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정서를 잘 살려낸 그림책들

[책소개] <엄마 마중> <심심해서 그랬어> 외

등록 2008.05.24 11:12수정 2008.05.24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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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우리나라 정서가 잘 표현된 그림책들에 더 후한 점수를 주게 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이 우리나라 정서를 점점 잃어가고 있기 때문에 한국적인 매력을 알려주려면 애써 찾아봐야 보이는 까닭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림책은 주제나 내용도 중요하지만 우선 그림을 먼저 보게 됩니다. 말 그대로 그림책이기 때문이지요.

전통적인 소재나 옛 이야기를 다룬 책 중에는 아이들의 시선에 맞추기보다는 예술성에 치중해 너무 무겁게 표현해서 정작 아이의 마음을 얻지 못하는 책도 있습니다. 엄마 눈에는 쏙 드는데 쿠하가 외면하는 책 중에는 '백두산 이야기'가 대표적입니다. 어떻게든 읽어주려고 시도해 보지만 두어장 넘기면 흥미를 잃고 쪼르르 달려가 다른 책을 집어듭니다. 좀 더 자라면 좋아하게 될지 모르겠지만, 오늘부터 29개월에 돌입한 쿠하에게는 아직 무리인가 봅니다.


책을 사기 전, 인터넷에 올라온 선배 엄마들이 쓴 서평을 참고 하는데, 쿠하 또래는 별로 반응이 없다는 경우가 많아서 사주지 않은 책 가운데 <아씨방 일곱 동무>가 있습니다. 어린이 도서관에 갈 때마다 용케도 찾아와 읽어달라고 하는 책입니다. 

 '규방칠우쟁론기'를 그림책으로 재현한 <아씨방 일곱 동무>
'규방칠우쟁론기'를 그림책으로 재현한 <아씨방 일곱 동무>비룡소

'규방칠우쟁론기'를 그림책으로 재구성한 이 책은 옷 짓는 아씨가 낮잠을 자는 틈에 자, 바늘, 실, 인두, 다리미, 골무, 가위 등 일곱가지 도구들이 서로 잘났다고, 자기가 없으면 옷을 만들 수 없다고 뽐내는 이야기입니다.

옛날 사람들이 어떻게 옷을 만들어 입었는지, 옷을 만들 때는 어떤 도구가 필요했는지 이야기 나누고, 쿠하가 입고 있는 옷은 어디서 누가 만든 옷들인지 말해주면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입니다.

겉표지에서는 바깥을 쳐다보는 아씨방 일곱 동무들의 얼굴을 볼 수 있고, 뒤표지에서는 일곱 동무의 뒷모습을 볼 수 있어 책 표지까지 샅샅이 읽어줘야 아이가 비로소 책꽂이에 갖다 놓습니다.

 엄마에게 '넉 점 반'이라며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귀여운 꼬마 아가씨.
엄마에게 '넉 점 반'이라며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귀여운 꼬마 아가씨.창비

'넉 점 반'이 무슨 뜻일까요? 제목을 보고서 한참 갸우뚱 했던 책입니다. 넉 점 반은 '네 시 반'이라는 뜻입니다. 시계가 흔하지 않던 시절이 배경인 <넉 점 반>은 윤석중의 동시를 그림과 함께 엮었습니다. 가겟집에 엄마 심부름을 간 아이가 닭, 개미, 잠자리, 분꽃 등에 정신이 팔려 해가 진 후에야 돌아오는 이야기입니다. 저녁에 돌아와 천연덕스럽게 넉 점 반이라고 말하는 아이의 천진한 모습과 빛 바랜 한지 느낌이 잘 살아있어 질리지 않는 책 중에 하나입니다.


 뿌연 풍경에 어느새 정이 들어버렸습니다.
뿌연 풍경에 어느새 정이 들어버렸습니다.보리

세밀화 그림책은 엄마가 좋아해서 아이도 좋아하게 된 것인지, 아니면 이 시기의 아이들이 자세하게 그려진 그림을 좋아해서인지 모르겠지만, 쿠하는 <심심해서 그랬어>를 너무 좋아합니다. 처음에 읽어줄 때는 좀 뿌연 색감이 답답하게 느껴졌는데, 자주 보다보니 오히려 여름의 습하고 더운 날씨를 잘 표현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농촌 풍경에 '아동복'이라고 하기 민망한 러닝 셔츠 바람의 아이가 정겹게 느껴지기도 하고요. 집에서 키우는 가축들을 풀어주자 밭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리는데요, 송아지와 닭 등 집에서 키우는 짐승들과 친구처럼 지내는 모습이 마트에서 잘 포장된 고기로만 가축을 경험하는 쿠하보다 훨씬 건강한 생활 같아 부럽기도 하지요.


