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1년 3월 28일, 파리시청에서의 코뮌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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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패한 절대왕정을 무너뜨리고 근대 시민사회를 성립시킨 프랑스 대혁명. 그 마지막 단계였던 '파리코뮌'은 불과 두어 달밖에 지속되지 못한, 거리의 바리케이드로 세운 허술한 정권이었지만 역사상 최초의 노동자 민중 자치정부였다.
파리코뮌이 성립되게 된 배경은 다음과 같다. 2월혁명으로 루이 필리프가 축출되고, 뒤이어 정권을 잡은 나폴레옹 3세는 아무런 준비도 없이 프로이센과 전쟁을 하게 된다. 결국 개전 6주도 안된 9월초에 황제와 프랑스군은 스당(Sedan)에서 프로이센군에게 항복하고 9월 4일에 이 소식이 파리에 전해지자 파리의 민중이 봉기하게 된다. 결국 민중들은 입법원으로 하여금 제정의 몰락을 선언하게 하고 파리시청에 수립된 임시정부는 제3공화정을 선포하였다.
임시정부는 전쟁을 계속하려 하였으나 1871년 1월말에 파리마저 항복하게 되고, 3월에 독일에게 알자스와 로렌의 일부를 양도하고 50억프랑의 배상금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강화가 성립됐다. 그러나 파리의 노동자와 소시민층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국민방위군은 3월 18일 파리의 행정권을 장악하여 ‘파리 코뮌’을 수립하고 26일에 코뮌평의회 의원 약 90명을 선출했던 것이다. 물론, 이 명단에 사회주의의 열렬한 신봉자였던 쿠르베가 빠졌을 리 없다. 쿠르베는 파리코뮌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미술부 장관, 파리예술가연맹의 위원장, 루브르 박물관의 책임관리자로 활동했다.
코뮌평의회 의원들은 곧 사회개혁에 착수했다. 그 내용은 노동조건의 개선, 소유자가 포기한 공장의 접수, 협동적 생산과 급진적인 교육개혁 등 종전의 노동운동과 프랑스의 사회주의자들의 요구를 반영한 것이었다. 그러나 영광은 오래가지 않았다. 당시 코뮌 지배하의 파리에서 발행된 신문에 실린 칼럼이 이를 말해준다.
"이제 시의 시대는 끝났다. 곧 지루한 산문의 시대가 시작될 것이다."승리에 도취된 파리 시민들에게 환호성을 멈추고 곧 닥칠 정부군과의 결전을 준비하라는 뜻이었다. 이러한 코뮌에 대해 정부군은 파리를 포위한 채 코뮌이 식량부족으로 지치기를 기다렸다. 코뮌은 초기의 축제분위기와는 달리 점차 가혹해지는 식량난에 시달려 동물원의 동물을 살육하고 심지어는 애완동물과 쥐까지 잡아먹었다고 한다. 이를 알아차린 정부군은 5월 21일 공격을 개시했고 훗날 역사책에 '피의 일주일'로 기록되는 정부군과의 격렬한 시가전 끝에 28일 코뮌은 무너졌다.
쿠르베는 코뮌이 무너진 뒤, 방돔 광장의 나폴레옹 석주를 파괴한 죄로 감옥에 보내진다. 몇 개월 뒤에 병보석으로 풀려나기는 했지만 프랑스 정부에 의해 전 재산이 몰수되고, 새로운 기둥을 세우기 위한 비용으로 생전에 그가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막대한 벌금이 부과되자 쿠르베는 스위스로 탈출한다. 이때 그의 나이 54세. 그리고 그는 스위스의 호반에서 망명생활을 한지 4년 만에 객사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