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2008.05.21 10:46수정 2008.05.21 10:47
사진을 한 장 꺼내놓습니다. 한쪽 귀퉁이가 살짝 찢어지고 세월에 밀려 조금은 바래버린 졸업사진첩도 꺼냈습니다. 그러고는 엉덩이는 스르륵 앞으로 밀고 어깨는 대신 뒤로 스르륵 젖히고서 잠시 눈을 감고 그려봅니다. '나, 초등학교 시절엔 무엇을 하고 지냈던가'
"지은이 주중식은 창녕 부곡 논실에서 태어났습니다. 낙동강을 끼고 있는 마을에서 마음껏 놀고 일하며 말과 글을 배웠습니다. 고등학생 때부터 마산과 부산에 있는 학교에 다녔고, 초등학교 교사가 되어서는 통영에서 섬마을 아이들하고 지냈습니다. 얼마 동안 교단을 떠나 부산에서 공병우 타자기 보급하는 일을 하다가, 다시 교단으로 돌아와서 산으로 둘러싸인 거창에서 아이들과 지내고 있습니다. 교실에서 ... " (<들꽃은 스스로 자란다>, 책날개 그리고 마지막 사진 뒷 장인 마지막 장에서)
지은이 주중식 선생님께서 아이들과 함께 계시는 교실을 떠올리기 전, 저는 문득 제가 공부하던 교실을 떠올렸습니다.
4층 맨 끝에 있는 교실에서, 남자와 여자라는 성별 차이를 조금씩 알게 되면서 짓궂은 장난 치는 친구들 옆에서 피식 피식 웃던 초등학교 6학년 시절이 지금 다시 눈 앞에 있는 듯합니다. 모든 게 다 좋았을리는 없지만, 어쨌든 참 좋았고 재밌었던 6학년 시절이라고 여기며 잠시 혼자 날개 펴고 어딘가로 날다 화들짝 깨어 일어나 다시 책을 펼쳐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엔 학교라기보단 자연 그대로 옮겨다 놓은 것 같은 '살면서 배우고, 배운대로 다시 살아가는 곳'이 있었습니다.
그곳은 학교이면서 자연이었고, 자연이면서 곧 넒은 세상이기도 했습니다. 아이들은 그곳에서 지금 세상 너머 다른 세상을 스스로 만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그곳은 학교도 아이도 선생님도 빛나는 '샛별초등학교'입니다.
웃음꽃 피는 교실에서
1970년대가 끝날 무렵, 지은이 주중식 선생님은 교단을 훌쩍 떠났다고 합니다. 아이들 보면 좋아라 하시는 분이 교단을 '버린' 시절이 있었답니다.
왜 그랬느냐고 선생님께 직접 묻고 싶은 마음이 들 때에,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분단과 독재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 싫었고, 거짓과 억압으로 숨 막히게 하는 관료주의 행정에 신물이 났기 때문입니다"라고 그 이유를 알려주시더군요.
그런 '과거'가 있어서인지, 선생님은 욕심도 없고 거친 환경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들꽃이 되길 바라며 '들꽃, 너를 닮고 싶구나'를 아이들에게 주련다는 말씀을 적어놓으셨더군요. 첫 장 첫 글에서요.
누가 누구를 가르친다기보다 선생님과 아이들이 서로 만나는 곳이 곧 교실이 되기를 바라는 주중식 선생님. 그래서 군대, 전쟁과 같은 모습이 떠오를 만한 것은 교실에서 다 몰아내십니다. 웃음 잃지 않는 아이들 모습만 빼고요. 체벌 문제로 고민하는 여느 선생님처럼 같은 고민을 하시더군요. 스승의 날마다 선물인지 뇌물인지 알 수 없는 '두툼한 정성'들 때문에도 고민하시더라고요, 여느 선생님들처럼.
웃음과 나눔을 막는 모든 것을 교실에서 쫓아내시고 웃는 아이들만 남기시는 선생님은 아이들이 스스로 민주주의 경험을 교실에서 몸에 익혀가기를 바라십니다. 떠드는 아이에게 벌점을 주고 그렇지 않은 아이에게 점수를 더 준다는 '훈시'에 한 아이가 근거있는 이유를 대며 글을 통해 반대하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식으로 말이죠.
들꽃은 스스로 자란다
자연이 곧 교실이라고, 사는 모습과 생각하는 것을 그대로 담는 글이 좋은 글이라고 믿고 사시는 선생님.
선생님은 어느 여름방학 중에 여러 학교 아이들이 모인 '글쓰기 교실'에서도 아이들에게 '있는 그대로 살고 보여주는 삶'을 가르치십니다. '겪은 일 쓰기(생활문 쓰기)', '풀이글(설명문) 쓰기', 느낌글(감상문) 쓰기'와 같은 재밌는 '놀이'들을 통해서요. 수염이 길었던 당신 모습을 아이들의 글쓰기 재료로 기꺼이 내주시기도 하면서요.
어떤 짠돌이보다도 더 아껴 쓰실 듯한 주중식 선생님은 아이들이 돈보다는 꿈을 갖고 살길 바라십니다. 그래서 부모들에게는, 아이들을 위해 사랑과 소신 그리고 좋은 분위기 조성에 힘쓰라고 조언하십니다. 아이들이 (자신이 발견하고 체험하는) 꿈을 안고 세상을 직접 헤쳐갈 수 있도록 말입니다.
주중식 선생님은, 첨단문명의 경연장이라고 할 만한 미국에서 오랜 전통을 고수하며 자연과 벗하며 사는 기독교 공동체 아미시(Amish)에게서 '자연스럽게 사는 삶'이 무엇인지를 배우신 것 같습니다. 선생님은 배울 것이 있다면 그곳이 깊은 산중이라도 찾아가며, 아이들에게도 자연을 그대로 교재로도, 교실로도 사용하십니다. 아이들이 직접 경험케 하면서.
책읽기, 글쓰기
선생님은 일기를 보물이라고 하시네요. 살아있는 역사가 무엇인지를 자연스럽게 아이들에게 가르치십니다. 책을 통해서 스승을 만나고 그런 뜻밖의 스승에게서도 많은 걸 배운다고 말씀하시는 선생님은 책 읽는 법이며 좋은 책 고르는 법에 대해서도 마음껏 펼쳐놓으십니다.
사는 모습 그대로 글에 담고, 같은 모양과 같은 내용을 지닌 '교과서'를 넘어서서, 아이들이 다양한 책을 읽고 그 속에서 넓고 다양한 세상을 찾아가길 원하시는 선생님은 학급 문집 '들꽃' 만들기에도 참 열심이십니다.
옛이야기가 얼마나 좋은지를 말씀하시는 부분에서는 '아이가 따로없다'라는 생각마저 합니다. 모든 것이 배울 것이고 모든 것이 교재인가봅니다. 책을 읽는 것에서도 삶을 끄집어내시고, 글을 쓰는 데서도 삶을 찾아내시는 선생님이십니다.
샛별초등학교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