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2007년 5월, 국립5.18민주묘지를 방문해 묘역을 둘러보던 중 '상석(床石)'을 밟아 논란이 됐다. 이 전 시장은 지난 13일 고 홍남순 변호사의 무덤 비석을 어루만지면서 상석을 발로 밟았다.
광주드림 임문철
작년 이맘때 당시 한나라당 이명박 대선 후보는 망월동을 찾았다. 하얀 장갑을 끼고 엄숙히 5·18 기념탑에 참배한 그는 묘역을 돌아보다가 한 무덤 앞에 발을 멈춘다. 그 무덤은 홍순남 변호사의 것이었다. 그는 무덤으로 다가가 한 손으로 비석을 어루만졌다. 그때 몇 사람의 시선은 이명박 후보의 손이 아닌 발로 모였다. 그의 검은 구두가 성큼 무덤의 상석을 밟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광주 사람들은 이명박 후보에게 표를 주지 않았다. 하지만 이명박 후보는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이어 한나라당은 총선에서 압승했다. 이 후보와 한나라당의 득세는 서울 사람들의 지지가 결정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지난 대선에서 서울 사람들은 이 후보에게 전국 평균을 훨씬 상회하는 지지표(56%)를 던졌으며, 총선에서는 48개 지역구 중 무려 40개에서 한나라당 후보를 당선시켰다.
서울 사람들이 변한 것이었다. 광주 사람들과 표를 합쳐 김대중과 노무현을 당선시켰던 서울 사람들, 옛날 박정희보다는 윤보선에게 표를 더 주었던 서울 사람들 아니었던가? 그랬던 서울 사람들이 박정희와 전두환의 후예라고도 할 수 있는 한나라당으로 돌아서버린 것이었다.
'민심은 천심이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시인 김수영에 의하면 민심이란 조변석개하는 것, 즉 급변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풀이 눕는다 /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 바람보다도 더 빨리 일어난다우리의 기억은 28년 전 이맘때로 돌아간다. 1979년 박정희가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유신체제는 막을 내리지 않고 있었다. 그 해 겨울이 깊어지도록 사람들은 12·12를 잘 모르고 있었다. 그러다가 해를 넘기면서 서울에는 이상한 소문이 나돌기 시작한다. 박정희를 섬기던 정치군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나라의 권력을 찬탈했다는 것이었다.
5·18, 그때 서울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 5월 18일, 그 날 나는 아주 이른 아침에 일어나 운동화 끈을 묶고 있었다. 당시 나는 며칠의 시간을 대부분 길거리에서 보냈다. 전두환 규탄 데모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신문과 텔레비전에서는 '서울의 봄'이 왔다고 말하며 연일 세 김씨의 사진과 화면을 냈지만, 그들의 미래를 낙관하는 사람의 숫자는 급격히 줄어든 지 오래였다. 대학생들은 이제 노태우와 정호용의 이름과 실체까지도 전해 들어 알고 있었다. 마침 박정희를 죽인 김재규의 사형이 전격적으로 집행되었다. 대학생들은 매일 가두 진출을 시도하고 있었다.
나는 박정희가 죽은 다음 날 친구들과 축배를 들이켰었다. 그랬는데 또 군인이 반란에 성공했다는 것은 결코 믿고 싶지 않은 소식이었다. 나는 고등학생 때 유신 선포를 처음 알았을 때와는 아주 다른 감정에 휩싸여 들었다. 유신 때에는 '박정희가 드디어 미쳤나 보다'하는 의혹과 놀람이었는데 비해 전두환에게는 선명한 경멸감이 치밀어 올랐다. 그래서 나는 데모에 적극 가담하기로 했다.
그 당시에는 '페퍼포그'라는 유독가스를 분출하는 장갑차가 가장 무서운 데모 진압 장비였다. 검은 장갑차는 처음 보는 사람에게 엄청난 공포감을 주었다. 사과탄이라는 근거리 발사용 가스탄도 있었다. 그러나 시위가 반복되면서 시위대는 페퍼포그나 사과탄에 요령껏 대응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그래서 나온 신무기가 있었는데 그것은 공중에서 럭비공 튀듯이 거칠게 비행하면서 터진다. 우리가 '지랄탄'이라고 불렀던 그 신무기는 너무 위험했기 때문인지 그다지 많이 사용되지 않았다. 아마 계속 사용되었더라면 또 그에 대응하는 데모 방식도 나왔을 것이었다.
아무튼 그 때 며칠간은 군부 집단의 위기였다. 수도의 중심 시가지가 거의 일주일 동안 시위대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4.19 때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이야말로 군사 반란자들을 몰아낼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라고 단정했다.
