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 선창가에서 가장 큰 ‘젓 당꼬’(젓 탱크) 건물. 일제강점기에 지어졌고 사연이 많은 건물이라서 지방 문화재로 지정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조종안
어머니 쌀가게가 있는 군산의 '째보선창'도 연평도와 다를 게 없었습니다. 배들이 만선을 알리는 오색 깃발을 펄럭이며 들어오는 날은 시골 장날 이상으로 활기가 넘쳤으니까요. 오죽하면 "째보선창에 배가 들어오는 날은 개들도 백 원짜리를 입에 물고 댕긴다"라는 말이 회자되었겠습니까.
'째보선창'은 동부어판장을 끼고 있었는데 파시 때면 크고 작은 배들이 잡아온 생선을 어판장에 퍼 놓고 위판을 했습니다. 알아들을 수 없는 괴기한 말솜씨와 중매인들의 손가락 놀림으로 경매가 이루어지는 어판장은 생선 비린내가 코를 찔렀습니다.
어판장 옆으로는 떡장수와 팥죽장수 아주머니들이 줄지어 있었고, 맞은편에는 소나무 기둥 몇 개를 대각선으로 높이 세우고, 잡목을 사다리처럼 가로로 쳐놓고 조기와 박대 갈치 등 팔고 남은 생선을 말렸습니다.
바다에서 갓 잡아온 생선을 높이 메달아 해풍에 꾸둑꾸둑하게 말리면 신선한 생선에서 맛볼 수 없는 감칠맛이 돋습니다. 말리는 과정에서 물기가 빠지고 살에 탄력이 붙으면서 생선에서만 느낄 수 있는 특유의 맛이 더해지기 때문이겠지요.
볏짚으로 생선을 엮으며 주고받는 아주머니들의 수다는 5월의 풍요를 더해주었고, 소주 몇 잔 걸친 뱃사람들이 아주머니들에게 수작을 걸다 일어나는 말싸움도 빠질 수 없는 구경거리였습니다. 저와 동창이었던 여학생 어머니가 어판장 모퉁이에서 선술집을 했는데, 만나면 항상 고개를 숙여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예쁘고 참한 여학생이었는데···
지금은 보기 어렵지만, 크기만 작을 뿐 조기와 똑같이 생긴 황석어라는 생선이 있었습니다. 봄이면 선창가에 버려질 정도로 황석어가 많이 잡혔는데 김장철인 가을을 대비해서 젓을 담갔습니다.
멸치가 크다고 해서 꽁치가 될 수 없듯, 황석어는 아무리 커도 황석어이지 조기가 될 수 없습니다. 작은 조기만 한 황석어도 있었거든요. 모자란 사람을 비유할 때 ‘황석어도 조기냐!’라는 우스갯소리가 유행하기도 했는데요. 저도 철부지 시절에는 황석어를 조기 새끼로 알았습니다.
황석어는 조기에 밀려 인기가 덜했지만, 조기 사촌인 부서나 백조기보다 맛이 좋았고 먹는 방법도 다양했습니다. 특히 누런 황금빛 기름이 둥둥 떠다니는 황석어 젓국은 김장철에 인기 최고였는데 짠맛이 나면서도 구수했습니다.
무더위에 밥맛을 잃었을 때 황석어젓 한 마리면 밥 한 그릇을 뚝딱 해치워 밥 도둑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습니다. 가마솥에서 퍼낸 뜨거운 밥과 금방 담근 겉절이에 황석어젓을 곁들이면 조기젓으로 아는 사람들이 많을 정도였으니까요.
김장철이 다가오면 '젓 당꼬'(젓 탱크)가 많았던 우리 동네도 장사진을 이루었습니다. 시내에서 젓국을 사러오는 사람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들었으니까요. 함석으로 만든 양동이에 가득 담은 젓국을 물지게로 저 나르던 당시 동네 풍경이 아스라이 그려지네요.
그렇게 흥청대던 '째보선창'이었는데 언제부터인지 사람들이 하나둘씩 떠나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생선 경매가 이루어지던 동부어판장도 빈 창고가 되어 낮에도 적막이 흐를 정도로 쓸쓸하게 변해버렸습니다.
어쩌다 부둣가에 나가면 샛강을 덮고 있던 금암교와 '째보선창'은 복개되어 흔적을 찾기 어렵고, 비린내는커녕 선박을 고치는 철공소의 망치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어머니 쌀가게가 있던 자리는 중국집 간판이 붙어 있고, 낯익은 사람은 만날 수가 없습니다.
모두가 사라지고 떠나가 황량해진 공터에서 파시 때 조기를 엮던 아주머니들에게 수작을 걸던 뱃사람들이 서로 싸우던 소리를 그리워할 따름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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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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