 광대뼈가 살아있는 할머니 같지요?
광대뼈가 살아있는 할머니 같지요?시공주니어
팥죽 할머니 이야기는 여러 출판사에서 다양한 그림체로 나온 옛 이야기 책입니다만, 쿠하가 제일 좋아하는 건 구름빵 작가 백희나의 <팥죽 할멈과 호랑이>입니다.

할머니를 잡아먹으려는 호랑이와 할머니를 돕는 세간 살림살이 연합군의 한 판 승부가 아이의 흥미를 떨어뜨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요즘 밤마다 자기 전에 팥죽 할머니 얘기를 해 달라고 반쯤 눈 감고 요청하는 바람에 엄마에겐 이미 지겨워진 책이지요. 

회화로 묶인 다른 버전들에 비해 백희나의 팥죽 할멈은 한지 인형으로 만든 뒤에 사진으로 찍은 이미지라 더 생생하게 다가오는가 봅니다. 할머니의 치마 주름이며 광대뼈가 실감나게 표현돼 있어 그림보다 훨씬 좋아하네요.

전래동화도 표현방식에 따라 아이의 마음을 더 끌어당길 수 있다는 걸 확인하는 책입니다.

 전차가 다니던 시절에 엄마를 마중나간 아이가 짠한 그림책 입니다.
전차가 다니던 시절에 엄마를 마중나간 아이가 짠한 그림책 입니다. 소년한길

<엄마 마중>은 함께 서점에 간 친구더러 쿠하에게 선물하라고 강요한 책입니다. 몇 년 만에 한국을 찾은 나이든 학생의 돈이 귀한 줄 알지만서도, 쿠하에게 뭔가 선물을 하고 싶다는 말에 평소 사줘야겠다고 생각하던 이 책을 얼른 집어들었습니다.

 코가 빨개진 아이가 차장더러 묻습니다.
코가 빨개진 아이가 차장더러 묻습니다.소년한길

전차가 다니던 시절, 엄마를 마중나간 아기는 겨울 바람에 코가 빨개집니다. 엄마가 올 때까지 꼼짝 말고 서 있으라는 차장의 말에 아기는 정말 꼼짝도 않고 서 있습니다. 몇 대의 전차가 오는 모습이 참으로 예쁘게 표현된 그림은 한참을 들여다보고 있게 됩니다. 특히 큰 나무 밑으로 전차가 달려오는 풍경은 할 수 있다면, 벽 하나에 통째로 따라 그려두고 매일 보고 싶은 그림입니다.

 쿠하가 잠에서 깨면 볼 수 있게 벽 하나를 이 그림으로 채우고 싶습니다.
쿠하가 잠에서 깨면 볼 수 있게 벽 하나를 이 그림으로 채우고 싶습니다.소년한길

책장을 넘기는 내내 아기가 엄마를 기다리는 모습이 짠한 <엄마 마중>. 한 손은 엄마 손을 꼭 잡고 다른 한 손에는 둥근 막대사탕을 든 아이의 뒷모습이 산동네 언덕에 나타나면 그제야 쿠하와 엄마의 입가에 안도의 미소가 번집니다.

한국적인 색감, 한국적인 소재, 한국적인 정감을 표현한 책들 중에 가장 잔잔하게 오래 남는 책을 들라면 주저 없이 <엄마 마중>을 추천합니다만, 쿠하가 제일 좋아하는 건 역시 <팥죽 할멈과 호랑이>, <심심해서 그랬어>이네요.

그림책에 관한 한 엄마인 저보다 아이의 눈이 더 정확할테죠. 우리 문화와 풍경이 담긴 책들은 글밥을 읽어주다가 곁가지로 뻗어 끝까지 읽어주지 못할 때도 종종 있으니, 교감 나누기와 책에 집중하는 비율을 잘 조절해야 합니다.

심심해서 그랬어 - 여름

윤구병 글, 이태수 그림,
보리, 1997


엄마 마중

방정환 외 지음, 겨레아동문학연구회 엮음,
보리, 1999


#그림책 #쿠하 #엄마 #세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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