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KBS>가 시청률 저조를 이유로 지상파 방송의 마지막 남은 단막극인 <드라마시티>를 폐지했다. 많은 방송 관계자들이 신인작가의 등용문격인 단막극이 폐지되는 것에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에 대해 <KBS> 측은 매년 한차례 개최되는 극본공모는 현행대로 유지해, 신인작가는 계속 선발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그런데 단막극의 순기능이 단지 신인작가를 발굴하고 육성하는 일에만 국한된 것일까? 물론 단막극이 작가뿐만 아니라, PD, 배우 등 많은 사람들에게 '메이저' 무대로 나가는 통로역할을 해 온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단막극이 가지는 더 큰 의미는 그것 스스로가 하나의 '장르'라는 점이다.
독립된 장르로서의 단막극
단막극은 드라마라는 외피를 쓰고 있긴 하지만, 여러 면에서 오히려 영화와 가깝다. 연속극이 한 편으로 이야기를 맺지 못하고 다음 편으로 이어지는데 반해, 단막극은 그 편에서 모든 갈등을 마무리한다. 시청자가 개입할 여지없이 완벽하게 사전에 기획되고 제작된다는 점에서 단막극은 영화와 유사한 점을 보인다.
하지만 단막극은 영화와는 분명히 다르다.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
우선 완성도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영화가 드라마에 비해 출연 배우들의 네임 밸류나 화질 등에서 월등하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은 부차적인 문제에 불과하다. 단막극도 극본의 수준이나 연출자의 능력에 따라서 영화만큼의 완성도를 달성할 여지를 충분히 가지고 있다.
두 장르의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러닝타임에 있다. 약 백분에서 두 시간 동안 상영되는 영화에 비해, 단막극은 약 한 시간 동안 진행된다. 이것이 무슨 차이를 만들어낼까? 설명을 위해 '시나리오 작법이론'을 잠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대부분의 영화 시나리오 작법책의 앞부분엔 시드필드의 3장이론 이란 것이 나온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영화는 처음, 중간, 끝, 세 부분으로 나뉘고, 중심 중거리인 메인 플롯과, 보조줄거리인 서브플롯이 있다" 정도가 되겠다. 예컨대 <살인의 추억>이란 영화를 여기에 적용시키면, 메인플롯은 '범인을 수사하는 과정'이 될 테고, 서브플롯은 '두 형사간의 관계 변화 추이' 정도가 될 것이다.
러닝타임의 차이는 서브플롯의 존재유무와 밀접하게 연관된다. 일반적으로 영화는 서브플롯을 포함한 보다 폭 넓은 이야깃거리를 갖춘 소재라야만 제작이 가능하다. 이에 반해 단막극의 경우에는 한 가지 축, 즉 메인플롯만 있거나 아니면 메인플롯과 서브플롯이 결합된 형태를 띠고 있는 소재로도 끝까지 집중력을 유지한 채 극을 마무리 할 수가 있다. 따라서 단막극이 택할 수 있는 소재의 폭은 영화에 비해 월등히 늘어난다. 우리 주변의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단막극을 통해 많이 보여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따라서 단막극이 폐지된다는 것은, 영화로 가기엔 부족하고, 연속극용 소재로도 어울리지 않는 수많은 이야깃거리들을 그대로 사장 시켜 버리는 결과를 초래한다. 단막극을 떼어 버린 채 영화와 연속극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작가의 창의력과 상상력은 그만큼 줄어들게 되는 것이다.
사실 단막극이 폐지되기 전에 우리는 또 하나의 극 장르를 잃어 버린 적이 있다. 바로 '30분 드라마'이다. <환상여행> <테마게임> <반전 드라마>, 이것들이 대략 30분 분량으로 진행되던 드라마들이다. 30분 드라마는 영화나 1시간 단막극과는 또 다른 화법으로 전개된다.
30분 드라마는 뚜렷한 기승전결 없이 한 가지 테마로만 진행되거나, '한방' 즉, '임팩트' 있는 사건 하나만 가지고도 그 여파를 이용해 분량을 채울 수 있는 극 장르이다. 또한 자극적인 소재 하나가 러닝타임 내내 극의 분위기를 지배하는 등 독특한 이야기가 무궁무진하게 쏟아져 나올 수 있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미디어 산업의 변화와 대응전략 모색
현재 전 세계의 미디어 산업은 TV와 영화간의 장르구분이 모호해지며 급격한 변화의 시기를 맞고 있다. 제리 브룩하이머는 이미 몇 년 전에 "이제는 TV의 시대"라고 천명한 바가 있고, MBC 드라마 <태왕사신기>는 일본의 '영화극장'에서 상영되고 있다.
TV와 영화에 통신기술과 게임이 더해진다면, 앞으로 '극'이란 장르는 어떤 형태로 변하게 될지는 누구도 예측하기가 힘들다. 즉, 그동안 상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장르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고, 그렇게 급변하는 시장상황에서 헤게모니를 점유하려면, 미리부터 다양한 소제와 각 장르에 맞는 극작술을 개발해 놓고 대비를 해야 한다.
5분 드라마, 30분 드라마, 단막극이 차례로 폐지되고, 우리에겐 연속극과 영화만이 남아있다. 미디어 융합시대에 가장 중추적인 역할을 해야 할 방송사가 스스로 이런 결정을 내리는 것은 분명 국제적인 흐름에 역행하는 처사가 아닐 수 없다. 셀 스루(Sell - through) 등의 선진적인 수익구조 확보와 더불어, 장르의 다원화와 향후 미디어 산업의 변화에 대한 철저한 대비가 요구되는 시점이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blog.daum.net/ratkilling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2008.04.22 15:19 | ⓒ 2008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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