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계곡으로 오르는 길은 차츰 험해지기 시작했다. 사람이 거의 다니지 않아서 그런지 많은 나무들과 잡풀들이 길을 막고 있었고, 물이 흘러내린 곳에는 길의 흔적도 없었다. 계속 오르니 봄볕에 땀이 솟구쳐 비 오듯 하고, 길을 찾아 나아가야 하는 발길이 더디기만 하였다.
아뿔싸, 간간이 흔적으로 남아 있던 길마저 가시덤불로 뒤덮였다. 우리들은 길을 잃고 만 것이다. 아까 그 갈림길에서 위로 가야만 했던 것이다. 산에서 길을 잃으면 그곳에서 그냥 내려 올 수는 없는 것이고, 가장 적당한 방향을 잡아서 산비탈로 올라가거나 내려가야 한다.
우리들은 계곡에서 능선을 보고 올라채기 시작했다. 잡목들이 발목을 잡는다. 얼굴을 수시로 긁어 대는 나뭇가지들을 헤치고 위로 오르기 시작했다. 우리들이 붙여 놓은 소위 ‘염소 산행’이 시작된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땀에 젖어 있던 몸은 긴장까지 싸여 흥건하다.
그렇게 한 30여 분을 솟구쳐 능선 쪽으로 오르니 산길이 나타났다. 모두 헉헉대던 한 숨을 들이 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모두 물병의 물이 바닥이 나 가고 있었다. 그렇지만 배낭에서 꺼내놓은 과일들을 먹으며 험악했던 얼굴들에 안도의 웃음이 번지기 시작했다.
그만 내려가자고 농담을 던지는 사람도 있었다. 정색을 하며 정상의 철쭉을 보러 왔는데 무슨 말이냐는 답문도 이어진다. 길을 찾은 사람들의 눈에 비로소 산나물인 취나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자라나고 있는 취나물 잎을 하나 둘 씩 바라보며 잘못 든 길에서 고생했던 순간들도 잊어버린 것 같았다.
금방 나타날 것 같은 1km의 정상은 대단히 힘들었다. 약 2시간이 넘어 걸렸다. 보통 산길은 1시간에 2km정도씩 갈 수 있다. 그런데 1km라는 정상까지 2시간이 넘어 걸렸으니 산길에서 길을 잃으면 얼마나 힘이 드는지 뼈저리게 느끼는 순간이었다.
정상 부근에 도착하니 모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꽃구름이 정상에 가득 머물고 있는 것이다. 분홍빛 꽃구름에 하얀 꽃들이 사이사이 혼합되어 산봉우리는 꽃봉오리를 이루고 있었다.
전남 화순에 있는 이 화학산(華鶴山)은 풍수지리학적으로 큰 화학산과 작은 화학산이 자웅을 이루고, 날개를 활짝 펴고 있는 형상이 학(鶴)의 모습을 이룬다 하여 화학산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화학산 정상에는 고산철쭉의 군락지가 두 군데 있는데, 꽃 모양이 일반 산철쭉의 모양과는 다르다. 산철쭉은 선홍빛 꽃잎에 나무들이 그리 크지 않지만, 이 화학산 고산철쭉은 꽃잎이 분홍빛이다. 그리고 철쭉나무들이 높이 자라 꽃터널을 이루고 있다. 꽃이 피는 시기도 비교적 짧아 10여일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철쭉 시기를 맞추어 산에 오를 수 있는 것도 대단한 행운이라고 한다.
꽃 속에 묻힌 우리들은 말을 하지 않았다. 지나 겨울 산행할 때 다시 찾겠다는 약속을 지킨 마음과 너무나도 곱디고운 분홍꽃을 피워 우리들을 맞은 철쭉들의 믿음이 나누는 교감이다. 하늘마저 파란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다. 꽃잎 속에 숨어 있던 벌들도 고개를 내민다.
어떤 꽃잎은 거의 하얗게 피어 파란 하늘을 간질이고 있고, 어떤 꽃잎은 홍조를 띈 새악시 볼처럼 내리쬐는 햇살을 온몸으로 받아 분홍빛으로 빛나고 있다. 고개를 내민 파란 잎마저 분홍빛 꽃잎이 부끄러워 바르르 떨고 있다.
벌써 어떤 꽃잎들은 바닥에 내려앉고 있다. 기다리다 지쳐서 땅바닥에 내려앉은 꽃잎들에겐 늦게 찾은 우리들의 발길이 미안하다. 그렇지만 밝게 빛나는 햇살을 받은 수많은 꽃잎들이 투명한 분홍빛으로 우리들의 마음을 가득 채워 준다.
전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산이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꽃들을 산 정상에 가득 피워내는 힘에 우리들은 숙연하였다. 그대로 그 믿음대로 산은 우리들을 배반하지 않은 것이다. 언젠가 지구 온난화로 지구가 다 타버린다면 몰라도 그곳에 자라나고 있는 이 철쭉은 매년 이맘 때 쯤이면 항상 그 연하디 연한 분홍빛을 머금고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낮이 긴 5월의 산행이었지만 해가 거의 다 넘어 갈 때까지 우리들은 그곳에 있었다. 비교적 산길이 잘 다듬어진 능선을 따라 내려가다 임도로 가면 될 것 같았다. 야간 산행을 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지만 다시 찾은 우리들의 마음을 이렇게 붙잡아 놓은 분홍빛 철쭉과 쉽게 이별을 할 수가 없었다.
2008.05.05 16:02 | ⓒ 2008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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