이미 3월 신학기부터 각 대학마다 평교수협의회가 부활되었고 긴급조치로 밀려났던 해직 교수와 제적생들이 돌아와 민주화의 주도권을 요구하고 있었다.
분노한 학생들과 분개한 교수 "유신 잔당이 뭐야? 유신 어른이지"교정은 바야흐로 데모 출정식으로 붐비고 있었다. 그들은 노래와 구호를 번갈아서 부르고 외쳤다. 나는 따사로운 봄 햇살을 받으며 출정식 토론회를 경청했다.
"여러분! 지금은 서울의 봄이 절대 아닙니다. 안개 어두운 혼미 정국입니다. 권력에 알아서 기는 신문을 믿지 마십시오. 세 김씨는 이제 개털입니다. 박정희가 대가리에 총 맞아 죽은 지 불과 47일 만에 그의 충견들이었던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이가 하극상 군사 반란에 성공했습니다. 놈들에 의해 유신 연장 음모가 획책되고 있습니다. 이제 이 나라의 민주화는 우리 손에 달렸습니다. 우리 다 함께 외칩시다. 유신 잔당 물러가고 전두환은 자폭하라!"이어서 흘러간 노래 '홍도야 우지마라'가 뜬금없이 터져 나왔다. 음악을 배경으로 박근혜와 비슷한 음성이 나왔을 때야 비로소 나는 그 배경음악의 의미를 알아 차렸다.
"오~빠, 아버지의 원수를 가~파 주세요."오빠는 전두환이었고 홍도는 박근혜였다.
다음으로 그들은 노래를 불렀다.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에 곡을 붙인 노래였다.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오래"그때 머리가 벗겨진 웬 교수 한 분이 사회자에게 발언권을 요청했다. 사회자가 머뭇거리자 그는 마이크를 낚아채 버렸다. 대머리 교수의 얼굴에는 분기와 노기가 얼크러져 있는 듯했다. 교수는 학생들에게 훈계를 하려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교수님, 여기는 우리들의 토론장입니다.""알아. 그래도 내가 한마디 할 수 있는 거잖아?"교수는 심한 경기 사투리 억양을 쓰고 있었다.
"여러분이 주장하는 민주주의라는 게 뭡니까? 반대 의견도 경청하는 거 아니우?"곳곳에서 이런저런 고함이 터져 나왔다. 교수에게 발언권을 주라는 주장도 있었지만 줘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더 많은 것 같았다. 반대하는 학생들은 대부분 그 교수를 알고 있다는 기색을 보였다. 심지어는 빨리 끌어 내리라는 과격한 외침도 있었다.
"저 또라이는 왜 또 나서는 거야?""문교부장관 생각 있나 봐.""야, 니 연구실로 얼른 꺼져!"학생들은 교수에게 반말을 넘어 욕지거리를 서슴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입대하기 전만 해도 보기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교수는 한사코 마이크를 놓지 않았다.
"여러분의 주장은 정당해요. 하지만 지성인의 언어가 너무 상스러워요. 대가리에 총 맞아 죽다니요?... 그리고 어떻게 사람에게 그것도 윗사람에게 자폭하라고 합니까? 자폭이 뭔지 알긴 해요 ? 그것은, 그것은,... 터져 죽으란 거 아니우? 또 유신 잔당이 뭡니까? 잔당이란 말을 알기나 해요? 그건 빨치산한테 썼던 말이라구요. 정 하고 싶으면 유신 어른이라고 하세요. 유신 어른!"한꺼번에 폭소가 터졌다. 통렬하게 웃고 난 나는 이게 결코 웃을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왜냐하면 교수는 진정을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개그가 아닌 진정이었기에, 그리고 그 사람이 교수였기에 끝까지 웃을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그러자 나는 섬뜩함을 느꼈다. 저런 분들이 계시니까 전두환이 같은 이가 득세하는 세상이 되었구나. 민주화는 생각보다 어렵겠구나. 그럼 어떻게 살아야 하나? 대체로 이런 연상이 연쇄적으로 막막한 의혹의 연기를 지피고 있었다.
교수의 발언을 끝내게 한 것은 학생 두세 명의 완력이었다.
출정식을 마친 시위 대열이 잔디 광장을 몇 바퀴 도는 동안 참가 인원은 급격히 늘어났다. 주동자 측의 확성기는 방관하거나 주저하는 학생들을 향해 민주화의 파도에 합류할 것을 종용했다. 나는 대열의 뒤를 따랐다. 나중에 경찰과 대치하게 될 때쯤이면 그때 가서 맨 앞으로 나설 계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