라 최근에 진전되고 있는 풀뿌리민주주의, 생태민주주의, 젠더와 민주주의 이론들도 모두가 ‘대중적 통제’와 시민의 ‘정책결정 참여’를 민주주의의 핵심으로 중시하는 참여민주주의의 한 형태라고 정리하고 있다.”(같은 책, 6)
덧붙이는 글 | <민주주의 대 민주주의> 주성수, 정상호 편저. 아르케, 2006.
이 책에 참여한 필자들/ 주성수, 안병진, 오현철, 정상호, 조영재, 정규호, 하승우, 이선미
1. 첫 번째 인용문(81-82쪽)은 안병진의 글 "공화주의적 민주주의"에 있습니다.
2. 나머지 인용문(22, 20, 6쪽)은 주성수의 글 "대의민주주제를 넘어서: 참여민주주의의 시대로"에 있습니다.
2008.04.16 17:24 | ⓒ 2008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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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대 민주주의 - 제3섹터연구소 민주주의 시리즈 1
주성수.정상호 외 지음,
아르케,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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